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화] 의외로 빨리 끝난 협상 (1)
다음 날 아침.
정명훈 사장의 숙소에서는 요키치 장관과의 미팅을 앞두고 최종 점검회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신 실장, 샤르마 장관한테 자료를 건네받았나?”
신지훈 실장은 오늘새벽까지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자신들은 샤르마 장관한테 인도가 러시아로부터 최대로 수입할 수 있는 석유와 천연가스의 물량을 어제 저녁까지 알려 달라고 부탁했다.
약속 시간보다 조금 늦었지만, 저녁 8시 무렵에 상공부의 담당자로부터 물량을 통보받았다.
그런데 밤 11시 무렵, 그로부터 또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그들이 보내 준 물량에 착오가 생겨서 다시 보내 준다는 이유를 들었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새벽 1시, 그리고 5시에도 전화를 걸어와서 물량을 다시 통보했다.
문제는 그가 보내온 메일이 마지막이 아닐 것 같다는 데에 있었다.
“하아…….”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뱉은 신지훈 실장은 지금까지의 일들을 상세하게 보고했다.
“…담당자가 아직 한곳에서 필요한 물량을 통보받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정명훈 사장은 상공부의 담당자가 그럴 수밖에 없던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인도는 느슨한 형태의 연방제 국가로 중앙정부 밑에 스물여덟 개의 주와 여덟 개의 연방직할시를 두었다.
문제는 지방 정부들이 중앙정부와 마찬가지로 입법권과 행정권을 보유하고 있어서, 중앙정부의 지시를 죽어라고 듣지 않는다는 점이다.
게다가 성격까지 느려서 납기 안에 자료를 받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웠다.
그런 그들에게 납기를 불과 몇 시간밖에 주지 않았으니, 이런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그들이 말을 듣도록 만드는 방법은 극약처방 하나밖에 없었다.
“신 실장, 상공부 담당자가 어느 지역이라고 얘기하지 않았나?”
“타밀나두주라고 했습니다.”
“알았어.”
이 말과 함께 정명훈 사장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몇 번 울리기도 전에 귀에 익은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네, 정 사장님.]
“샤르마 장관님, 러시아 측과의 미팅 시간을 연기했으면 좋겠습니다.”
[네? 갑자기 무슨 소리입니까?]
“저희가 어제 저녁까지 러시아로부터 수입할 수 있는 석유와 천연가스의 물량을…….”
정명훈 사장은 신지훈 실장에게 보고받은 내용을 가감 없이 전달했다.
[내가 이놈의 자식들을…….]
예상한 대로 샤르마 장관의 입에서 거친 육두문자가 나왔다.
“장관님, 고정하십시오.”
[정 사장님, 30분 안에 최종 물량을 받을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 드리겠습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저희는 장관님 말씀만 믿고 있겠습니다.”
뚝.
마음 급한 샤르마 장관이 전화를 먼저 끊었다.
정명훈 사장은 핸드폰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신지훈 실장에게 말을 걸었다.
“상공부에서 30분 안으로 메일을 보내올 거야.”
“사장님, 타밀나두주에서 지금까지 물량을 통보하지 않았는데, 과연 30분 안에 보내올 수 있을까요?”
“인도는 준연방제 국가이지만, 재정자립도가 많이 떨어지는 편이야. 샤르마 장관이 타밀나두주를 어떻게 대할지 대충 감이 잡히지?”
즉, 중앙정부의 지원을 끊어 버리겠다는 엄포를 날린다는 뜻이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지금까지 취합한 물량은 얼마나 되나?”
“석유는 3,500만 배럴, 천연가스는 8,000만 입방미터입니다.”
“기존에 러시아에서 수입하고 있던 물량은 제외한 거겠지?”
“네, 그렇습니다.”
“인도가 과연 그렇게 많은 물량을 소화할 수 있을까?”
“가능하니까, 보내온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잠시 대화가 중단된 틈을 타서 겨울이 발언권을 요청했다.
“사장님, 어젯밤에 샤르마 장관님과 통화했는데, 세르게이 국방부 장관이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다며 인도에 오지 않았답니다.”
“급한 일이 무엇인지 물어봤어?”
“체첸반군이 테러를 일으켰다고 하는데, 인도 정보국이 확인해 본 결과 거짓말이라고 밝혀졌답니다.”
