소설리스트

34장 (86/194)

제34장 

대결

웜테일은 천천히 해리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해리는 몸을 묶고 있는 밧줄이 풀어지기 전에 어떻게 해서든지 몸을 일으켜 세우려고 마지막 남은 힘을 끌어 모았다. 웜테일은 새로 생긴 은손을 들어 올려 해리의 목구멍을 틀어막고 있던 천뭉치를 꺼냈다. 그리고 해리를 묘비에 묶어 놓았던 밧줄을 단번에 끊어 버렸다. 

도망 치는 게 어떨까? 어쩌면 아주 잠깐 동안 이런 생각이 해리의 머리 속을 스치면서 지나갔는지도 모른다. 해리는 풀이 무성하게 자란 무덤 위에 간신히 서 있었다. 상처를 입은 다리가 마구 후들거렸다. 죽음을 먹는 자들은 지금 이곳에 없는 다른 동료들의 빈자리를 메우면서 해리와 볼드모트를 중심으로 더욱 빽빽하게 원을 좁히기 시작했다. 

죽음을 먹는 자들이 만든 원 밖으로 걸어나간 웜테일은 케드릭의 시체가 쓰러져 있는 곳까지 걸어가서 해리의 요술지팡이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서둘러 해리를 향해 다가와 해리의 손에 거칠게 요술지팡이를 쥐어 주었다. 해리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잠시 후에 웜테일은 다시 죽음을 먹는 자들 사이로 되돌아 갔다. 죽음을 먹는 자들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해리와 볼드모트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결투를 하는 건지 배웠겠지, 해리 포터?"

볼드모트가 음산한 목소리로 물었다. 볼드모트의 새빨간 두눈이 어둠 속에서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그 말을 듣자, 문득 해리 포터는 2년 전에 호그와트에서 아주 잠깐 참가했던 결투 클럽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것은 전생의 일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 당시에 해리가 배운 것은 오직 무장 해제 마법뿐이었다. '엑스펠리아르무스!' 하지만 설사 그 마법의 주문을 외워서 볼드모트의 요술지팡이를 빼앗을 수 있다고 해도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최소한 서른 명이 넘는 죽음을 먹는 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데?

해리는 이런 절박한 상황에 처했을 때 사용하는 마법에 대해서는 전혀 배운 적이 없었다. 다만 무디가 항상 경고했던 바로 그것을 이제 곧 자신이 당하게 될 거라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 어떤 것으로도 막을 수 없는 아바다 케다브라 저주. 볼드모트의 말이 옳았다. 이번에는 해리를 위해 대신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어머니도 없다... 지금 이 순간 해리는 아무런 보호도 받을 수가 없다...

"해리, 먼저 서로 인사를 하자." 볼드모트가 살짝 허리를 숙이면서 말했다. 하지만 볼드모트는 뱀 같이 생긴 얼굴을 여전히 꼿꼿하게 치켜세운 채, 해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자, 품위있는 행동을 보여라... 덤블도어는 네가 예의바르게 행동하기를 원할 게다... 해리, 죽음에게 인사를 해라."

죽음을 먹는 자들이 다시 킬킬거리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입술이 없는 볼드모트의 입가에도 살짝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나 해리는 허리를 숙이지 않았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볼드모트의 손에 놀아나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절대로 볼드모트에게 그런 만족감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인사를 하라고 말했다."

볼드모트가 요술지팡이를 들어 올리면서 중얼거렸다. 그 순간 해리는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이 그를 거칠게 앞으로 잡아당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허리가 저절로 숙여지는 것을 느꼈다. 죽음을 먹는 자들은 더욱 큰 소리로 신나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주 좋아." 볼드모트가 만족스러운 듯 말했다. 볼드모트가 요술지팡이를 들어 올리자, 해리를 짓누르는 힘도 사라졌다. 

"이제 남자답게 나와 맞서라. 똑바로 당당하게 서서... 네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볼드모트의 새빨간 눈이 해리를 향하고 있었다. 

"자, 이제 결투를 시작하자."

