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화] 백마 탄 왕자는 누구일까?
“거참, 이상하단 말이야?”
살라 몰디브 대통령과 저녁 만찬을 끝내고 돌아오는 자동차 안에서 호영이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열었다.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저녁 만찬 도중에 싱 총리님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아서 그래.”
“정 이사님도 그랬어요? 나도 그렇게 느꼈는데.”
뒷자리에 앉아 있던 장대산 부사장이 겨울보다 먼저 대화에 끼어들었다.
“저녁 만찬 도중에 싱 총리님과 눈이 마주친 숫자가 열 번이 넘는 것 같아요.”
“한 부사장, 너는 어땠어?”
겨울은 저녁 만찬장에서의 상황을 떠올렸다.
자신들은 싱 총리가 앉아 있던 메인테이블의 대각선에 위치한 테이블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싱 총리와 눈이 마주칠 만한 가까운 자리였기 때문에 그것에 특별함을 부여하는 것은 조금 억지스러운 면이 있었다.
“괜히 의미 부여하지 마. 다 확대해석하는 거야 그거.”
“그냥 아무 의미 없이 눈이 마주쳤다고?”
“하지만 딱히 이유가 없잖아.”
“하 실장님은 싱 총리님과 눈이 몇 번 마주쳤어요?”
“저는 마주친 적이 없었습니다.”
“흐음… 그렇다는 말이죠?”
호영이 생각할 것이 있는지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잠시 대화가 중단된 틈을 타서 겨울이 장대산 부사장한테 질문을 던졌다.
“장 부사장님, 루퍼트 장관님이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은 이유를 알고 있습니까?”
케냐, 모잠비크, 몰디브를 일대일로 프로젝트에서 탈퇴시키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목적을 이룬 루퍼트 국무장관이 이곳에 남아 있을 필요는 없었다.
이미 오늘 오전에 미국으로 돌아간다며 송별식까지 끝낸 상태였다.
그런데 모두의 예상을 깨고 루퍼트 장관이 살라 대통령과의 만찬장에 떡하니 모습을 드러냈다.
장대산 부사장은 저녁 만찬 도중에 그에게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은 이유를 물었고, 그에게서는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자오린 부총리가 중국으로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이랍니다.”
“그가 모종의 수작을 부릴 것 같아서요?”
“그런 점이 없지 않아 있답니다.”
“죽은 제갈량이 산 중달을 쫓은 셈이네요?”
“아니, 그게 그렇게 해석이 되나요?”
장대산 부사장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겨울에게 되물었다.
“어쨌든요. 그나저나 자오린 부총리 일행은 뭐하고 있습니까?”
“살리 대통령님의 개인 별장이 있는 섬에서 한가롭게 휴가를 즐기고 있습니다. 물론 중국 정부 당국에는 반전을 암중모색하고 있는 중이라고 보고한 상태이고요.”
“그들이 진짜로 휴가를 즐기려는 걸까요?”
“저희가 그들의 행동을 은밀하게 감시하고 있는데, 현재까지는 그렇게 보인답니다.”
“장 부사장은 그들의 행동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들이 무언가 일을 벌이려 했다면, 이곳에 남아 있었겠죠. 정말로 휴가를 즐기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일단 알겠습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내내 창밖을 내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호영이 시선을 겨울에게 말을 걸었다.
“한 부사장, 속이 느글느글하지 않냐?”
겨울은 호영의 의도를 단숨에 눈치챘다.
송지유와 술자리를 가지려는 목적으로 밑밥을 깔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큼큼, 나도 기름진 음식을 먹어서 그런지 속이 안 좋네.”
“기름기를 없애기 위해서 호텔 바에서 간단하게 한잔하는 게 어때?”
“뭐, 네가 산다면 같이 마셔 줄 생각은 있지.”
“남자들끼리 마시면 재미없으니까, 송지유 씨도 부르자.”
드디어 호영이 본색을 드러냈다.
