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8화] 그들이 처한 고민
“시차가 맞지 않아서 그런가? 몸이 왜 이렇게 찌뿌듯하지?”
호영이 기지개를 켜면서 소파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평소에 사용하지 않던 근육들을 사용해서 그런가 보지.”
“하긴… 나이를 더 먹기 전에 운동을 시작해야지, 이러다 큰일 나겠네.”
“그러게.”
“그나저나 쉬는 것도 못 하겠네. 우리 우간다에 온 김에 빅토리아 호수에 바람 쐬러 갔다 올까?”
“내가 작년에 갔다 왔는데, 겁나게 넓은 호수만 있더라.”
“그래서? 가기 싫다는 뜻이야?”
“물가라서 그런가, 모기도 얼마나 많던지.”
“에이, 징그러운 놈. 내가 안 가고 말지.”
“잘 생각했어.”
윙윙―
그들이 시시한 입씨름으로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겨울의 핸드폰이 울렸다.
겨울은 발신자를 확인하자마자 지체 없이 상대방과 통화를 시작했다.
“네, 하 실장님.”
[부사장님, 저희는 지금 호텔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고, 20분 후에 송 회장님의 숙소에서 회의가 있을 예정입니다.]
“회의 주제가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까?”
[토탈의 뿌요네 회장님과 루퍼트 장관님이 회의에 참석한다는 사실밖에 모릅니다.]
“네, 알겠습니다.”
딸깍.
겨울이 전화를 끊자, 호영이 재빨리 말을 걸어왔다.
“어떤 돌발사고가 발생했기에 회의를 하자는 걸까?”
“글쎄다.”
송훈석 회장 숙소.
속속 모여든 회의 참석자들이 비어 있는 자리에 앉자, 송훈석 회장이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가 급하게 회의를 소집한 이유는 뿌요네 회장님의 고민을 해소시켜 주기 위함입니다. 이제부터 뿌요네 회장님으로부터 고민이 무엇인지 들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뿌요네 회장이 송훈석 회장에게 고맙다는 의미로 수신호를 보내주고, 천천히 말문을 틔웠다.
“저희 회사는 앙골라에 여러 개의 유전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하루에 30만 배럴 가까이 석유를 수입하던…….”
겨울은 송훈석 회장이 회의를 소집한 이유를 확실하게 깨달았다.
토탈이 판매하지 못하는 석유를 인도, 또는 중국에 수출해 주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리라.
인도와 중국은 항상 석유를 필요로 하는 나라들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제안을 마다하지 않을 것이 확실했다.
자기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호영이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인도보다는 중국이 낫겠지?”
“당연한 소리를.”
겨울도 호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토탈이 인도에 석유를 수출하기 위해서는 국제유가 대비 5% 할인된 가격에 커미션으로 3%를 지급해야 한다.
반면에 중국은 국제유가 대비 할인하지 않은 가격으로 석유를 수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커미션을 지급할 필요도 없다.
다만, 바이어 맨데이트 역할을 수행할 회사를 물색해야 한다는 문제점이 따르지만.
“내가 오늘밤에 우리 회사 법인카드로 거하게 한턱 쏠까?”
겨울은 호영의 의도가 빤히 들여다보였다.
SH무역을 바이어 맨데이트로 선정시켜 달라고 로비를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정 이사, 번지수를 잘못 짚었어.”
“정 사장님은 네 말을 거의 들어주는 편이잖아.”
“일단 분위기를 파악해 보고 얘기를 꺼내 볼게.”
“고맙다 친구야.”
“그 대신에 오늘밤에 화끈하게 쏴라.”
“염려 마.”
두 사람의 속닥거림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뿌요네 회장의 설명이 끝이 났다.
“…석유를 판매해 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정명훈 사장이 입을 열었다.
“뿌요네 회장님, 저희는 인도와 중국이라는 대형 바이어를 알고 있습니다만, 서로 장단점이 있습니다.”
“어떤 장단점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인도에는 커미션 포함해서 최대 8% 가까이 가격을 할인해 줘야 하고, 미국의 동의를 받지 않아도 됩니다. 중국은 인도와 정반대의 상황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저희가 지급해야 하는 커미션도 중국 측이 지급한다는 말씀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참고로 하나만 말씀드리면, 월초에 중국은 러시아로부터 수입하는 모든 자원들에 대해서 12%의 커미션을 지급하기로 했습니다.”