“그가 거짓말까지 하면서 인도에 오지 않은 이유가 뭘까?”
“제 생각은…….”
겨울의 생각을 듣고 있던 정명훈 사장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 판단했다.
인도가 러시아로부터 석유와 천연가스 수입을 중단하면, 무기류의 수입도 당연히 줄어들 수밖에 없을 것이니까.
이곳에 와서 망신을 당하느니, 러시아에서 대기하고 있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다.
“한 부사장, 세르게이 국방장관을 이곳으로 부를 수 있는 아이디어는 가지고 있겠지?”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저희가 가만히 있어도 요키치 장관이 알아서 부를 테니까요.”
“하긴… 그렇겠군.”
겨울과 짧은 대화를 마무리 한 정명훈 사장은 신지훈 실장에게 또다시 말을 걸었다.
“우리와 같이 온 손님들은 뭐하고 계시나?”
“대한 그룹에서 오신 분들은 공장에 가셨고, 다른 분들은 호텔에서 기다리는 게 무료하다며 타지마할을 구경하러 아침 일찍 출발했습니다.”
“그분들이 우리들보다 백번 나은 것 같군.”
“그렇기는 하지만, 저희보다 심정은 훨씬 초조할 겁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드르륵―
그때,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정명훈 사장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누구한테 걸려온 전화인지 알고 있다는 듯 지체 없이 상대방과 통화를 시작했고,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고는 전화를 끊었다.
“방금 전에 샤르마 장관한테 전화가 걸려왔는데, 신 실장한테 메일을 발송했다더군.”
“네, 알겠습니다.”
자료를 출력하기 위해서 신지훈 실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우리는 10분 후에 출발하는 것으로 합시다.”
“사장님, 두 시간이나 남았는데, 너무 일찍 출발하는 거 아닙니까?”
정명훈 사장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도진 실장이 질문을 던져 왔다.
“뉴델리의 교통체증은 서울보다 몇 배 심하다고 생각하면 될 거야.”
“인도 경찰이 경찰차를 보내 준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조금 더 빨리 갈 수 있지 않을까요?”
“이 나라 운전자들은 우리나라처럼 시민의식이 발전하지 않았어. 그리고 경찰차가 사이렌을 울려도 피할 곳이 마땅치 않은 점도 있어.”
“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거리는 온갖 종류의 탈것들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한참을 가다 서다를 반복한 끝에 저 멀리 영빈관이 보이자, 핸드폰의 시계를 쳐다보고 있던 하도진 실장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두 시간이면 서울에서 대전을 가고 남을 시간인데, 고작 15킬로미터를 오다니… 사장님이 아니었으면, 큰 낭패를 볼 뻔했습니다.”
“그래서 경험이 무섭다는 거야. 한 부사장, 우리가 수립한 작전이 먹혀들까?”
겨울은 협상을 빨리 진행하기 위한 방법을 궁리한 끝에 부족하지만 기발한 아이디어를 하나 생각해 냈다.
일행들과 30분 정도 토론을 통해서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고, 샤르마 장관에게 작전 계획을 전화로 설명해 준 상태였다.
“요키치 장관이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먹혀들 겁니다.”
“제발 그랬으면 좋겠군. 그나저나 조금 전에 정 이사와 무슨 내용으로 통화했어?”
“타지마할 관광은 포기한다고요. 너무 차가 막히는 바람에 호텔로 돌아간다고 했습니다.”
“내가 타지마할을 힘들이지 않고 구경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줄까?”
“그런 방법이 있습니까?”
“남들이 자는 한밤중에 출발하면 돼.”
“아이고…….”
* * *
그 시각.
겨울의 지령을 받은 샤르마 장관은 영빈관에 먼저 도착해서 요키치 장관과 분위기 조성을 위한 대화에 힘쓰고 있었다.
“제가 어제 말씀드렸다시피 우리 인도 정부는 협상에 대한 모든 권한은 H&J 컨설팅 측에 위임한 상태입니다. 저하고 데사이 국장은 옵저버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인도 정부는 H&J 컨설팅과 우리나라의 합의에 이의 없이 따른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인도 정부가 H&J 컨설팅을 철석같이 믿고 있는 이유를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우리나라가 아프리카 국가들로부터 자원들을 저렴한 가격으로 도입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수행해 준 회사가 바로 H&J 컨설팅이기 때문입니다.”