볼드모트가 요술지팡이를 들어 올리면서 소리쳤다. 미처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뭔가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해리는 다시 크루시아투스 저주에 적중당하고 말았다. 온몸을 몽땅 불태우는 것 같은 강렬한 고통이 해리를 휘감았다. 해리는 더 이상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하얗게 달아오른 뜨거운 칼날이 살갗을 갈가리 찢어발기고 있는 것 같았다. 머리는 극심한 고통으로 터져 나갈 지경이었다. 해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큰 소리로 처절하게 비명을 질렀다.

갑자기 고통이 사라졌다. 해리는 땅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다가 간신히 다시 일어섰다. 하지만 웜테일이 자신의 손목이 잘려나갔을 때 그랬던 것처럼, 해리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해리는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죽음을 먹는 자들 쪽으로 비틀거리면서 다가갔다. 그러자 그들은 해리를 다시 볼드모트 쪽으로 떠밀었다. 

"잠시 휴식 시간이다." 볼드모트는 쭉 찢어진 콧구멍을 벌름거리면서 말했다. "잠시 쉬도록 하지... 해리, 고통스럽지 않느냐? 또다시 그런 일을 당하고 싶지는 않겠지?"

하지만 해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너도 곧 케드릭처럼 죽게 될 것이다... 무자비한 새빨간 눈동자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너는 비참하게 죽임을 당할 것이다. 해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결코 볼드모트의 장단에 놀아나지는 않을 것이다. 볼드모트에게 복종하지는 않을 것이다... 절대로 애원하지도 않을 것이다...

"다시 그런 고통을 당하고 싶으냐고 네게 물었다." 볼드모트는 해리를 노려보면서 나지막이 속삭였다. "대답하라! 임페리오!"

해리는 머리 속에서 생각이란 생각은 싹 사라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아, 그것은 너무나 달콤한 축복이었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다는 것... 마치 구름 위를 둥둥 떠다니면서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저 싫다고 말해라... 그런 일을 당하고 싶지 않다고... 그저 한 마디만 대답하라...

대답하지 않겠어! 보다 강한 목소리가 해리의 머리 속 어딘가에서 들렸다. 나는 대답하지 않을 거야!

그저 싫다고 말해라... 

나는 대답하지 않을 거야. 나는 말하지 않을 거야...

그저 싫다고 말해라...

"대답하지 않겠어!"

해리의 입에서 이런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해리의 목소리가 어두운 공동묘지에 울려 퍼졌다. 느닷없이 차가운 물을 흠뻑 뒤집어쓴 것처럼, 꿈결 같은 기분이 순식간에 싹 사라졌다. 그 대신에 크루시아투스 저주로 인한 고통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그와 동시에 해리는자신이 어디 있으며, 어떤 일을 당하고 있는지 또렷하게 떠올랐다. 

"대답하지 않겠다고?" 볼드모트가 음산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갑자기 죽음을 먹는 자들이 웃음을 뚝 그쳤다. "대답하지 않겠다고 했느냐? 해리, 네가 죽기 전에 아무래도 복종의 미덕을 가르쳐야겠구나... 고통을 좀더 당해야겠느냐?"

볼드모트는 다시 요술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해리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퀴디치 훈련을 통해 얻은 유연성을 발휘해서 해리는 재빨리 옆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볼드모트 아버지의 대리석 묘비 뒤로 굴러갔다. 주문이 빗나가면서 쩍 하고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해리, 우리는 지금 술래잡기 놀이를 하고 있는 게 아니다." 차갑고 냉정한 볼드모트의 목소리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죽음을 먹는 자들은 다시 요란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너는 나를 피해 숨을 수는 없다. 벌써 우리의 결투에 싫증이 난 것이냐? 이제 그만 내가 끝내 주기를 원하는 것이냐, 해리? 나와라, 해리... 나와서 승부를 벌이자... 곧 끝날 것이다... 아무런 고통도 없을 것이다... 물론 나는 한 번도 죽어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해리는 대리석 묘비 뒤에 몸을 잔뜩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무런 희망도 없었다... 어떤 도움도 기대할 수가 없었다. 볼드모트가 더욱 더 가까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리자, 해리는 이제 남은 길은 오직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두려움이나 이성조차도 뛰어넘는 것이었다. 숨바꼭질을 하는 철부지 어린 아이처럼 이대로 몸을 웅크리고 있다가 죽임을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볼드모트의 발 밑에 무릎을 꿇은 채 죽지는 않을 것이다. 아버지처럼 똑바로 서서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비록 어떤 방어도 불가능하겠지만, 최선을 다해 나를 지키다가 죽을 것이다...

