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7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군요
“방금 전에…….”
김종학 지점장은 급하게 연락을 받고 달려온 추성민 법인장한테 은센기 사장과 통화한 내용을 자세하게 보고했다.
“김 지점장, 은센기 사장의 말이 맞겠지?”
“저희도 TV 3,000대와 핸드폰 2만 대 건에 대해서 CONA 유통에 오퍼를 제시했기 때문에 거짓말은 아닙니다.”
“CONA 유통이 발주한 물량을 H&E 트레이딩에 빼앗긴 이유가 뭐야?”
추성민 법인장이 매우 기분이 상했다는 표정으로 물어왔다.
그도 그럴 것이, 대한 그룹은 아프리카 대륙에서 기반을 다지기 시작한지 20년이 넘었고, H&E 트레이딩은 신설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신생업체였기 때문이었다.
“법인장님,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정인데?”
“CONA 유통은 은센기 사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카반구 보건장관의 동생이 운영하고 있는 회사입니다.”
추성민 법인장은 어떤 상황인지 대충 감이 잡혔다.
작년에 카반구 장관은 반군들의 테러에 의해서 생명을 잃을 위기상황에 처한 적이 있었다.
겨울과 은센기 사장이 반군들의 기지에 침투해서 수술에 필요한 의약품을 되찾아오는 덕분에 겨우 목숨을 살릴 수 있었고.
카반구 장관은 당시에 두 사람에게 입은 은혜를 갚기 위해 H&E 트레이딩의 손을 들어준 것이리라.
“무슨 말인지 알았네. 내가 어떻게 도움을 주면 좋겠나?”
“내일 오전에 대한 그룹의 화물기가 잉가 3댐 건설 공사 및 도로 확포장 공사 착공식에 참석할 하객들한테 나눠 줄 선물을 싣고 콩고민주공화국으로 출발할 예정입니다. 이 화물기에 TV 3,000대와 핸드폰 2만 대를 싣고 왔으면 합니다.”
“그나저나 대한전자에 재고가 있을까?”
“제가 긴급하게 파악해 본 결과, TV는 나이지리아에 수출하기 위해서 생산한 물량이 남아 있고, 핸드폰은 오늘까지 생산하면 물량을 맞출 수 있다고 합니다. 문제는 대한전자 측에서 다른 바이어에 공급하기로 되어 있다면서,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해결할 테니까, 걱정 붙들어 매라고.”
김종학 지점장과 대화를 끝낸 추성민 법인장은 서동호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추 법인장, 무슨 일인가?]
“실장님, 회장님께 긴급하게 보고할 것이 있습니다.”
[지금 어디에 있는데?]
“행사장 뒤쪽에 위치한 대형 천막에 있습니다.”
[알았네. 회장님을 모시고 곧 내려가겠네.]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송훈석 회장이 서동호 실장과 함께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시립해 있는 추성민 법인장에게 이유를 물었다.
“추 법인장, 이번에는 무슨 일인가?”
“김 지점장한테 보고를 듣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추성민 법인장의 바통을 받은 김종학 지점장은 지금까지의 일을 빠르게 보고했다.
“콩고민주공화국에 카반구 보건장관이 운영하고 있는…….”
“서 실장, 임 사장한테 전화해서 바꿔 줘.”
“네, 회장님.”
짧게 대답한 서동호 실장은 임용식 대한전자 사장에게 전화 걸어서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은 후, 핸드폰을 송훈석 회장에게 건네주었다.
“임 사장, 요즘 대한전자 상황은 어때요?”
[더도 말고 요즘만 같았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임 사장한테 긴급하게 부탁할 게 하나 있는데, 들어줄 수 있습니까?”
[네, 말씀하십시오.]
잔뜩 긴장했다는 듯 임용식 사장의 목소리가 딱딱하게 굳어졌다.
“콩고민주공화국에 CONA라는 유통 회사가 있습니다. 대한 그룹 콩고지점이 이 회사로부터 최고급 65인치 TV 3,000대와 최신형 핸드폰 2만 대를 발주 받았습니다.”
[회장님, 제가 어떤 조치를 취하면 되겠습니까?]
“내일 오전에 우리 회사 화물기가 콩고민주공화국으로 출발할 예정입니다. 이 화물기에 TV와 핸드폰을 선적해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콩고 지점장은 송유관 건설공사 착공식 때문에 똥오줌을 가리지 못하고 있으니까, 이후의 업무는 SH무역의 임진택 부사장, H&E 트레이딩의 은센기 사장과 진행하도록 하세요.”
[네, 회장님.]
