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6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 (2)
“이제부터 우간다와 탄자니아를 연결하는 송유관 건설공사 착공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사회자의 우렁찬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졌다.
그러자 다소 어수선하던 착공식장이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바쁘신 가운데 송유관 건설공사 착공식을 기념해 주기 위해서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신 내외 귀빈들을 소개시켜 드리겠습니다. 먼저 우간다의 요웨리 루군다 대통령…….”
한편, 단상 밑에 설치된 자리에서는 겨울과 호영이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상하네. 최준하가 보이지 않는 이유가 뭘까?”
겨울도 그 점이 이상하긴 했다.
송유관 건설공사 착공식은 대한 그룹에서 준비하는 것으로 결정된 상태.
따라서 우간다를 관할하고 있는 콩고 지점 소속인 최준하도 착공식장에 나타나 행사 진행을 도와줘야 하는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착공식장 어느 곳에서도 그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나도 잘 모르겠다.”
“너한테 열등감을 느껴서 이곳에 오지 않은 건가?”
“에이, 설마.”
“너는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 모르냐?”
그때, 뒤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가쿠타 부장이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부사장님, 제가 오늘 아침에 은센기 사장과 통화했는데, 최준하는 지금 병원에 입원해 있답니다.”
“이번에는 어디가 아프답니까?”
“원인 불명의 두통이라고 하는데, 꾀병일 가능성이 99.9%라고 합니다.”
“왜요?”
“최준하가 콩고 지점에 배치된 이후로 25일 가까이 결근했고, 그때마다 제출한 진단서가 원인 불명의 두통이었답니다. 문제는 그 진단서가 같은 병원의 같은 의사가 발급해 준 거랍니다.”
겨울은 어떤 상황인지 대충 감이 잡혔다.
회사에 무단결근하면 징계 사유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최준하가 의사를 매수해서 허위로 진단서를 발급받은 것이리라.
그놈이 간 큰 행동을 벌일 수 있는 배경에는 최성진 부회장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김 지점장님처럼 노련한 분이 최준하의 꼼수를 모르고 계셨을까요?”
“당연히 알고 계신답니다.”
“그런데 그놈을 지금까지 왜 가만히 내버려 뒀을까요?”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무언가 피치 못한 사정이 있는 것 같습니다.”
윙―
그때, 겨울의 손에 들려 있던 핸드폰에 김종학 지점장이 보내온 문자가 수신되었다.
― 한 부사장님, 정 이사님과 함께 행사장 뒤쪽으로 서둘러 와 주십시오.
핸드폰을 호영에게 보이고 겨울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영과 함께 급하게 행사장 뒤로 이동하니, 그곳에는 김종학 지점장을 비롯한 행사진행 요원들이 모여 있었다.
“김 지점장님, 무슨 일입니까?”
“저희가 예상한 숫자보다 축하객들이 훨씬 많이 참석한 상황입니다.”
즉, 자신들이 준비한 기념 선물이 많이 부족하다는 뜻이었다.
이 문제를 가볍게 생각할 수 없는 것이 행사장에는 우간다를 대표하는 부족들이 대거 참석한 상황이었다.
만약에 기념 선물이 골고루 배분되지 않아 부족 간의 다툼으로 번진다면, 최악의 상황에는 내전으로 빠져드는 빌미를 제공할 수도 있다.
“아이고, 큰일 났네요.”
“부 사장님,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으면 좋겠습니까?”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김 지점장님, 착공식이 몇 시까지 예정되어 있습니까?”
“조금 전에 시작했으니까, 적어도 1시간 30분 정도는 걸릴 겁니다.”
“음… 그 정도면 충분할 것 같네요.”
“좋은 방법이 있습니까?”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사용할 기념 선물이 지금 대한 그룹 전용기에 실려 있습니다.”
그때, 호영이 급하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한 부사장, 콩고민주공화국에서는 어떻게 하려고?”
“아직 이틀이나 남아 있잖아.”
“아, 무슨 말인지 알았다.”
호영과 짧은 대화를 마무리한 겨울은 김종학 지점장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화물트럭 한 대를 급하게 수배해 주세요.”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 * *
“이게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화물차 조수석에 앉아서 호영이 넋두리를 내뱉었다.
겨울은 그의 넋두리를 무시하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 부사장, 자리에서 모습을 감추셨던데, 무슨 일이라도 발생한 겁니까?]
“서 실장님, 긴급한 부탁이 있습니다.”
[빨리 얘기해 보세요.]
긴장했다는 듯 서동호 실장의 목소리가 딱딱하게 굳어졌다.