볼드모트의 뱀 같은 얼굴이 묘비 위로 나타나기 전에, 해리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리는 요술지팡이를 단단히 움켜쥐고 앞으로 치켜들었다. 그리고 묘비 뒤에서 걸어나와 볼드모트와 정면으로 맞섰다. 볼드모트도 공격할 자세를 취했다. 

"엑스펠리아르무스!"

해리가 요술지팡이를 휘두르면서 소리치는 순간, 볼드모트도 동시에 외쳤다. 

"아바다 케다브라!"

볼드모트의 요술지팡이 끝에서 초록색 불빛이 발사되는 것과 동시에 해리의 요술지팡이에서도 붉은색 불빛이 발사되었다. 두 불빛은 중간에서 마주쳤다. 갑자기 해리의 요술지팡이가 전기에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부르르 진동하기 시작했다. 

해리는 요술지팡이를 놓치지 않기 위해 꽉 움켜잡았다. 아니, 요술지팡이를 놓고 싶어도 놓을 수가 없었다. 가느다란 광선이 두 요술지팡이를 서로 연결하고 있었다. 그것은 붉은색도, 초록색도 아닌 밝고 진한 황금색 광선이었다. 넋이 나간 눈길로 광선을 바라보던 해리는 문득 볼드모트의 길고 하얀 손가락도 마구 떨리면서 진동하는 요술지팡이를 꽉 움켜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순간 - 너무나 뜻밖에도 - 해리는 두 발이 땅에서 저절로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해리와 볼드모트 둘 다 허공으로 둥둥 떠올랐다. 두 사람의 요술지팡이는 아직도 번쩍거리는 황금광선으로 굳게 연결되어 있었다. 볼드모트 아버지의 무덤에서 번쩍 위로 들어 올려진 두 사람은 무덤이 없는 넓은 공터에 천천히 내려앉았다... 

죽음을 먹는 자들은 마구 아우성을 치면서 볼드모트에게 빨리 명령을 내리라고 요청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쫓아온 그들은 다시 원을 그리며 빙 둘러섰다. 커다란 뱀도 죽음을 먹는 자들의 뒤를 바싹 따르고 있었다. 몇 명의 마법사들은 이미 요술지팡이를 빼어 들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해리와 볼드모트를 연결하고 있던 황금빛이 갈라지면서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수천 개의 둥근 광선을 쏘아 올렸다. 하지만 두 사람의 요술지팡이는 여전히 굳게 연결되어 있었다. 수천 개의 황금빛 광선은 서로 얼기설기 엮이더니 두 사람을 둥근 돔 모양의 그물망 혹은 광선 우리 같은 것 속에 가두어 버렸다. 황금빛 광선 밖에서는 죽음을 먹는 자들이 자칼처럼 빙빙 맴돌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들이 아우성치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아무 짓도 하지 마라!"

볼드모트가 죽음을 먹는 자들을 향해 날카롭게 소리쳤다. 볼드모트는 새빨간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볼드모트도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 경악하고 있는 것 같았다. 

볼드모트는 해리의 요술지팡이와 굳게 연결되어 있는 황금빛 광선을 끊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해리는 두 손으로 요술지팡이를 더욱 세게 붙잡았다. 황금빛 광선은 아직도 끊어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내가 명령을내리기 전에는 아무 짓도 하지 마라!"

볼드모트는 다급하게 죽음을 먹는 자들에게 소리쳤다. 그 순간 이 세상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아름다운 소리가 허공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해리와 볼드모트를 둘러싸고 있는 광선들이 일제히 진동하면서 내는 소리였다. 해리는 전에 이런 소리를 딱 한 번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불사조의 노래였다. 

그것은 해리에게는 희망의 소리였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반가운 소리... 그 노랫소리는 밖에서가 아니라 바로 해리의 마음속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그것은 해리와 덤블도어를 서로 연결하는 소리였다. 그것은 마치 친구가 해리의 귀에 대고 속삭이는 소리 같았다...

연결을 끊지 말아라.

