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화] 쓰레기보다 못한 놈
추성민 법인장은 난감했다.
스스로를 송훈석 회장의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때문에 이 기회를 빌어서 반대 진영에 서 있는 최성진 부회장의 외아들인 최준하를 깎아내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최준하는 입사 1년차인 신입사원에 불과한 존재.
때문에 법인장의 위치에 있는 자기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송훈석 회장에게 미주알고주알 보고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짧게 생각을 정리한 그는 송훈석 회장의 질문에 대답했다.
“최준하 씨는 저희 법인으로 전배되어 오자마자 콩고 지점으로 발령 냈기 때문에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송훈석 회장은 추성민 법인장의 생각을 단숨에 읽었다.
그는 복잡한 사내정치에 얽히지 않겠다는 뜻을 간접적으로 밝히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회장이라는 직위를 이용하면 최준하와 관련된 소식을 들을 수 있겠지만, 굳이 이런 자리에서 무리수를 둘 필요는 없었다.
집에서 새는 바가지는 들에 가도 새는 법이다.
최준하가 그곳에서 성실하게 일하고 있으리라고는 애초부터 기대하지도 않았다.
“알았어. 최준하 얘기는 그만하자고.”
그때, 돌발 상황이 발생했다.
가쿠타 부장의 통역을 통해서 두 사람의 대화를 전해들은 은센기 사장이 불쑥 발언권을 요청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영어를 사용해서.
“송 회장님, 제가 최준하 씨가 어떻게 지내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음? 은센기 사장이 어떻게요?”
송훈석 회장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저희 H&E 트레이딩의 본사는 콩고 지점이 위치한 킨샤사에 있습니다. 대한 그룹과 공동으로 수행해야 할 업무가 많기 때문에 콩고 지점을 자주 방문하는 편입니다.”
“아차, 내가 H&E 트레이딩의 본사 위치를 깜빡하고 있었네요. 최준하는 요즘에 어떻게 지냅니까.”
“콩고 지점에 도착한 다음 날, 곧장 병원에 입원한 상태입니다.”
“왜요? 어디가 아픈가요?”
“저는 지금까지 살면서 감기 기운이 있다며 병원에 입원하는 건 처음 봤습니다.”
결국 엄살이라는 얘기였다.
“아이고… 내가 이놈의 자식을… 후우… 추 법인장, 콩고 지점장한테 전화해서 나를 바꿔줘.”
“네, 회장님.”
짧게 대답한 추성민 법인장은 즉시 김종학 지점장과 송훈석 회장과의 전화를 연결했다.
“김 지점장, 오랜만입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정도로 바쁘게 지내고 있습니다.]
“콩고 지점이 그렇게 바쁩니까?”
[최근에 대한 그룹이 아프리카 법인에서 수주한 여섯 건의 프로젝트 중에서 다섯 건이 저희 콩고 지점과 관련이 있습니다.]
송훈석 회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기가 알고 있기로는 잉가 3댐 건설 공사, 도로 확포장 공사, 송유관 건설 공사 세 건 이었기 때문이었다.
“김 지점장, 나는 세 건밖에 모르겠는데, 두 건은 뭡니까?”
[탄자니아와 우간다의 핸드폰 기지국 업그레이드와 증설공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 내가 깜박했네요.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최성진 부회장의 외아들인 최준하 씨는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
[…저는 추성민 법인장이 정말 원망스럽습니다.]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가뜩이나 바빠 죽겠는데, 최준하 씨까지 신경 써야 하니 정신이 없습니다.]
“최준하 씨는 병원에 입원해 있는 게 아니었나요?”
[그렇기는 합니다만…….]
김종학 지점장이 묘하게 끝말을 흐렸다.
“김 지점장, 내가 책임질 테니까, 속 시원히 얘기해 보세요.”
[최준하 씨의 상태를 매일 아침마다 그의 어머니께 보고하고 있는 중입니다.]
“뭐라고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소리치고는 송훈석 회장이 오른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회장님, 정말 죄송한 부탁입니다만… 최 부회장께 한마디 해 주면 안 되겠습니까?]
“하아… 김 지점장, 그 문제는 내가 알아서 처리해 줄 테니까, 내일부터는 보고하지 마세요.”
[감사합니다, 회장님.]
“최준하 씨의 병명은 뭡니까?”
[급격한 환경변화에 몸이 적응하지 못해서 발생한 오한으로 확인된 상태입니다.]
“감기몸살이 아니고요?”
[네, 그렇습니다.]
“최준하 씨의 지금 상태는 어떻습니까?”
