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8화] 에필로그
“서 실장,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소파에 온몸을 묻고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송훈석 회장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뭐가 말씀입니까?”
“질투 유발 작전이 통하지 않아서 그러는 거잖아.”
“한 사장이 한 달에 20일 이상을 해외에 머무르고 있는데, 어떻게 지유한테 신경 쓰겠습니까?”
“그저께 귀국했잖아.”
“장 사장의 결혼식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조만간에 좋은 소식이 들려올 겁니다.”
“내가 모르고 있는 무언가 알고 있다는 소린가?”
“알고는 있지만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지유는 알고 있을까?”
“글쎄요.”
“빨리 지유를 불러 봐.”
잠시 후, 비서의 안내를 받아 송지유 과장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송훈석 회장에게 목례하고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회장님, 찾으셨습니까?”
“지금부터 사적인 대화를 나눌 거니까, 회장님이라는 호칭은 사용하지 않아도 돼.”
“네, 아빠.”
“한 사장하고는 자주 연락하고 있니?”
“지난 11월 초에 업무적으로 잠깐 통화한 이후로 통화하지 못했어요.”
“설마하니 한 사장이 너한테 관심 없는 것은 아니겠지?”
드르륵―
아주 애매한 순간에 테이블에 올려놓은 송지유 과장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겨울에게 걸려온 전화였다.
“아빠, 한 사장님한테 걸려온 전화예요.”
“우리는 이곳에 없다 생각하고 빨리 받아 봐.”
“네.”
짧게 대답한 송지유 과장은 천천히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한 사장님.”
[지유 씨, 그동안 잘 있었어요?]
“네. 잘 지내고 있었어요.”
[오늘 저녁때 지유 씨와 식사하고 싶은데, 시간 괜찮습니까?]
“요즘 일이 많아서 바쁘기는 하지만, 시간 낼 수는 있을 것 같아요.”
[그러면 오늘 저녁 대한호텔 레스토랑에서 7시에 만납시다.]
“알았어요. 그때 뵐게요.”
딸깍.
송지유 과장이 전화를 끊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송훈석 회장이 득달같이 질문을 던져 왔다.
“한 사장이 뭐라고 했는데?”
“오늘 저녁때 식사를 같이하자고 하네요.”
“드디어 한 사장이 너한테 고백하려나 보다.”
“이제 뜸을 그만 들였으면 좋겠네요.”
“이번에는 예감이 좋으니까, 한 사장을 만날 때 예쁘게 차려입고 나가라.”
“알았어요. 저는 일어나 볼게요.”
송지유 과장이 집무실 밖으로 나가자, 송훈석 회장이 본능적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서 실장, 우리도 따라가 볼까?”
“한 사장이나 지유한테 발각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오늘밤에 지유한테 결과를 들어 보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알았어. 그럼 이제 다른 얘기를 잠깐해 보자고. 검찰에 구속된 최성진 회장은 어떻게 됐어?”
지난 10월 말에 서동호 실장은 최성진 회장의 비리를 검찰에 제보했다.
이에 검찰은 비밀리에 내사를 거쳐 재산 국외도피죄 등을 적용했고 11월 중순에 전격 구속 했다.
지금은 1심 재판을 진행하고 있는 중이었다.
“해외로 빼돌린 돈이 워낙 많아서 무기징역을 면치 못할 것 같습니다.”
“그 인간이 얼마나 빼돌렸는데?”
“검찰이 파악한 금액만 70억 달러입니다.”
“허, 참… 그동안 도둑질만 배웠나. 많이도 빼돌렸네. 나중에 사면 받지는 않겠지?”
“벌금이 최소 140억 달러 이상 되기 때문에 절대로 사면 받지 못할 겁니다.”
“인과응보가 정말 있는 모양이구먼. 그나저나 최준하는 요즘 뭐하고 지내나?”
“지난 7월에 해고된 후에 미국으로 떠난 상태입니다.”