"알고 있어요." 해리는 그 노랫소리를 향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연결을 끊으면 안 된다는 걸 저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해리가 그런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상황이 훨씬 더 어려워졌다. 해리의 요술지팡이가 더욱 심하게 진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해리와 볼드모트 사이의 광선도 점차 서서히 변하고 있었다... 마치 두 요술지팡이 사이를 연결하고 있는 실을 타고 커다란 빛의 구슬들이 미끄러지듯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것 같았다. 

이윽고 빛의 구슬이 천천히 해리를 향해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해리는 굳게 잡고 있는 요술지팡이가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느꼈다... 이제 황금빛 광선은 볼드모트로부터 해리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해리는 자신의 요술지팡이가 분노로 인해 부르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제일 앞에 오던 빛의 구슬이 해리의 요술지팡이 끝까지 다가왔다. 요술지팡이가 어찌나 뜨겁게 달아올랐던지 해리는 이대로 불타 버리는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빛의 구슬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올수록, 해리의 요술지팡이도 더욱 심하게 떨렸다. 어쩌면 빛의 구슬과 맞닿는 순간, 요술지팡이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해리의 손에서 요술지팡이가 산산조각이 날 수도 있는 것이다. 

해리는 온통 정신을 집중해서 볼드모트 쪽으로 빛의 구슬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불사조의 노래가 해리의 귓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해리를 향해 다가오던 빛의 구슬들이 움직임을 멈추더니 그 자리에서 파르르 진동했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천천히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진동하는 것은 볼드모트의 요술지팡이였다... 볼드모트는 경악하다 못해 거의 두려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빛의 구슬 중에 하나가 불드모트의 요술지팡이 끝에서 몇 센티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서 파르르 진동하고 있었다. 해리는 자신이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그 이유조차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해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도 몰랐다... 하지만 해리는 볼드모트의 요술지팡이 쪽으로 빛의 구슬을 밀어내는 일에 모든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해리는 지금까지 평생 동안 어떤 일을 하기 위해 지금처럼 온 힘을 기울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빛의 구슬이 황금 실을 따라 움직였다... 잠시 동안 파르르 진동을 하더니... 마침내 빛의 구슬은 볼드모트의 요술지팡이 끝에 가 닿았다. 

갑자기 볼드모트의 요술지팡이가 고통에 가득 찬 비명 소리를 내뿜기 시작했다. 그리고 (볼드모트는 새빨간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있었다. 아마도 커다란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요술지팡이 끝에서 짙은 연기로 만들어진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가 사라졌다... 볼드모트가 웜테일에게 만들어 주었던 그 손의 유령이었다... 더욱 처절한 비명 소리와 더불어 볼드모트의 요술지팡이 끝에서 훨씬 더 커다란 무언가가 뭉게뭉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단단하고 짙은 회색빛 연기로 만들어진 것 같았다... 그것은 사람의 머리 모양이 되더니... 가슴과 팔이 생기고... 잠시 후에는 케드릭 디고리의 흉상이 되었다. 

해리가 일생에 딱 한 번 너무나 커다란 충격을 받아 요술지팡이를 떨어뜨리는 일이 있다면, 그건 바로 이 순간일 것이다. 하지만 해리는 본능적으로 요술지팡이를 더욱 세게 움켜쥐고 있었기 때문에, 황금빛 실은 여전히 끊어지지 않고 있었다. 

해리는 볼드모트의 요술지팡이 끝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을 똑똑히 쳐다보았다. 케드릭 디고리의 짙은 회색 유령(과연 유령일까? 그렇게 부르기에는 너무나 단단하게 보였다)이 마치 아주 비좁은 터널을 빠져나오기 위해 애를 쓰듯이 몸 전체를 서서히 빼내고 있었다...

마침내 케드릭의 형상이 땅바닥을 딛고 우뚝 섰다. 케드릭의 유령은 황금빛 실을 위 아래로 훑어보았다. 

"꼭 잡아, 해리."

