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6화] 생각지 못한 선물 (2)
모스크바 시내에서 ‘코리아’이라는 한국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는 김용일 사장은 어젯밤에 H&J 컨설팅의 한겨울 부사장이라는 사람에게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그는 오늘 저녁때 러시아와 인도의 VIP들과 함께 자신의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할 예정이라고 하면서, 두 가지 전제조건을 제시해 왔다.
하루 매상의 두 배 이상을 팔아 주겠으니 다른 손님을 받지 말아 달라는 것과 그들이 마실 술을 직접 가지고 오겠다는 것.
나쁘지 않은 전제조건이었기 때문에 즉시 동의해 주었고, 지금 겨울과 호영을 만나서 자세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정 이사님, 저희 음식점이 아무리 장사가 잘돼도 하루에 5,000달러 이상 매상을 올리는 날이 손가락에 꼽을 정도입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럼 왜…….”
목적한 바가 있다는 듯 김용일 사장이 의도적으로 끝말을 흐렸다.
“제가 선불로 드리는 10만 달러에는 음식값뿐만 아니라 VIP들이 사장님과 종업원들에게 지급하는 팁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가 이곳에서 한국 음식점을 20년 가까이 운영해 오고 있지만, 그렇게 팁을 많이 주는 손님을 만나 본 적이 없었습니다.”
“사장님께서 VIP들을 직접 만나 보시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VIP들이 누구인지 알려 주실 수 있습니까?”
“지금은 말씀드릴 수 없고, 오늘 저녁때 직접 확인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상대방이 얘기하기 싫어하는데, 꼬치꼬치 물어보는 것은 실레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나저나 저기 쌓여 있는 상자들은 뭡니까?”
“사장님, 제가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호영이보다 겨울의 입이 먼저 열렸다.
“네, 물론입니다.”
“오늘 밤에 VIP들과 마실 안동소주입니다.”
“도대체 손님들이 몇 분이기에 저렇게 많은 안동소주를 마신다는 겁니까?”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이지만, 저희가 마시다 남은 술들은 사장님께 무상으로 넘겨드리겠습니다.”
“네?! 저렇게 비싼 술을요?”
김용일 사장이 믿지 못하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우리나라에서 한 병당 3만 5,000원밖에 안하는 술이 뭐가 비싸다는 말씀입니까?”
“우리나라에서나 그렇지, 이곳 러시아 식당에서는 10만 원을 넘게 받는 고가의 술입니다.”
“어쨌거나 저희는 안동소주 200병을 구입하는 데 700만 원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운송비와 관세는 계산하지 않습니까?”
“안동소주 200병은 러시아 국적의 여객기가 무상으로 운송해 주었고, 세관에서도 무관세로 통관시켜 주었습니다.”
“네? 한 부사장님의 말씀을 믿을 수가 없군요.”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그때, 검은색 정장에 까만 선글라스를 낀 남자들 십여 명이 우르르 식당 문을 열고 들어오는 바람에 겨울의 설명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일행 중에 제일 나이가 많아 보이는 사람이 겨울 일행이 앉아 있는 곳으로 다가와 정중한 자세로 인사한 후, 입을 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한겨울 부사장님, 정호영 이사님. 저는 자고에프 대통령의 경호를 책임지고 있는 이안 체흐니프라고 합니다.”
겨울과 호영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들에게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체흐니프 실장님.”
“제가 경호원들을 이끌고 이곳을 찾아온 이유는 자고에프 대통령님이 저녁 식사에 참석하시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아, 그러셨군요.”
반면에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김용일 사장은 놀라서 두 눈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로 최고 권력자를 지근거리에서 모시는 사람들의 파워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다.
특히 러시아의 경우에는 자고에프 대통령이 독재자나 다름없기 때문에 체흐니프 실장의 권세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다고 소문나 있는 상태.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겨울과 호영에게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으니, 놀라지 않는 것이 오히려 비정상일 것이다.
‘도대체 두 젊은이의 정체가 뭘까?’
김용일 사장은 속으로 잔뜩 의문을 품으며 두 사람의 대화에 집중했다.
“이제부터 이곳은 저희 경호실에서 내외부의 경비를 책임질 예정입니다.”
“저녁 시간까지는 시간이 제법 남아 있는데, 너무 빨리 오신 것 아닙니까?”
“대통령님께서 먹고 마실 음식들을 사전에 점검하는 임무도 저희가 수행해야 하기 때문에 오히려 시간이 부족한 감이 있습니다.”