순간, 베르첸카 보좌관은 샤르마 장관의 말에서 중요한 힌트를 하나 얻었다.
재빨리 생각을 구체화하고 러시아어를 사용해서 요키치 장관에게 말을 걸었다.
“장관님, H&J 컨설팅과의 협상을 손쉽게 풀어 갈 수 있는 해법을 찾았습니다.”
“그게 뭔지 얘기해 봐.”
“저희가 인도 정부에 석유와 천연가스의 수출가격을 인하해 주면 될 것 같습니다.”
윙―
그때, 샤르마 장관의 손에 들려 있던 핸드폰이 짧게 진동했다.
상황실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정보국 요원이 보내온 문자였다.
곁눈질로 문자 내용을 확인한 샤르마 장관은 힌디어를 사용해서 데사이 국장한테 조용히 속삭였다.
“우리들의 작전이 먹혀들었답니다.”
“정말 다행이네요.”
“의외로 협상이 빨리 끝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할 것 같아요.”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겨울 일행이 영빈관에 도착했다.
간단하게 상견례를 끝내고 회의실로 이동한 사람들은 이런저런 대화를 주고받으며, 협상분위기를 고조시켜 나갔다.
“요즘 대한민국과 러시아의 사이는 어느 때보다 좋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희는 러시아와의 관계를 생각해서 협상을 최대한 빨리 마무리 지을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희의 의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희도 같은 생각입니다.”
“그럼 점심시간까지 협상을 마무리 지어 볼까요?”
“네?! 그렇게 빨리요?”
요키치 장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정명훈 사장은 입가에 미소를 띠우고 말을 이어갔다.
“러시아는 석유와 천연가스를 인도에 중단 없이 수출하고 싶어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제 말이 맞습니까?”
“험험,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인도는 러시아에서 수입하던 석유와 천연가스보다 많은 물량을 나이지리아로부터 수입하기로 결정한 상태입니다. 만약에 러시아 측이 나이지리아 측보다 낮은 수출가를 제시한다면, 수입을 중단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나이지리아로부터 수입을 중단하겠다는 말씀인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과연 우리나라와 나이지리아가 수출하는 물량을 인도 정부가 모두 소화할 수 있을까요?”
“요키치 장관님, 우리나라가 러시아로부터 수입하는 석유와 천연가스의 물량은 전체 물량의 10%도 안 됩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샤르마 장관은 즉시 불쾌하다는 반응을 내보였다.
반면, 요키치 장관의 머릿속은 큰일 났다는 생각이 가득 들어찼다.
자신들이 갑이 아니라 을의 입장이라는 사실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있었음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석유와 천연가스의 수출 중단 사태를 막기 위해서라도 사과하는 것이 맞았다.
“샤르마 장관님,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이번이 처음이니까, 더 이상 문제 삼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정 사장님과 대화를 나누십시오.”
요키치 장관의 기선을 확실하게 제압한 샤르마 장관은 속이 시원하다는 듯 씨익 웃고는 2선으로 물러났다.
그에게 의미심장한 신호를 보내 준 정명훈 사장이 입을 열었다.
“요키치 장관님, 저희의 제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희에게 생각할 시간을 잠깐만 주실 수 있습니까?”
“저희가 자리를 비켜 드릴까요?”
“아닙니다. 저희가 러시아어로 대화를 나누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정명훈 사장과 대화를 마무리한 요키치 장관은 옆자리에 앉아 있는 베르첸카 보좌관에게 러시아어로 말을 걸었다.
“나이지리아가 인도에 두 품목의 가격을 얼마에 수출하기로 했는지 알고 있나?”
“국제가격 대비 5% 할인한 가격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5.5% 할인한 가격으로 수출하면 되겠군.”
“장관님,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자네 생각을 얘기해 봐.”
“저희는 인도에 무기류를 수출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이번 기회에 통 크게 인심을 쓰는 게 어떨까요?”
“충분히 일리 있는 얘기군. 어느 정도 할인해 주는 것이 좋을까?”
“최소 6% 이상 할인해 줘야 할 것 같습니다.”
“알았어.”
베르첸카 보좌관과 짧은 대화를 끝낸 요키치 장관은 정명훈 사장에게 생각을 밝혔다.
“우리 러시아는 두 품목을 국제유가 대비 7% 할인해서 인도에 수출하겠습니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