케드릭의 유령이 해리를 격려하면서 말했다. 그 목소리는 어쩐지 아주 먼 곳에서 울려 퍼지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해리는 다시 눈길을 돌려서 볼드모트를 쳐다보았다. 부릅뜨고 있던 볼드모트의 새빨간 눈은 여전히 경악으로 가득 차 있었다. 볼드모트도 역시 해리처럼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 분명했다... 아주 희미하게... 해리는 죽음을 먹는 자들이 황금빛 돔 주위를 서성거리면서 아우성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볼드모트의 요술지팡이에서 또다시 고통에 찬 비명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끝에서 또 다른 무언가가 툭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사람의 머리모양을 한 짙은 그림자가 떠오르더니 재빨리 팔과 가슴이 만들어졌다... 오래 전에 해리가 꿈속에서 딱 한 번 본 적이 있는 노인이 케드릭과 똑같이 요술지팡이 끝에서 빠져나오고 있었다. 유령인지 그림자인지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그것은 케드릭 옆으로 걸어가더니 우뚝 섰다. 그리고 짚고 다니는 지팡이에 몸을 기댄 채, 약간 놀란 표정으로 해리와 볼드모트와 황금빛 돔과 서로 연결된 요술지팡이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저 자가 정말로 마법사였단 말인가?" 노인이 깜짝 놀란 눈빛으로 볼드모트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저 자가 나를 죽였어... 이봐, 저 자와 싸워..."

하지만 벌써 또 다른 머리가 나타나고 있었다... 연기로 만든 회색 동상과 비슷한 그것은 어떤 여자의 머리였다... 두 팔을 부들부들 떨면서 요술지팡이를 필사적으로 붙잡고 있던 해리는, 다른 유령들처럼 땅바닥 위로 내려오더니 똑바로 서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그 여자를 바라보았다...

버사 조킨스의 형상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이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요술지팡이를 놓으면 안 돼!" 그 여자가 소리를 질렀다. 케드릭의 목소리처럼 버사 조킨스의 목소리 또한 먼 곳에서 메아리치는 것 같았다. "해리, 저 자에게 당하지 마! 요술지팡이를 놓지 마!"

버사 조킨스와 다른 두 명의 형상은 황금 그물망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한편 죽음을 먹는 자들은 주위를 서성거리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볼드모트의 희생자들은 결투하고 있는 두 사람 주위를 빙빙 돌면서, 해리에게는 격려의 말을 중얼거렸으며 볼드모트에게는 해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어떤 말을 마구 쏘아대었다. 

이제 또 다른 머리가 볼드모트의 요술지팡이 끝에서 서서히 피어 오륵 시작했다. 해리는 그 머리를 보자마자, 그 사람이 누구인지 금방 깨달았다... 마치 케드릭이 요술지팡이 끝에서 나타나는 순간부터 이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하기라도 했던 것처럼... 해리는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왜냐하면 지금 막 모습을 드러낸 그 여자는 해리가 오늘밤에 어느 누구보다도 더욱 간절하게 생각한 바로 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길게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젊은 여자의 형상은 버사가 그랬던 것처럼 땅 위로 내려오더니 똑바로 서서 해리를 바라보았다... 해리는 미친 듯이 두 팔을 덜덜 떨면서 어머니 유령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네 아버지가 오실 거다..." 그 여자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너를 보고 싶어하신단다... 괜찮을 거야... 계속 버티거라..."

그리고 아버지가 나타났다... 제일 먼저 아버지의 머리가 나타나고 그 다음에 몸이 나타났다... 호리호리하게 키가 크고 해리처럼 머리가 헝클어진 남자였다. 볼드모트의 요술지팡이 끝에서 피어난 제임스 포터의 형상은 땅바닥으로 내려가더니 아내처럼 똑바로 섰다. 

잠시 후에 제임스 포터의 형상이 해리에게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고개를 숙여 해리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목소리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먼 곳에서 메아리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주 나지막하게 속삭였기 때문에 볼드모트는 그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볼드모트는 지금 자신의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희생자들 때문에 얼굴이 납빛으로 질려 있었다... 그는 이 유령들을 몹시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두 개의 요술지팡이를 연결하고 있는 빛이 끊어지면 우리는 아주 잠깐 동안만 머무를 수 있단다... 하지만 너에게 시간을 벌어 주도록 해보겠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포트키를 붙잡아야만 한다. 포트키는 다시 너를 호그와트로 돌려보내 줄 거야... 내 말을 알아듣겠니, 해리?"

"알겠어요."