“아, 미처 그런 점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한 부사장님, 식당 입구에 가득 쌓여 있는 상자들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오늘 밤에 자고에프 대통령님을 비롯한 손님들과 같이 마시기 위해서 대한민국에서 특별히 공수한 안동소주입니다.”
“아, 그렇군요.”
무언가 탐탁지 않다는 듯 체흐니프 실장이 살짝 양미간을 찡그렸다.
자신들이 모르고 있는 무언가 있다고 판단한 호영은 급히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체흐니프 실장님, 기분이 언짢은 듯해 보이는데, 제가 이유를 알 수 있습니까?”
“사실은 자고에프 대통령님이 2년 전에 한국산 소주를 마셔 본 적이 있었는데, 물 마시는 것 같다고 하시면서 짜증을 심하게 부리셨습니다.”
“자고에프 대통령님께서 이전에 마신 소주는 알코올 도수 20도 미만의 순한 소주였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하지만 자고에프 대통령님께서 오늘밤에 마실 안동소주는 일반적인 보드카보다 알코올 도수가 놓은 45도로 상당히 독한 술입니다.”
“오오, 그렇습니까?”
짜증 가득하던 체흐니프 실장의 표정이 정상으로 돌아오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순간, 호영은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입을 열었다.
“제흐니프 실장님, 이번 기회에 안동소주를 시음해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하하, 그럴까요?”
‘제흐니프 실장도 어지간히 술을 좋아하는 모양이구먼.’
속으로 한마디 내뱉은 호영은 김용일 사장에게 시선을 옮기며 말을 걸었다.
“김 사장님, 지금 간단하게 술안주를 부탁드립니다.”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테이블에 술상이 순식간에 차려졌다.
호영은 씨익 웃으며 체흐니프 실장에게 말을 걸었다.
“실장님, 한국에서는 종종 소주잔보다 맥주잔을 이용할 때가 있습니다. 지금도 맥주잔이 필요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역시 정 이사님은 술을 마실 줄 아시는군요.”
호영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김용일 사장이 맥주잔 세 개를 가지고 왔다.
“실장님, 맥주잔에 가득 채워서 깔끔하게 원샷 어떻습니까?”
“하하하, 제가 원하던 바였습니다.”
맥주잔에 안동소주를 가득 채운 호영은 잔을 위로 치켜들며 말을 이어 나갔다.
“러시아와 대한민국의 영원한 발전을 위하여 건배!”
“건배!”
“크아! 빈속에 마시니까, 속이 짜르르 한데요.”
안동소주를 단숨에 비워 버린 체흐니프 실장은 맥주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실장님, 이 정도의 술맛과 알코올 도수이면 자고에프 대통령님도 만족하시겠죠?”
“비록 한 잔밖에 마셔보지 못했지만, 자고에프 대통령님도 충분히 만족하실 것 같네요.”
그 순간, 호영은 체흐니프 실장의 대답에서 아쉬움이라는 단어를 읽었다.
“실장님, 우리나라에는 술 마시기 시작하면, 연거푸 석 잔을 마시는 풍습이 있습니다. 두 잔 더 마실까요?”
“커흠, 조금 무리가 따르기는 하지만, 한국식 풍습을 따라 보겠습니다.”
“하하하, 좋습니다.”
* * *
“개떡 같은 인간아, 우리나라에 그런 풍습이 어디 있어?”
체흐니프 실장과 짧고 굵은 술자리를 끝내고 호텔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겨울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왜 없어? 후래자 삼배라는 풍습은 들어보지 못했냐?”
“그것은 늦게 도착한 사람한테 술을 권유하는 풍습이잖아.”
“어쨌거나 술을 석 잔 마시는 풍습은 있긴 있잖아.”
“우리가 5분 동안에 그 독한 술을 얼마나 많이 마셨는지 알아?”
“고작 소주 두 병도 마시지 않았는데, 엄살떨기는.”
“안주도 먹을 새 없이 강술을 마셨잖아. TTM에 참석해야 하는데.”
“중요한 약속이 있다고 하면서 뒤로 뺐어도 되잖아.”
“분위기가 그런데 어떻게 뒤로 빼.”
“네가 원해서 마신 걸 나한테 책임지라고 하면 어떡해?”
잘못한 것이 전혀 없다는 듯 호영은 한 발자국도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그나저나 갑자기 발동을 건 이유가 뭐야?”
“술을 더 마시고 싶어 하는 체흐니프 실장의 표정을 읽었는데, 어떻게 모른 척을 하냐?”
“어휴, 하여간 알았으니까, 호텔에 도착하면 깨워라.”