“대한 그룹 전용기 기장한테 화물칸에 실려 있는 기념 선물들을 모두 하역해 달라고 전화해 주십시오.”
[흐음, 기념 선물이 부족한 모양이군요?]
역시 산전수전 모두 치른 역전의 노장답게 금방 평정심을 찾은 서동호 실장이었다.
“네, 그렇습니다.”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사용할 기념 선물을 사용하면, 나중에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한국에서 빠르게 공수할 예정입니다.”
[뭐, 그러는 수밖에 없겠지만요.]
“아무튼 실장님, 저희는 기념 선물을 인수받으러 공항으로 출발한 상태입니다.”
[어이쿠, 잡담하고 있을 시간이 없네요. 먼저 끊겠습니다.]
뚝.
마음 급한 서동호 실장이 전화를 끊었다.
겨울은 지체하지 않고, 무세베니 실장에게 전화 걸어서 현재 상황을 자세하게 알렸다.
“…저희가 기념 선물을 무사히 인수받을 수 있도록 실장님이 적극 도와주십시오.”
[그 점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뚝.
무세베니 실장도 급하긴 마찬가지.
이윽고 화물차 안에 잠시 보물 같은 휴식이 찾아왔다.
“휴우, 다 끝났네.”
“우리는 왜 이렇게 매번 바쁘게 사는 걸까?”
“글쎄다. 그보다 니가 지금 나하고 한가하게 대화를 나눌 시간이 있나 모르겠다.”
“아차차!”
호영은 재빨리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신호음이 울리자마자 익숙한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정 이사가 웬일이야?]
“부사장님, 급한 용건이 있어서 연락드렸습니다.”
[뭔데?]
임진택 부사장의 목소리에 긴장감이 묻어 있었다.
“송유관 건설 공사, 잉가 3댐 건설 공사 착공식과 관련해서 저희가 준비한 기념 선물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기념 선물을 최대한 많이 준비해서 콩고민주공화국으로 보내주십시오.”
[항공화물로 보내면 시간이 부족할 것 같고… 할 수 없이 화물기를 전세해야겠네?]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혹시 모르니까 다른 종류의 기념 선물들도 준비해서 보내주십시오.”
[기념 선물은 H&E 트레이딩으로 발송하면 되겠지?]
“네, 부사장님.”
[가장 중요한 것 하나만 물어보자고. 기념 선물 구입 비용은 누구한테 청구할 거야?]
호영은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송유관 건설공사 착공식에 사용되는 기념 선물들의 구입 비용은 우간다 정부가, 잉가 3댐과 도로 확포장 공사 착공식에 사용되는 기념 선물들의 구입 비용은 콩고민주공화국이 부담한 상태.
문제는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사용할 기념 선물을 이곳에서 사용할 예정이라는 것에 있었다.
일단 시간이 없으니 저지르고 나서 나중에 해결하기로 했다.
“부사장님, 비용 문제는 제가 나중에 교통 정리해 드릴게요.”
[일단 알았어. 기념 선물 발송 건은 내가 은센기 사장하고 알아서 해결할 테니까, 정 이사는 신경 쓰지 말라고.]
“감사합니다, 부사장님.”
* * *
같은 시각.
송훈석 회장은 서동호 실장과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서 실장, 지금 어떤 상황이야?”
“착공식에 축하객들이 너무 많이 몰려와서…….”
서동호 실장은 겨울과 통화한 내용을 간략하게 보고했다.
“SH무역 측에 우리 회사 화물기를 제공해 주겠다고 연락해 줘. 그리고 기념 선물 구입 비용도 우리 회사가 부담하라고 전해.”
“그렇게 하겠습니다.”
짧게 대답한 서동호 실장은 핸드폰을 들고 자리를 이탈했다.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뿌요네 회장이 송훈석 회장에게 말을 걸어왔다.
“송 회장님, 돌발 상황이라도 발생한 겁니까?”
“축하객들이 많이 몰려온 것도 돌발 상황이라면 돌발 상황이겠죠.”
“저도 지금까지 착공식에 셀 수 없이 많이 참석해 봤지만, 이렇게 많이 축하객들이 참석한 경우는 거의 처음인 것 같습니다.”
“그만큼 우간다 정국이 안정됐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하긴… 송 회장님의 말씀이 맞는 것 같네요.”
“그나저나 회장님의 안색이 좋지 않아 보이는데, 걱정거리라도 있는 겁니까?”
송훈석 회장의 말대로 커다란 걱정거리를 안고 있는 뿌요네 회장이었다.
토탈은 아프리카 최대 산유국인 앙골라에 여러 개의 유전을 보유하고 있다.