“네?!”
진심으로 놀랐는지 뿌요에 회장이 경악에 가까운 소리를 내질렀다.
“원래는 거래 금액의 양측이 각각 2.5%씩 커미션이 결정된 상태였습니다만,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서 결국 12%로 늘어났습니다.”
“시쥔량 주석이 그 말도 안 되는 거래를 승인했다는 말씀입니까?”
“바이어 맨데이트한테 배정된 6%의 커미션 중에서 2%가 시 주석의 몫이었습니다.”
“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미국 측에서 동의해 준다면, 러시아와 같은 조건으로 석유를 수출할 수 있도록 저희가 힘써 보겠습니다.”
이제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루퍼트 장관에게 향했다.
루퍼트 장관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H&J 컨설팅 측에서 한 가지 조건을 수용해 주신다면 동의해 드리겠습니다.”
“네, 말씀하십시오.”
“아프리카 산유국들 중에서 앙골라가 중국에 석유를 제일 많이 수출하고 있는 중인데, 일대일로 프로젝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국제가격보다 낮은 가격으로 수출하고 있습니다. 앙골라도 일대일로 프로젝트에서 탈퇴하기를 희망하고 있지만,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까?”
“앙골라는 한 달에 3,000만 배럴 가까이 중국에 수출하고 있습니다.”
“일대일로 프로젝트에서 탈퇴하면, 석유 수출길이 막힐 것 같아서 주저하고 있는 중입니까?”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저희가 어떻게 도와드리면 됩니까?”
“중국에 비싸게 석유를 수출할 수 있도록 힘써 주시고, 안 된다 싶으면 인도에 수출해 주십시오.”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잠시 대화가 중단된 틈을 타서 겨울이 발언권을 요청했다.
“사장님, 바이어 맨데이트는 역할은 SH무역에 맡기는 게 어떻겠습니까?”
“정 이사한테 로비 받았나 보네?”
“오늘밤에 법인카드를 시원하게 긁겠답니다.”
“정 이사, 나중에 딴소리하면 안 돼.”
“그럼요. 저희 회사 사장님이 반대하면 제 개인 카드라도 긁겠습니다.”
“정 사장님,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상황입니까?”
궁금함을 참지 못한 정상호 사장이 결국 대화에 끼어들었다.
“제가 자오린 부총리와 통화하는 내용을 귀담아들어 보시면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으음, 알겠습니다.”
정명훈 사장은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한 후, 자오린 부총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 사장님, 국가번호 256은 어느 나라입니까?]
“우간다입니다.”
[정 사장님도 매우 바쁘게 살고 계시는 군요.]
“하하,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제 안부를 묻기 위해서 전화한 것 같지는 않고… 따로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제가 이곳에서 평소 안면이 있는 토탈의 뿌요네 회장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요?]
“저희가 최근에 중국이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해서 말씀드리면서 여유가 있는 석유를 수출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자오린 부총리의 목소리에 다급함이 실려 있었다.
“토탈이 앙골라에 유전을 소유하고 있는데, 한 달에 900만 배럴 가까이 중국에 수출할 수 있답니다.”
[900만 배럴 가지고는 간에 기별도 안 가는 양이지만, 신경 써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하,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그건 그렇고, 토탈이 제시한 거래 조건은 어떻습니까?]
“기존에 수출하던 조건인 국제가격에 연동해서 석유를 수출하고 싶다고 하는데, 부총리님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그렇게 되면 저한테 떨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겠네요?]
드디어 자오린 부총리가 미끼를 물었다.
이제 그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낚싯줄을 당기는 일만 남았다.
“그렇습니다.”
[정 사장님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저는 러시아가 중국에 자원을 수출한 조건에 플러스알파를 적용했으면 좋겠습니다.”
[플러스알파가 무엇인지 말씀해 보십시오.]
“저희 H&J 컨설팅에 배정된 커미션 중에 1%를 자 부총리님께 분배해 드리겠습니다.”
[정 사장님의 호의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제가 궁금한 게 있는데, 여쭤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우리한테 배정된 커미션은 어떻게 처리해 줄 예정입니까?]
“러시아의 경우처럼 바이어 맨데이트를 선정할 예정이고, 분배 방식은 똑같습니다. 다만, 바이어 맨데이트가 뿌요네 회장님과 안면이 있기 때문에 커미션은 1%를 지급해 주셔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주석님과 상의해서 곧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이제 겨우 전반전이 끝났을 뿐이었다.