“그놈이 앙심을 품고 우리나 한 사장한테 해코지하지는 않겠지?”
사실 서동호 실장도 그 점이 우려돼서 장대산 사장한테 최준하의 행적을 조사해 달라고 부탁했고, 며칠 전에 연락받은 상태였다.
“그럴 가능성은 제로라고 보시면 됩니다.”
“왜?”
“지난달 말에 외상값을 독촉하는 마약 딜러와 조직원 두 명을 살해하는 바람에 경찰에 구속된 상태입니다.”
“쯧쯧쯧, 결국 그렇게 끝나는구먼.”
송훈석 회장이 가볍게 혀를 찼다.
* * *
같은 시각.
겨울은 호영과 통화 중에 있었다.
[한 사장, 아스날 인수 건 때문에 할 얘기가 있는데, 오후에 너희 회사로 넘어갈까?]
“오늘 저녁때 약속이 있어서 곤란하고, 내일 오전에 얘기하자.”
[약속? 무슨 약속?]
“사적인 약속이라서 너는 몰라도 돼.”
[설마… 지유 씨를 만나려고 하는 거야?]
“잘 알고 있네.”
[역시 그렇군.]
“이제 게임을 끝났으니까, 너는 강희한테 충실해라. 이만 끊는다.”
뚝.
겨울이 얼른 전화를 끊자, 하도진 실장이 말을 걸어왔다.
“사장님, 오늘 저녁때 누구를 만나실 예정입니까?”
“이제 마음 정리할 시간을 충분히 줬으니, 정 이사와 결판을 내야할 것 같아요.”
“하하하, 잘됐네요.”
“그나저나 아스날 인수와 관련해서 문제라도 발생한 겁니까?”
“아니요. 내년 초에 협상을 마무리 짓고, 계약서에 서명하기로 아스날 측과 합의가 끝난 상태입니다.”
“정 이사가 아스날 인수 건과 관련해서 저한테 할 말이 있다고 하는데, 도대체 뭘까요?”
“조강석 선수가 정 이사한테 아스날 지분을 나눠 달라고 떼를 쓰고 있답니다.”
“별거 아니네요. 그렇게 하라고 하세요. 회의나 참석합시다.”
임원 회의실.
정명훈 부회장이 회의에 참석한 경영진들을 주욱 둘러본 후,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장 사장, 내가 부탁한 것은 어떻게 됐나요?”
장대산 사장은 며칠 전에 정명훈 부회장한테 다소 황당한 부탁을 받았다.
일대일로 프로젝트에서 탈퇴한 나라들의 VIP들이 자신의 결혼식에 참석하고 싶어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유는 보나마나 빤했다.
차기 미국 대통령이 유력한 해리슨 상원의원과 친분을 쌓기 위함이리라.
즉시 해리슨 상원의원에게 전화를 걸어서 정명훈 부회장에게 부탁받은 내용을 말씀드렸고 어젯밤에 최종적으로 컨펌받았다.
“해리슨 상원의원께서 조건부로 허락하셨습니다.”
“어떤 조건인지 얘기해 보세요.”
“크리스마스 시즌이라서 마땅한 숙소가 많지 않답니다. 그래서 각 나라마다 수행원 포함해서 10명 이내로 제한해 달랍니다.”
“신 실장, 각 나라에 통보해 주세요.”
“네, 부회장님.”
신지훈 실장의 대답을 들은 정명훈 부회장은 장대산 사장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장 사장, 해리슨 상원의원께 곤란한 부탁을 들어 줘서 고맙다고 전해 주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제 다른 애기를 해 봅시다. 추 부사장, 철도 건설 공사는 언제쯤 착공식을 진행할 예정입니까?”
추성민 부사장은 착공식만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올 지경이었다.
