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4화] 같은 날에 쫓겨난 부자 (2)
최성진 부회장은 가슴 저 밑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송훈석 회장이 어떤 자격으로 대한 그룹 공동 창업자의 손자인 자기를 해임시킨단 말인가.
하지만 그는 즉흥적으로 일을 벌일 사람이 절대 아니다.
이 자리에서 발끈하고 덤벼들면 백발백중으로 그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을 것이다.
그가 파 놓은 함정이 무엇인지 파악하기 위해서 화를 꾹꾹 누르며 싸늘한 어조로 물었다.
“저를 해임시키려는 이유가 뭡니까?”
“최 부회장님은 지나치게 권한을 남용했고, 경쟁사를 위해서 이적행위를 서슴지 않고 자행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인정할 수 없으니까, 구체적인 사례를 말씀해 주십시오.”
“권한남용 사례는 셀 수 없이 많으니까 패스하고, 이적행위에 대해서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최 부회장님이 지난 4월에 프랑스에서 어떤 이적행위를 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
“세상에 비밀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
“저는 최 부회장님의 해임 절차가 완료되면, 수집한 비리 자료들을 경찰에 제출해서 형사처벌 받도록 만들 생각입니다.”
최성진 부회장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송훈석 회장이 수집한 자료들을 경찰에 제출하는 순간, 자신의 운명은 거대한 태풍 앞에 조각배의 신세로 전락한다.
그런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만드는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회장님, 자진 사임하면 됩니까?”
사실 송훈석 회장은 최성진 부회장을 해임시킬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강수를 둔 이유는 목적한 바를 쟁취하기 위함이었다.
“미안하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제가 무릎이라도 꿇을까요?”
“이것 참, 난처하네요.”
그때,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서동호 실장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회장님, 최 부회장님이 그동안 대한 그룹에 공헌한 점을 감안해서 사임요청을 받아 주는 게 어떻겠습니까?”
“하아… 서 실장, 자네가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는데… 우리가 프랑스에서 최 부회장한테 당한 수모를 벌써 잊은 겐가?”
“잊지 않았습니다. 다만 냉정하게 생각하면, 최 부회장님이 형사처벌을 받게 됐을 때 대한 그룹도 적지 않은 대미지를 입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먼저 해임시키고, 형사처벌 받도록 만들려는 거잖아?”
“그보다는… 사임을 받아 주는 조건으로 대한 그룹의 지분을 요구한다든가… 그런 방안은 어떻겠습니까?”
최성진 부회장은 이게 웬 떡인가 싶었다.
사실 자기가 송훈석 회장을 찾아온 이유는 대한 그룹과 관련해 이런 담판을 짓기 위함이었다.
대한 그룹의 경영권을 차지할 수 없을 바에야 송훈석 회장과 결별하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하다고 판단했으니까.
그에 대한 방안으로 계열분리와 지분매각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때마침 서동호 실장이 지분 매각과 관련한 얘기를 꺼냈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고 판단 내린 그는 재빨리 대화에 끼어들었다.
“회장님,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뭐가 말씀입니까?”
“제가 보유한 지분을 회장님이 매입해 달라는 말입니다.”
“최 부회장님이 보유한 지분 없이도 대한 그룹의 경영권을 지키는 데 전혀 문제없습니다. 다른 사람한테 매각하든지 하십시오.”
“그간 회장님과 저의 인연을 생각해서 제 지분을 매입해 주십시오.”
싸늘한 표정을 연기하던 송훈석 회장은 이 정도면 적당하다 생각하고 바싹 조이고 있던 고삐에 힘을 풀기 시작했다.
“하아, 이놈의 정이 뭐라고… 좋습니다. 최 부회장님의 사임을 받아 주는 조건으로 지분을 매입해 주겠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현재 가격으로 매입할 수는 없습니다.”
주식을 대량으로 거래할 때는 일반적으로 블록딜(Block Deal)을 이용한다.
매도자는 시장가격대비 2~10% 정도 할인해서 매수자에게 지분을 넘기는 것이 통상적인 관례.
최성진 부회장은 5% 정도만 할인해 주는 것이 적당하다 생각하고 있었으나,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회장님이 원하는 조건을 말씀해 보십시오.”
“오늘 종가대비 25% 할인된 가격이 어떻습니까?”
“네?!”
깜짝 놀란 최성진 부회장의 목소리가 집무실에 가득 들어찼다.
“왜 놀라십니까?”