이들 유전들에서 생산하고 있는 석유들 대부분은 유럽으로 수출하고 있었으나, 최근에 커다란 문제가 발생해 버렸다.
하루에 30만 배럴 가까이 석유를 수입하고 있던 그리스의 석유 회사가 갑작스럽게 파산해 버린 것이다.
급하게 다른 바이어를 물색하고 있지만, 여전히 상황이 녹록치 않은 상황.
“하아…….”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뱉은 뿌요네 회장은 송훈석 회장에게 자신들이 처해 있는 상황을 자세하게 털어놓았다.
“뿌요네 회장님, 제가 석유를 수입해 줄 수 있는 바이어를 알고 있습니다만, 지금 말씀드리기에는 상황이 여의치가 않네요.”
“언제가 좋을까요?”
“오늘 오후에 제 숙소로 찾아오십시오.”
“알겠습니다.”
* * *
윙윙―
겨울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공항으로 이동하던 중에 호영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발신자를 확인하자마자 호영은 재빨리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임 부사장님.”
[정 이사, 방금 전에 서동호 실장님과 통화한 내용을 알려 줄 테니까, 참고하고 있어.]
“네, 말씀하십시오.”
[기념 선물 구입 비용은 대한 그룹 측에서 부담하기로 했고, 화물기도 대한 그룹에서 제공하기로 했어.]
“와아, 천만다행이네요.”
[기념 선물은 지금부터 수배하기 시작해서 내일 아침에 출발시킬 예정이야.]
“그러면 아무리 늦어도 내일 밤에는 콩고민주공화국에 도착할 수 있겠네요?”
[아마 그렇겠지.]
“끝까지 수고 부탁드립니다.”
[하하, 알았어. 나중에 통화하자고.]
딸깍.
호영이 전화를 끊자, 겨울이 재빨리 질문을 던져 왔다.
“지금 어떤 상황이야?”
“기념 선물 구입 비용과 운송까지 대한 그룹에서 책임져 준단다.”
“대한 그룹에서 너무 많은 비용을 부담하는 게 아닐까?”
“그러게 말이다.”
윙윙―
그때, 겨울의 핸드폰이 진동했고, 발신자는 은센기 사장이었다.
“네, 은센기 사장님.”
[조금 전에 임진택 부사장님께 전화 받았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상황입니까?]
“잉가 3댐과 도로 확포장 공사 착공식에 참석할 하객들한테 나눠 줄 선물이 부족해서 SH무역 측에 추가로 주문한 상황입니다.”
[착공식이 모레인데, 납기를 맞출 수 있을까요?]
은센기 사장이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대한 그룹에서 화물기를 제공해 주기로 했습니다.”
[한 부사장님, 기념 선물의 양이 얼마나 될까요?]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40피트 컨테이너 한 개 분량 정도 될 겁니다.”
[그럼 화물기의 화물칸이 텅텅 비어서 우리나라로 오겠네요?]
“그렇기는 할 것 같습니다만…….”
무언가 있다고 판단한 겨울은 의도적으로 끝말을 흐렸다.
[사실은 저한테 고민이 하나 있습니다.]
“어떤 고민인지 얘기해 보세요.”
[얼마 전에 저희 회사가 카반구 장관의 동생이 운영하고 있는 CONA 유통으로부터 최고급 65인치 TV 3,000대와 최신형 핸드폰 2만 대를 주문받은 상황입니다. 내일 부사장님이 우리나라에 오시면 이 문제에 대해서 상의할 예정이었습니다.]
“저한테 어떤 문제를 상의한다는 겁니까?”
“저희가 대한전자로부터 직접 수입할 것인지, 아니면 대한 그룹 콩고 지점에 넘겨줄 것인지에 대한 문제입니다.”
겨울은 은센기 사장의 고민을 충분히 이해했다.
H&E 트레이딩의 입장에서는 대한전자로부터 수입하는 것이 후자보다 훨씬 이익이 많다.
하지만 H&E 트레이딩은 대한 그룹 아프리카 법인과 전략적인 동반자인 관계에 놓여 있는 상황.
대한 그룹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후자를 선택하는 것이 맞다.
“은센기 사장님, 주문받은 건을 콩고 지점에 넘겨주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쉽기는 하지만, 한 부사장님의 의견에 따르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시간이 별로 없으니까, 제가 김 지점장님께 연락해서 조치를 취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전화를 끊은 겨울은 호영에게 은센기 사장과의 통화 내용을 설명해 주었다.
“한 부사장, 화물기를 사용하는 비용보다 이익이 많이 남겠지?”
“그렇지 않을까 싶다.”
“휴우, 이제야 마음이 좀 놓이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