철도 건설 공사는 내년 1월 말에 세 나라에서 동시에 착공할 예정이었다.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 세 나라 중의 한 곳에서 동시에 착공식을 진행하자고 제안했지만, 각 나라마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정치 사회적 문제로 인해 곤란하다는 답변을 받았다.
어쩔 수 없이 번갈아가며 세 나라에서 착공식을 갖기로 했으나, 이번에는 착공식 순서가 발목을 잡아 버렸다.
짧게 생각을 끝내고 정명훈 부회장의 질문에 대답했다.
“내년 1월 말이라는 것만 확정해 놓은 상태입니다.”
“목소리에 힘이 없는 이유가 뭡니까?”
“세 나라 모두가 자기네 나라에서 먼저 착공식을 진행하자고 주장하고 있는 중입니다.”
“해결방안은 있습니까?”
“다음 주에 미국에서 만나서 제비뽑기로 결정할 생각입니다.”
“그렇게 하시고, 기념품은 모자라지 않게 넉넉하게 준비하도록 하세요.”
“그렇지 않아도 SH무역 측에 그렇게 통보한 상태입니다.”
추성민 부사장과 대화를 마무리한 정명훈 부회장은 시선을 돌려 김종학 전무에게 말을 걸었다.
“미얀마가 일대일로 프로젝트에서 탈퇴할 수 있을 것 같나요?”
“중국 측이 완강하게 반대하는 바람에 시간이 조금 더 걸릴 것 같습니다.”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중국은 미국이 말라카 해협을 봉쇄할 경우를 대비해서 미얀마의 차우퓨 항에서 윈난성의 쿤밍을 있는 송유관을 2년 전에 완공했습니다. 만약에 미얀마가 일대일로 프로젝트에서 탈퇴하면, 연간 2,200만 톤의 석유 운송이 끊기기 때문에 강력반대하고 있는 입장입니다.”
김종학 전무의 대답을 들은 정명훈 부회장은 장대산 부사장한테 미국 측의 입장에 대해 물었다.
“미국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미얀마를 일대일로 프로젝트에서 탈퇴시키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송유관 때문인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단 알았어요. 추이를 지켜보도록 합시다.”
* * *
“지유 씨, 오랜만입니다. 오늘따라 더욱 예뻐 보이는데요?”
맞은편 의자에 앉은 송지유 과장에게 겨울이 애정을 담아서 인사말을 건넸다.
“겨울 씨도 오늘따라 더욱더 멋있어 보이네요.”
“하하, 고맙습니다. 이제 웨이터를 부를까요?”
잠시 후, 나이가 지긋한 지배인이 웨이터와 함께 겨울과 송지유 과장이 앉아 있는 테이블에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한겨울 사장님, 송지유 과장님. 저는 유진선 지배인이라고 합니다. 저희 레스토랑을 방문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유 지배인님, 제가 오늘 지유 씨한테 한턱내기로 했으니까, 신경 좀 써 주십시오.”
“두 분의 취향에 어울리는 스테이크와 와인을 서빙하겠습니다.”
“지배인님이 제 취향을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대한 그룹 3대 주주님의 음식 취향을 모르고 있으면, 지배인의 자리에서 내려와야죠.”
“하하, 알겠습니다. 그럼 무조건 제일 맛있는 걸로 부탁합니다.”
“네, 그러겠습니다. 부디 좋은 시간 되십시오.”
지배인이 호언장담한 대로 음식은 훌륭했다.
음악과 부드러운 조명 덕에 분위기도 더할 나위 없이 무르익었다.
겨울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금에 와서 하는 말이지만, 저는 지유 씨를 처음 본 순간부터 좋아한 것 같아요.”
“후후, 갑자기 그런 말을 꺼내니 당황스러운데요?”
“그럴 겁니다. 제가 엄청 많이 조심했거든요.”
“그럴 필요는 없었는데요.”