“회장님은 25% 할인 가격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25% 할인된 가격에는 최 부회장님의 형사처벌 면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만.”
“…….”
“최 부회장님이 저지른 비리를 토대로 법무팀에서 시뮬레이션 해 봤는데, 형량이 몇 년이 나왔는지 아십니까? 하하, 무려 25년이 나왔습니다. 근거자료를 드릴 테니까, 제 말이 틀렸는지 확인해 보세요.”
“하아, 아닙니다. 됐습니다.”
벼랑 끝에 몰린 자신의 처지가 한심스럽다는 듯 최성진 부회장이 허공을 쳐다보며 한숨을 내뱉었다.
“최 부회장님, 지분을 저한테 양도한다는 뜻으로 해석하면 됩니까?”
“…그렇게 하겠습니다.”
“주식 시장이 마감됐으니까, 변호사를 불러서 지금 작업을 시작할까요?”
최성진 부회장은 송훈석 회장이 파 놓은 함정에 빠졌다는 사실을 진즉에 알고 있었지만, 도저히 헤쳐 나올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멍청이… 이런 바보 같은 멍청이…….’
그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자책하며 송훈석 회장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회장님이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서동호 실장은 즉시 고홍석 고문 변호사를 집무실로 불러들여 지분 양도양수 절차에 돌입했다.
그가 서류 작업을 진행하는 동안, 송훈석 회장과 최성진 부회장은 부수적인 문제에 대해서 차근차근 합의를 진행해 나갔다.
“회장님, 제가 저지른 비리와 관련해서 경찰에 고발하지 않겠다는 확인서를 써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등기이사 사임은 이번 주 안으로 마무리 지었으면 좋겠습니다.”
즉, 이번 주 안으로 집무실을 빼라는 말이었다.
“내일 중으로 모든 절차를 완료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최 부회장님과는 적으로 만나게 되겠군요.”
“하, 언제는 적이 아니었던 적이 있었습니까?”
“흐음, 그런가요?”
그때, 고홍석 고문 변호사가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와 모든 절차가 완료됐음을 보고했다.
최성진 부회장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그에게 말을 걸었다.
“고 변호사, 불과 30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작업을 완료했다고요?”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제가 아니라 회장님께 하시는 게 맞을 듯합니다.”
고홍석 고문 변호사에게 공을 넘겨받은 송훈석 회장은 씨익 웃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최 부회장님, 우리들은 아마추어가 아니잖아요.”
“이런 상황을 진즉에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뜻입니까?”
“물론입니다.”
“허허, 이것 참… 저는 회장님의 심계에 두 손, 두 발 다 들었습니다.”
“칭찬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이제 지분 양도양수 절차를 진행할까요?”
거의 한 시간에 가까운 작업 끝에, 최성진 부회장이 보유하고 있던 대한 그룹의 지분 모두가 송훈석 회장의 손에 들어왔다.
더 이상 집무실에 남아 있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최진성 부회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표정은 들어올 때의 비굴하던 것과 다르게 험악하게 변해 있었다.
“이번에는 제가 당했지만, 다음번에는 송 회장님이 당하게 될 겁니다.”
“허허, 어떤 공격을 가해 올지 기대가 되는군요.”
“그럼, 나중에 봅시다.”
최성진 부회장은 형형한 눈빛을 빛내며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송훈석 회장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서동호 실장에게 말을 걸었다.
“쯧쯧, 한심한 인간 같으니. 저 인간은 우리나라 사법기관이 경찰만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하하, 그렇게 말입니다.”
“만약을 대비해서 준비를 철저하게 해 놔.”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나저나 인수한 지분은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
“회장님, 사위도 자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흐흐, 그렇지. 한 부사장이 자금 여력이 될까 모르겠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1년 뒤에는 충분히 지분을 인수할 수 있을 겁니다.”
“일단 한 부사장한테 의사를 물어보자고.”
“전화해 보라는 말씀이죠?”
“알면서 왜 물어?”
서동호 실장은 겨울에게 전화 걸어서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은 후, 핸드폰을 송훈석 회장에게 건네주었다.
“한 부사장, 통화 가능한가요?”
[그럼요. 회장님의 전화는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오늘 조 실장이 최 부회장을 함정에 끌어들이는 데에 성공했어요.”
[그거 잘됐네요.]
“그리고 최 부회장은 오늘 날짜로 대한 그룹을 그만두게 되었어요.”
[네?!]
깜짝 놀라는 겨울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서 생생하게 들려왔다.