“자 부총리님, 이제 다른 얘기를 잠깐 했으면 좋겠습니다.”
[또 있습니까?]
“제가 이곳에서 루퍼트 장관님을 만나서 대화를 나눴는데, 대화 내용을 자 부총리님도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습니다.”
[별로 좋지 않은 내용이겠네요?]
역시 자오린 부총리의 촉도 보통 사람들보다는 훨씬 뛰어났다.
“그렇기는 합니다만, 듣기 거북하시면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어차피 맞아야할 매라면, 지금 맞는 게 나을 듯싶네요.]
“루퍼트 장관께서는 앙골라도 곧 일대일로 프로젝트에서 탈퇴할 예정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중국에 헐값에 수출하고 있던 자원들을 인도에 수출할 수 있도록 저한테 부탁하셨습니다. 참고적으로 앙골라는 석유를 한 달에 3,000만 배럴 가까이 중국에 수출하고 있습니다.”
자오린 부총리에게서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정명훈 사장은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빤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말을 걸어올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
제법 시간이 흐른 후, 침울한 그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정 사장님,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면 안 되겠습니까?]
“어떤 부탁인지 말씀해 보십시오.”
[앙골라가 수출하는 자원들을 인도가 아닌 우리나라가 수입할 수 있도록 힘을 써 주십시오.]
“중국 측의 조건을 들어보고 결정하겠습니다.”
[주석님과 상의해 보고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만, 우리나라가 러시아에서 자원들을 수입하는 조건을 적용했으면 합니다.]
즉, 커미션으로 12%를 지급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제가 언제까지 기다리면 되겠습니까?”
[한 시간 안에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딸깍.
정명훈 사장이 전화를 끊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뿌요에 회장이 득달같이 질문을 던져 왔다.
“정 사장님, 어떻게 결론이 날 것 같습니까?”
“자 부총리의 욕심이 이만저만 많은 게 아닙니다. 조금 있으면 좋은 소식이 들려올 겁니다.”
“휴우, 다행이네요.”
뿌요네 회장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 부총리의 성격상 지금 당장 앙골라로 날아온다고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만약을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계약 실무자들을 스탠바이 시켜 놓으십시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나저나 자 부총리한테 커미션을 1%를 넘겨준 이유가 뭡니까?”
“자 부총리가 미끼를 확실하게 물도록 만들어 주기 위해서 떡밥을 던진 겁니다.”
“그렇다면 그 1%는 저희가 H&J 컨설팅에 지급해 주도록 하겠습니다.”
“주신다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하하하, 역시 시원시원하시네요.”
두 사람의 대화가 중단된 틈을 타서 정상호 사장이 옆자리에 앉아 있는 호영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만약에 중국 측이 H&J 컨설팅의 제안을 수용하면, 우리 회사에 떨어지는 커미션은 모두 얼마 정도야?”
“앙골라가 중국에 수출하는 자원의 양을 모르기 때문에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최소 2억 5,000만 달러는 넘을 것 같아요.”
“뭐야! 그렇게 많아?”
“네. 그러니까 오늘밤에 화끈하게 쏘셔야 할 겁니다.”
윙윙―
약 30분 정도 지났을 무렵, 정명훈 사장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느릿느릿한 속도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자 부총리님.”
[정 사장님, 방금 전에 주석님께 컨펌 받았습니다. 앙골라에서 언제 만났으면 좋겠습니까?]
“저희는 토요일 밤까지 일정이 꽉 차 있는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일요일 오후에 만나면 되겠네요.]
“아차, 일대일로 프로젝트 탈퇴 협상을 먼저 진행해야 하는 거 알고 계시죠?”
[그야 물론입니다.]
“그럼 앙골라에서 뵙겠습니다.”
정명훈 사장이 전화를 끊자, 루퍼트 장관이 급하게 말을 걸어왔다.
“자 부총리가 뭐라고 했습니까?”
“시 주석한테 컨펌 받았답니다.”
“아이고, 그러면 내가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는데.”
이 말과 함께 누군가와 통화하기 위해서 핸드폰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호영이 나지막이 넋두리를 내뱉었다.
“이건 뭐, 번갯불에 콩 구워먹는 것도 아니고…….”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