“그 당시에는 제 자신이 너무 초라해서 감정에 솔직하지 못했어요. 어느 정도 자격이 생겼다고 생각했을 때에는 여러 가지 사정이 복잡하게 얽히는 바람에 선뜻 고백하지 못했고요. 저는 지유 씨가 좋습니다.”
이 말과 함께 테이블 밑에 숨겨 놓은 장미꽃 다발을 송지유 과장에게 내밀었다.
“겨울 씨, 저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그 점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사과드릴게요. 앞으로 지유 씨한테 잘할 테니까, 허락의 의미로 이 꽃다발을 받아 주세요.”
송지유는 탐스러운 꽃다발을 가져가 얼굴을 묻고 잠시 향기를 맡았다.
그리고는 쑥스러운 듯 나지막하게 말했다.
“저를 좋아해 줘서 정말 고마워요. 오래전부터 이 순간을 기다렸어요.”
“저를 좋아한다는 말이죠?”
“그럼요.”
드르륵―
그때, 달달한 분위기를 깨는 핸드폰의 진동 벨소리가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한 겨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천천히 통화 버튼을 눌렀다.
“왜?”
[지유 씨와 데이트 잘하고 있냐?]
“싱거운 놈. 그게 궁금해서 전화한 거야?”
[뭐, 부정하지는 못하겠네. 저녁식사 후에 뭐 할 거야?]
“뭐하긴 뭐해? 집에 안전하게 데려다줘야지.”
[그러지 말고, 우리 가볍게 술이나 한잔하자.]
“됐거든.”
[강희가 지유 씨를 보고 싶다더라.]
“지금 강희하고 같이 있는 거야?”
[너는 모르고 있었지만, 강희하고 정식으로 사귄 지 두 달이 넘었어.]
“뭐야?! 그게 정말이야!”
겨울이 깜짝 놀라 물었다.
[내가 너한테 거짓말할 이유가 뭐가 있는데?]
“이 치사한 인간아, 나를 감쪽같이 속여서 기분이 좋냐?”
[어. 겁나게 좋다. 늘 만나던 곳에서 30분 후에 만나자.]
뚝.
오전의 일을 앙갚음이라도 하듯 호영이 먼저 전화를 끊었다.
“어휴, 음흉한 놈.”
“겨울 씨, 호영 씨가 뭐라고 했는데요?”
“그놈이 강희와 두 달 전부터 사귀고 있었답니다.”
“겨울 씨는 모르고 있었어요?”
“엥? 지유 씨는 알고 있었어요?”
“저는 두 달 전에 강희한테 들었거든요.”
“저는 그런 사실도 모르고 호영이 놈을 잔뜩 경계하고 있었으니.”
“하하하, 알고는 있었지만 호영 씨도 엄청 짓궂은 면이 있네요.”
“그렇죠? 아차, 호영이 커플이 가볍게 술이나 한잔하자고 하는데, 어떻게 하실래요?”
* * *
“쯧쯧, 둔하기 짝이 없는 놈.”
호영에게 한마디 들은 겨울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강희에게 시선을 옮기며 말을 걸었다.
“너, 그러는 거 아니다.”
“호영 오빠가 비밀로 하라고 했어.”
“내가 저렇게 음흉한 놈을 친구로 두고 있었다니.”
“네놈이 둔하다고 생각해 보지는 않았냐?”
“내가 너하고 무슨 말을 하겠냐?”
할 말이 없다는 듯 겨울이 입을 닫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호영은 씨익 웃으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지유 씨, 저놈이 곰처럼 둔하기는 하지만, 힘 하나는 끝내줍니다.”
“호호호. 그래요?”
드디어 때가 왔다는 듯 겨울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이고. 우리 강희는 불쌍해서 어떻게 하니?”
“어이, 한겨울. 마른 장작이 화력이 좋다는 얘기는 들어 보지 못했냐?”
“강희야, 사실이냐?”
“…….”
“하하하!”
겨울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호프집에 가득 들어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