“우리나라로 귀국해서 봅시다.”
딸깍.
송훈석 회장은 핸드폰을 서동호 실장에게 건네주고 김종학 지점장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어 나갔다.
“김 지점장, 이제 됐나?”
“네, 회장님.”
“우리는 이제 갈 테니까, 뒷수습은 김 지점장이 책임지고 해 줬으면 좋겠어.”
“염려하지 마십시오.”
* * *
같은 시각.
겨울과 호영이 타고 있는 화물 트럭은 엔테베 국제공항에서 기념 선물을 무사히 인수해서 착공식장을 향해 서둘러 출발했다.
“진즉에 경찰차가 우리들을 호위해 줬으면, 벌써 착공식장에 도착하고도 남았겠다.”
겨울은 호영의 투덜거림을 뒤로하고 한국인 운전기사에게 말을 걸었다.
“기사님, 착공식장에 언제쯤이면 도착할 수 있을까요?”
“아무리 빨리 달려간다고 하더라도 10분은 걸릴 것 같습니다.”
‘우리가 착공식장에 도착해서 행사 진행요원들이 기념선물을 내린다고 가정하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만은 변하지 않았다.
도저히 방법이 없다고 판단한 겨울은 무세베니 실장에게 전화 걸었다.
그도 자신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신호가 울리자마자 전화를 받았다.
[한 부사장님, 지금 어디쯤 오고 계십니까?]
“착공식장으로부터 10분 정도 거리에 있습니다.”
[아이고.]
낙담하는 무세베니 실장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실장님, 죄송한 부탁입니다만, 행사를 10분 정도 늦게 끝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늦춰 보겠습니다.]
“그리고 화물 트럭에서 기념 선물을 내릴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입니다.”
[대통령님의 경호요원들을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겨울은 귀를 쫑긋 세우고 앉아 있는 호영에게 말을 걸었다.
“김 지점장님한테 스탠바이하고 있으라고 전화해라.”
“알았어.”
경찰차의 호위를 받은 화물트럭이 행사장 뒤쪽에 설치된 대형천막 앞에 정차했다.
연락을 받고 기다리고 있던 수십 명의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화물 적재함에 실려 있는 선물들을 내렸다.
그 모습을 멀뚱히 지켜볼 수만은 없던 겨울과 호영도 그들의 틈에 섞여서 굵은 땀을 뻘뻘 흘리며 하역을 도왔다.
수십 명이 달라붙었기 때문인지 다행히 불과 10분 만에 작업이 종료되었다.
“아이고, 죽겠다.”
“이하 동문이다.”
호영이 앓는 소리를 내며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겨울도 마찬가지.
두 사람의 모습을 안쓰러운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던 추성민 법인장이 생수병을 건네며 말을 건네 왔다.
“두 분 덕분에 큰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 시원한 물 드시면서 땀을 식히십시오.”
“아이고, 고맙습니다.”
겨울과 호영은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순식간에 페트병을 비워 버렸다.
“휴우, 이제야 좀 살 것 같네요.”
“CONA 유통에서 주문한 TV 3,000대와 핸드폰 2만 대도 화물기에 실려 올 예정입니다.”
“대한전자에 재고가 남아 있었나 보네요?”
“회장님께서 직접 나서서 깔끔하게 정리해 주셨습니다.”
“아, 그렇군요.”
“TV와 핸드폰을 저희 회사에 넘겨줘서 정말 고맙습니다.”
“그 말씀은 제가 아니라 은센기 사장한테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은센기 사장이 솔직하게 말하더군요. 처음에는 저희한테 넘겨줄 생각이 없었다고요. 한 부사장님이 그렇게 하라고 지시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넘겨줬답니다.”
“하하하, 은센기 사장님답네요.”
그때, 착공식 행사 마지막을 알리는 사회자의 우렁찬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졌다.
“저희는 이제 축하객들한테 기념 선물을 나눠 주러 가 보겠습니다.”
추성민 법인장이 행사진행 요원들과 함께 급하게 떠나가자, 겨울과 호영은 땅바닥에서 일어나 엉덩이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 냈다.
“한 부사장,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착공식 행사가 끝나는 즉시 VIP들은 대통령궁으로 이동해서 마사카 대통령이 주최하는 점심만찬에 참석하는 것으로 예정되어 있다.
하지만 겨울과 호영은 지금 땀범벅에 먼지까지 홀딱 뒤집어쓰고 있었다.
호텔로 돌아가서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대통령궁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
“무세베니 실장님께 양해를 구하고, 호텔로 돌아가서 휴식을 취하는 게 어떨까?”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네가 양해를 구해 봐.”