해리는 숨을 헐떡거리면서 간신히 대답했다. 이제 손가락 사이로 자꾸만 미끄러지고 빠져나가는 요술지팡이를 잡기 위해 해리는 필사적으로 애를 쓰고 있었다. 

"해리... 내 시신을 갖고 가 주겠니? 내 시신을 우리 부모님께 전해 줘."

케드릭의 형상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래."

해리는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면서 간신히 요술지팡이를 붙잡고 있었다. 

"지금이다. 뛸 준비를 해... 바로 지금이야..."

아버지의 목소리가 소곤거렸다. 

"지금이에요!"

해리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어쨌거나 더 이상 한 순간도 요술지팡이를 붙잡고 있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해리가 온 힘을 다해 손목을 비틀면서 요술지팡이를 위로 잡아당기자, 황금실이 뚝 끊어졌다. 동시에 광선 그물망과 불사조의 노래도 사라졌다. 하지만 볼드모트의 희생자들의 형상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일제히 볼드모트 주위로 몰려들었다. 볼드모트가 해리를 보지 못하도록 시야를 가리고 있었던 것이다. 

해리는 젖먹던 힘을 다해 쏜살같이 달렸다. 얼이 빠진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던 죽음을 먹는 자 두 명을 쓰러뜨리면서 달려나간 해리는 묘비들 사이를 요리조리 도망쳤다. 

죽음을 먹는 자들이 해리를 추격하면서 주문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빗나간 주문이 묘비에 펑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해리는 주문과 무덤들을 살짝살짝 피하면서 케드릭의 시체를 향해 돌진했다. 더 이상 다리의 통증조차도 느낄 수가 없었다. 모든 신경은 오직 해리가 반드시 해내야만 할 일에 집중되어 있었다.

"저 놈을 기절시켜 버려!"

볼드모트가 사나운 기세로 부르짖는 소리가 들렸다. 케드릭의 시신으로부터 3미터 정도 떨어진 지점에 도달했을 때, 해리는 붉은 불꽃을 피하기 위해 대리석 천사 뒤로 휙 몸을 날렸다. 주문에 맞은 천사의 날개가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요술지팡이를 단단히 움켜잡은 해리는 천사 뒤에서 쏜살같이 뛰어 나갔다. 

"임페디멘타!"

해리는 미친 듯이 달려오는 죽음을 먹는 자들을 향해 요술 지팡이를 휘두르면서 소리쳤다. 해리는 아마도 그들 중에 한 명 정도는 명중시킨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더 이상 머뭇거리거나 뒤를 돌아볼 만한 시간이 없었다. 해리는 트리위저드 우승컵을 훌쩍 뛰어넘었다. 그 순간 등 뒤에서 더욱 많은 요술지팡이들이 해리를 향해 불꽃을 발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해리는 재빨리 바닥에 엎드렸다. 수많은 불꽃이 해리의 머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해리는 힘껏 손을 뻗어서 케드릭의 팔을 붙잡았다. 

"비켜서라! 저 놈은 내가 죽이겠다! 저 놈은 내 거야!"

볼드모트가 무서운 기세로 달려오면서 부르짖었다. 해리는 케드릭의 팔목을 더욱 세게 잡았다. 이제 묘비 하나만이 해리와 볼드모트 사이를 가로막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끌고 가기에는 케드릭의 몸이 너무나 무거웠고, 트리위저드 우승컵은 해리의 손이 채 닿지 않는 곳에 떨어져 있었다. 

볼드모트의 새빨간 눈이 어둠 속에서 활활 타올랐다. 볼드모트의 입술이 위로 말려 올라가고 있었다. 해리는 볼드모트가 요술지팡이를 들어올리는 것을 보았다. 

"아씨오!"

해리는 요술지팡이로 트리위저드 우승컵을 겨냥하면서 소리쳤다. 트리위저드 우승컵이 허공으로 붕 떠오르더니 해리를 향해 곧장 날아오기 시작했다. 해리는 재빨리 손을 뻗어서 트리위저드 우승컵의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해리는 배꼽 근처가 확 잡아당겨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포트키가 작동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와 동시에 분노로 가득 찬 볼드모트의 울부짖음이 들렸다. 세찬 바람이 불면서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빙빙 돌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포트키는 해리를 데리고 멀리 날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케드릭도 함께... 그들은 호그와트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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