[병원 측에서는 아무 이상 없다고 진즉에 진단 내린 상태입니다.]
“그럼 퇴원시키세요.”
[저도 그러고 싶은데, 본인이 퇴원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김 지점장, 최준하 씨가 병원에 며칠 동안 입원했습니까?”
[휴일을 제외하면 오늘까지 8일입니다.]
“내일 당장 퇴원시키고, 8일 모두 결근 처리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병원비는 어떻게 처리해야 합니까?]
순간, 송훈석 회장은 최준하가 일반 병실이 아닌 특실에 입원해 있는 사실을 간파했다.
“병원비는 본인이 부담하는 것 아닙니까?”
[100만 달러가 넘는 병원비를 최준하 씨가 부담할 여력이 될 것 같지 않습니다.]
“뭐라고요?! 100만 달러요?!”
진심으로 놀란 송훈석 회장이 벼락같이 소리를 내질렀다.
[최준하 씨가 병원에 입원하는 날은 토요일 밤이었고, 최첨단 의료장비들을 동원해서 검사를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이틀 단위로 똑같은 검사를 진행했기 때문에 병원비가 눈덩이처럼 불어난 상황입니다.]
“도대체 특수 검사를 하라고 허락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최준하 씨의 어머니가 병원 측에 특별히 부탁했다고 들었습니다.]
“…알았어요. 병원비 문제도 내가 처리하도록 하죠.”
[감사합니다, 회장님.]
“나중에 통화합시다.”
딸깍.
전화를 끊은 송훈석 회장은 즉시 서동호 실장에게 지시 내렸다.
“서 실장, 최성진 부회장에게 전화해서 나를 바꿔 줘.”
“회장님, 지금 우리나라는 새벽 한 시가 넘은 시간입니다. 내일 오전에 전화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냥 걸어.”
“정히 그렇다면, 숙소에 내려가서 전화하시는 게 어떨까요?”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서 나하고 최 부회장의 관계를 모르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 것 같은가?”
“…알겠습니다.”
서동호 실장은 깊은 한숨을 내뱉고 최성진 부회장에게 전화 걸었다.
신호가 열 번 이상 울린 후, 잔뜩 잠에 취한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서 실장, 우리나라가 몇 시인지 알고 있습니까?]
“저도 전화 드리고 싶지 않았는데, 최준하 씨 때문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하, 설마 내 아들놈이 또 사고를 쳤습니까!]
순간, 서동호 실장은 느낌이 강하게 왔다.
최성진 부회장은 최준하의 상황을 모르고 있다고.
“사고라기보다는… 주위 사람들한테 잔뜩 민폐를 끼치고 있는 중입니다.”
[으득… 어떤 민폐를 끼쳤는지 얘기해 줄 수 있습니까?]
“자세한 진상은 회장님께서 알고 계십니다. 전화 바꿔 드리겠습니다.”
서동호 실장에게 핸드폰을 건네받은 송훈석 회장은 첫마디부터 강펀치를 날렸다.
“최 부회장님은 온도가 맞지 않아서 몸이 으슬으슬 떨리면, 병원에 입원합니까?”
[아니, 회장님…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준하 군이 꾀병을 부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아…….]
“그뿐만이 아닙니다. 준하 군은…….”
송훈석 회장은 김종학 지점장한테 보고받은 내용을 가감 없이 입에 올렸다.
“…안사람이 우리 회사 직원을 하인 부리듯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회장님, 정말 죄송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최준하 씨는 꾀병을 부리고 있기 때문에 출근하지 않은 날들은 결근 처리하라고 콩고 지점장한테 지시 내린 상태입니다. 내 의견에 동의합니까?”
[동의합니다.]
“업무로 인해서 병원에 입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병원비 또한 부담해 줄 수 없습니다.”
[알겠습니다만… 병원비가 도대체 얼마입니까?]
“100만 달러가 넘는답니다.”
[네?!]
최성진 부회장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들려왔다.
“병원비가 왜 그렇게 많이 발생했는지는 안사람한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한국에 돌아가서 봅시다.”
뚝.
송훈석 회장은 어이없는 심기를 드러내기 위해 전화를 거칠게 끊었다.
“후우,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가 이제야 풀리는 것 같군.”
* * *
킨샤사 국립대학 병원의 특실에 입원해 있는 최준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이제 슬슬 퇴원해야 할 것 같은데… 회사에 출근해서 뭐라고 핑계를 대지?”
부우우웅―
그때, 병상에 내려놓아 둔 핸드폰이 요란스럽게 진동해 댔다.
“응? 이 시간에 전화할 사람이 없는데?”