“사실은 내가 최 부회장을 쫓아내기 위해서…….”
송훈석 회장은 조금 전까지의 일을 간략하게 꺼내 놓았다.
[회장님,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하하, 고마워요. 그래서 하는 말인데, 최 부회장이 나한테 넘긴 지분을 한 부사장이 매입해 줬으면 합니다. 오늘 매입한 가격으로 넘겨줄게요.”
[회장님의 제안은 진심으로 감사합니다만, 저는 지금 지분을 인수할 만한 자금이 없습니다.]
“지분은 지금 넘겨받고, 인수대금은 1년 정도 유예기간을 두면 되잖아요.”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사위한테 지분을 상속한다고 생각…….”
“회장님!”
화들짝 놀란 서동호 실장이 재빨리 대화에 끼어들었다.
“흠흠, 한 부사장, 내일 오후에 내 집무실에서 봅시다.”
[네, 회장님.]
딸깍.
송훈석 회장이 전화를 끊자, 드디어 서동호 실장의 잔소리가 시작됐다.
“회장님, 도대체 왜 그러시는 겁니까?”
“서 실장,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말 모르나?”
“아이고, 정말… 제가 졌습니다.”
* * *
그 시각.
최성진 부회장은 집무실에서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었다.
[최 부회장님, 사실입니까?]
“제가 조병석 실장한테 무려 1,000만 달러를 대가로 지급하고 얻어 낸 특급 정보입니다.”
[저희가 대한건설 컨소시엄 놈들을 박살 낼 수 있는 방법을 알고 계십니까?]
“CTG, CSCEC, ACS를 컨소시엄으로 끌어들이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굳이 콧대 높은 ACS를 끌어들일 필요가 있을까요?]
최성진 부회장은 천쥐펑 부회장이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세계 MS 1위 건설사인 ACS를 YCM 건설의 컨소시엄에 참여시키기 위해서는 상당히 많은 양보가 필요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존심 강한 그들이 YCM 건설 컨소시엄에 참여하지 않을 테니까.
모르긴 몰라도 자신들이 수행할 공사구간이 대폭 줄어들 것이 분명했다.
더구나 지금까지 세 나라에 80억 달러를 뇌물로 제공한 상태였기 때문에 자칫 적자를 볼 수도 있는 상황.
“천 부회장님, 만약에 ACS가 대한건설 컨소시엄에 합류한다면, 우리들은 80억 달러 중에 1달러도 회수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ACS를 끌어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알았습니다. 저희가 CTG와 CSCEC를 접촉할 테니까, YCM 건설 측에서 ACS를 접촉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알겠습니다. 나중에 통화하십시다.]
천쥐펑 부회장과 통화를 끝낸 최성진 부회장은 누군가에게 전화 걸어서 한참 동안 대화를 주고받은 후, 통화를 종료했다.
“이제 가 볼까?”
* * *
YCM 그룹 회장실.
최성진의 말을 들은 임지태 회장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에이… 매형, 농담하지 마세요.”
“내가 처남한테 거짓말할 필요가 뭐가 있는데?”
“지, 진짜로 대한 그룹을 그만뒀습니까?”
진심으로 깜짝 놀란 임지태 회장이 심하게 말을 더듬으며 대답했다.
“송 회장이 나에 대한 비리 자료를 가지고 협박하는 바람에 홧김에 그만둬 버렸어.”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내가 개인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회사를 키워 볼 생각이야.”
“저희 회사에 자리를 하나 만들어 드릴까요?”
“처남, 마음만 고맙게 받을게.”
사실 임지태 회장은 최성진을 영입할 생각이 1도 없었다.
사사건건 손윗사람 노릇을 하려 할 것이 빤한데, 영입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얘기를 꺼낸 이유는 그의 파워를 고려해 만약을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와 대화를 이어 나갔다.
“매형, 철도 건설 공사 프로젝트에서도 손을 뗄 예정입니까?”
“그렇게 할 수는 없지.”
똑똑.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박철헌 사장이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두 사람에게 목례를 하고 비어 있는 자리에 앉았다.
“부회장님, 컨디션이 좋지 않아 보이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부회장은 무슨. 오늘자로 대한 그룹 그만뒀어.”
“네?! 정말입니까!”
깜짝 놀랐다는 듯 박철헌 사장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사실이야. 두 사람은 이제부터 내가 하는 얘기 잘 들어.”
“네, 말씀하십시오.”
“오늘 조병석 실장한테 귀중한 정보를 하나 습득했는데…….”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