“내가 왜?”
싫다는 듯 호영이 바로 되물었다.
“내가 오늘 너보다 말을 더 많이 했잖아.”
“끄응, 그건 인정.”
호영의 활약으로 무세베니 실장에게 양해를 구한 두 사람은 호텔로 돌아가기 위해서 택시를 잡아탔다.
짧은 시간 동안에 워낙 많은 힘을 소진했기 때문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은 것도 잠시, 겨울에게 전화가 걸려오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네, 하 실장님.”
[부사장님, 이제 대통령궁으로 출발하려고 하는데, 지금 어디 계십니까?]
“저하고 정 이사는 몰골이 꾀죄죄해서 호텔로 돌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참고로 무세베니 실장님께 양해를 구한 상황입니다.”
[아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저하고 정 이사 몫까지 하 실장님이 드셔 주십시오.”
[하하, 그렇게 하겠습니다.]
* * *
대통령궁 만찬장.
헤드테이블에 앉은 정명훈 사장은 옆자리에 앉아 있는 문두야 탄자니아 부통령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식사 중에 있었다.
“정 사장님, 철도 건설 공사 프로젝트 타당성 검토는 언제까지 마무리 지을 예정이십니까?”
“늦어도 다음 달까지는 끝마칠 예정입니다만…….”
정명훈 사장이 의도적으로 끝말을 흐렸다.
문두야 부통령도 그의 의도를 눈치채고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사실은 완커건설의 천쥐펑 부회장이 타당성 검토가 언제 끝나는지 수시로 물어보고 있는 중입니다.”
천쥐펑 부회장과 최성진 부회장은 탄자니아와 케냐, 그리고 우간다를 연결하는 철도 건설 공사 프로젝트 수주를 위해 기부라는 형식을 빌어서 각각 40억 달러씩 세 나라에 뇌물을 제공했다.
따라서 완커건설과 YCM 건설은 80억 달러를 회수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철도 건설 공사 프로젝트를 수주해야 하는 상황.
그런 이유로 천쥐펑 부회장이 문두야 부통령에게 수시로 전화하고 있는 것이리라.
“뭐라고 대답해 줬습니까?”
“모른다고 대답하고 있는 중입니다.”
“만약에 천 부회장한테 또다시 전화가 걸려오면, 8월 중에 입찰공고하고 10월 중에 입찰을 진행할 예정이라고 얘기해 주십시오.”
순간, 문두야 부통령은 마음이 놓였다.
얘기가 나오고 철도 건설 공사 프로젝트에 대한 타당성 검토에 들어간 지 두 달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워낙 보안이 철저한 탓인지 아직까지 그 어떠한 정보도 얻지 못하고 있었다.
타당성 검토가 긍정적인지, 아니면 부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가는지조차 여전히 오리무중인 상태.
그런데 정명훈 사장이 철도 건설 공사 프로젝트에 대한 향후 일정을 알려 주는 것이 아닌가.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저희가 탄자니아, 우간다, 케냐 측에 정보를 제공하지 않은 이유는 중국 측의 감시가 워낙 심해서였으니까, 오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정 사장님, 제가 말을 꺼낸 의도를 알고 계셨습니까?”
“네. 어젯밤에 마사카 부통령님께도 똑같은 질문을 받았거든요.”
“하하하, 이거 쑥스러운데요.”
문두야 부통령은 겸연쩍을 웃음을 흘렸다.
“철도 건설 공사 프로젝트 입찰은 우리나라에서 진행할 생각인데, 그때 시간을 내주실 수 있습니까?”
“그럼요. 만사 제쳐 놓고 달려가겠습니다.”
드르륵―
두 사람의 대화가 일단락되어 갈 무렵,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문두야 부통령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핸드폰을 들어 발신자를 확인하자마자 그는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 사이를 참지 못하고 천 부회장이 전화를 걸어왔네요.”
이 말과 함께 천쥐펑 부회장과의 통화를 시작했다.
헤드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철도 건설 공사 프로젝트와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그의 통화에 귀를 기울였다.
이윽고 그가 통화를 끝내자, 루군다 우간다 대통령이 잔뜩 호기심을 품고 말을 건넸다.
“문두야 부통령님, 천 부회장이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나라를 비롯한 우간다와 케냐에 추가로 기부할 의사를 가지고 있답니다.”
“그자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나 봅니다.”
“하하하.”
루군다 대통령의 싸늘한 반응에 모두들 참고 있던 웃음을 터트렸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