고개를 갸웃거리며 핸드폰을 집어들은 최준하는 화들짝 놀라 재빨리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아, 아버지, 지금 한국은 새벽 아닙니까?”
[내 전화를 피할 줄 알았는데, 그래도 전화는 받네?]
“무슨 말씀입니까? 저는 아버지의 전화를 피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놈아! 내가 네놈 때문에 송 회장한테 얼마나 개망신을 당했는지 알아!]
“…네? 아버지가 왜 개망신을 당합니까?”
[송 회장이 네놈이 꾀병 부리는 것을 모조리 알고 있다는 말이야!]
최준하는 지금과 같은 순간이 일어날 것이라 예상하고, 그에 걸맞은 변명을 진즉에 준비해 놓고 있었다.
“아니, 김종학 콩고 지점장이 아버지와 최 회장을 이간질시키기 허위보고 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이놈아! 내가 똥오줌을 가리지 못하는 세 살짜리 어린애인 줄 알아!]
“아버지, 저는 꾀병을 부리지 않았습니다!”
[킨샤사 국립대학 병원에서 발급한 진단서에 뭐라고 적혀 있는지 내가 읽어 줄까?]
순간, 최준하는 큰일 났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들어찼다.
최성진 부회장이 병원에 연락해서 자신과 관련한 진단서를 받아 볼 거라고는 꿈에서조차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잘못했다며 용서를 비는 방법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도대체 꾀병 부린 이유가 뭐야?]
‘회사에 출근하기 싫어서 그랬습니다’라는 말이 입안에 맴돌았지만, 차마 입 밖으로 끄집어 낼 수 없었다.
결국 짱구를 극한으로 회전시킨 끝에 그럴싸한 변명거리를 생각해 냈다.
“날씨 때문에 컨디션이 좋지 않던 건 사실이었어요.”
[그건 그렇다 치고, 열흘 넘게 병원에 입원해 있는 이유가 뭐야?]
“어머니가 며칠 동안 더 입원해 있으라고 했습니다.”
[내가 이놈의 여편네를… 내일 당장 퇴원해!]
뚝.
꾀병을 부린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나저나 100만 달러가 넘어가는 병원비는 어떻게 마련하지?”
* * *
그 시각.
몰디브의 호텔 바에서는 흥겨운 술자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살라 대통령님과의 저녁 만찬 당시에 싱 총리님이 저희를 여러 번에 걸쳐서 의미심장하게 쳐다봤는데,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 죽겠습니다.”
호영의 말에 송훈석 회장은 씨익 웃었다.
싱 총리가 어떤 이유로 세 사람을 관찰했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가 던진 씨앗 때문에 발생한 일인데 모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진실을 얘기해 줄 수도 없었다.
송지유가 난처한 상황에 놓일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야기를 적당히 비틀어서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정 이사, 내가 이유를 알고 있는데, 얘기해 줄까요?”
“네. 말씀해 주십시오.”
“싱 총리에게 결혼적령기에 놓여 있는 딸이 하나 있답니다.”
“아아, 저는 임자가 있는 몸이라서 안 되겠고… 한 부사장에게 소개시켜 주면 되겠네요.”
겨울이 주먹을 들어 호영을 위협했다.
그러고는 재빨리 대화에 끼어들었다.
“회장님, 저도 임자가 있는 몸이라서 곤란한 상황입니다. 장 부사장이 어떨까요?”
장대산 부사장도 화들짝 놀라기는 마찬가지.
“회장님, 저는 확실하게 임자가 있는 몸입니다. 한 부사장과 정 이사는 아직 싱글인 게 확실하니까, 둘 중 한 명을 선택하십시오.”
“오호라! 그렇다면 내 딸을 차지한 사람이 장 부사장이라는 말이지요?”
“아, 아닙니다. 저는 지유 씨가 아닌 다른 사람을 마음에 두고 있습니다.”
장대산 부사장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극구 부인하고 나섰다.
송지유도 얼굴이 달아오르기는 마찬가지.
뒤늦게 궁금증을 유발하게 만든 자신을 심하게 자책하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적당하게 알코올의 영향을 받은 송훈석 회장은 거침이 없었다.
“오오, 장 부사장의 마음을 빼앗아 간 사람은 누구입니까?”
“죄송하지만 이번만큼은 제 프라이버시를 지키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할 수 없지요. 그런데 장 부사장은 한 부사장과 정 이사가 마음에 두고 있는 아가씨가 누구인지 알고 있어요?”
“네. 확실하게 알고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회장님의 따님을 짝사랑하고 있습니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