수세에 몰린 겨울은 의자를 뒤로 젖히고 잠에 들었다.
* * *
포시즌즈 호텔의 비즈니스 룸.
정명훈 사장은 얼굴이 붉게 달아 있는 겨울에게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웬 술을 이렇게 많이 마셨어?”
“식당에 안동소주를 배달하러 갔다가 자고에프 대통령님의 경호를 책임지고 있는 체흐니프 실장과 마셨습니다.”
“경호실장이 술을 마신다고?”
“경호원들의 임무 중에는 VIP가 먹고 마시는 음식을 사전에 점검할 의무가 있답니다.”
“살짝 맛만 보면 되잖아.”
“정 이사가 발동을 걸어 대는 바람에…….”
겨울은 식당에서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체흐니프 실장이 그렇게 술을 좋아해?”
“네. 만약에 TTM이 아니었으면, 저는 체흐니프 실장한테 붙잡혀서 전사했을 겁니다.”
그때, 건너편 자리에 앉아 있던 블로딘 총리가 갑자기 대화에 끼어들었다.
“한 사장님이 방금 전에 언급한 체흐니프라는 사람이 자고에프 대통령님의 경호실장이 맞습니까?”
“총리님 말씀이 맞습니다.”
“체흐니프 실장을 어디서 만났습니까?”
“오늘 저녁 식사가 예정된 한국 음식점에서 만났습니다.”
“그곳에서 체흐니프 실장과 술을 마신 겁니까?”
“네. 어떻게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됐습니다.”
블로딘 총리는 체흐니프 실장을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는 술을 광적으로 좋아하는 편이지만, 중요한 임무를 앞두고는 절대로 술을 많이 마시지 않는다.
그리고 술에 대한 조예가 깊은 편이라서 시시한 술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런 그가 취할 정도로 술을 많이 마셨다는 의미는 오늘 밤에 자신들이 마실 술이 제법 퀄리티가 높다는 뜻이다.
애주가의 한 사람으로서 호기심이 몰려왔다.
“한 부사장님, 오늘밤에 우리들이 마실 술이 소주가 아닌가요?”
“소주의 한 종류이기는 하지만, 알코올 도수가 보드카보다 높은 대한민국의 대표 토속주입니다.”
“그렇다면 TTM을 빨리 끝내야 하겠는데요?”
때마침 TTM에 참석하기 위해서 자오린 부총리를 비롯해서 바이어 측의 사람들이 비즈니스 룸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자오린 부총리는 지정된 좌석에 앉으며 블로딘 총리에게 가볍게 농담을 건넸다.
“TTM을 빨리 끝내야 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오늘 저녁때 H&J 컨설팅 측에서 저희한테 맛있는 한국 음식을 대접해 준다고 해서요.”
“정말 좋으시겠습니다.”
“자 부총리님도 한국 음식을 접해 보셨습니까?”
“그럼요. 지금까지 열 번 넘게 먹어봤습니다.”
“지금까지 제일 인상에 남는 음식은 뭐였습니까?”
“저는 숯불에 구워먹는 소고기가 제일 맛있었습니다. 적당히 익은 소고기 한 점에 소주 한 잔을 곁들이면… 캬아, 생각만 해도 입에 침이 고이는군요.”
“자 부총리님, 내일 최대한 빨리 TTM을 마무리 짓고 한국 음식점에서 거하게 한잔 어떻습니까?”
“하하, 좋습니다. 내일은 저희가 사겠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겨울이 작은 목소리로 하도진 실장에게 말을 걸었다.
“하 실장님, 정상호 사장님께 부탁해서 안동소주 200병을 한 번 더 보내 달라고 하세요.”
“부사장님, 저희가 아무리 술을 잘 마셔도 오늘밤에 안동소주 200병을 모두 마실 수는 없습니다.”
겨울도 처음에는 하도진 실장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식당에서 체흐니프 실장이 술 마시는 모습과 그가 언급한 내용을 종합해 본 결과, 생각을 바꿔 먹었다.
그는 안동소주가 입안에 착착 감긴다면서 최소한 다섯 병은 거뜬히 마실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만약에 오늘밤에 오는 손님들이 50명 정도이고 얼추 일인당 네 병을 마신다면, 어쩌면 200병도 부족할 수 있다.
“만약을 대비해서 준비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싶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짧게 대답하고 하도진 실장이 비즈니스 룸의 문을 열고 나갔다.
시계를 쳐다보고 있던 김윤중 전무가 드디어 말문을 틔웠다.
“이제부터 3일차 TTM을 재개하도록 하겠습니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