“나야 좋지만, 너무 강요하지는 마. 피곤해 보이더라.”
“알았어.”
* * *
같은 시각.
송지유는 송훈석 회장과 같은 차를 타고 호텔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오늘 기분이 무척 좋았단다.”
“왜요?”
“싱 총리가 네 칭찬을 얼마나 하든지. 마치 며느리 삼을 것처럼 관심을 드러내더구나.”
“아빠, 만약 제가 외국인하고 결혼한다고 하면 반대하실 거예요?”
“끄응, 굳이 반대할 생각이 없다만… 할머니께서 반대하지 않을까 싶다.”
“뭐야. 결국 아빠도 싫다는 말이잖아요.”
“…그렇지. 그런데 네 마음에 있는 놈은 도대체 어떤 놈이냐?”
윙윙―
아주 중요한 순간에 송지유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마침 잘됐다고 생각한 그녀는 재빨리 상대방과 통화를 시작했다.
“어머! 제가 보고 싶어서 전화하신 거예요?”
[그렇기는 합니다만… 갑자기 그런 말을 하니까 당황스럽네요.]
“후후, 그래서 우리 오늘 데이트는 어디서 해요?”
[바에서 한잔할 생각입니다만… 지금 모종의 이유 때문에 연기하고 있는 거죠?]
“호호호, 역시 센스 하나는 끝내주게 빠르다니까요.”
[칭찬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당연히 칭찬이죠. 30분 후, 바에서 뵐게요.”
딸깍.
송지유가 전화를 끊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송훈석 회장이 득달같이 질문해 왔다.
“누구 전화야?”
송지유는 씨익 웃기만 할 뿐 상대방이 누구인지 끝끝내 밝히지 않았다.
“후후, 알아맞혀 보세요.”
“…잠깐만 기다려 봐.”
송지유와 대화를 중단한 송훈석 회장은 서동호 실장에게 말을 걸었다.
“이봐, 서 실장. 세 후보 중에서 센스가 빠른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해?”
“한 부사장과 정 이사가 막상막하일 정도로 빠릅니다만… 장 부사장은 진중한 면이 있고요.”
“그럼 이제 후보가 둘로 좁혀졌네?”
“애초부터 장 부사장은 지유와 삼각관계를 형성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조금 전에 지유한테 전화한 사람은 누구일까?”
“한 부사장은 센스가 빠르지만, 실행에 옮기기 전에 경우의 수를 여러 번 생각하는 진중한 면이 있습니다. 이에 반해 정 이사는 일단 일을 저지르고 난 후에 해결하는 스타일이고요.”
“그럼 정 이사가 전화했다는… 뭐야! 정 이사가 지유 짝이라는 거야?”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송훈석 회장이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회장님, 지유는 성격이 그렇게 호들갑스럽지 않습니다.”
“그럼… 지유가 나를 속이기 위해서 연기했다는 거야?”
“네. 그런 것 같습니다.”
“후우, 그런데 서 실장은 지유 짝이 둘 중에 누구일 것 같아?”
서동호 실장은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상대방의 의사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는 척하지 않았다.
“하하하, 저도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 * *
숙소에 도착해서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은 겨울 일행이 바에 올라가니, 그곳에는 먼저 온 손님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추성민 법인장, 이용수 팀장, 은센기 사장, 가쿠타 부장이었다.
어젯밤에 추성민 법인장과 술자리를 갖기로 한 기억을 떠올리며 겨울은 자연스럽게 그들과 합석했다.
“한 부사장, 살라 대통령님과의 저녁 만찬은 어땠어요?”
겨울은 추성민 법인장이 존댓말을 사용하는 게 어색했지만, 굳이 내색하지 않았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없다는 말이 맞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네? 몰디브 정부가 VIP들을 홀대했다니, 정말 의외네요?”
제대로 오해하고 있는 것을 보다 못해서 하도진 실장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법인장님, 지금 한 부사장님이 농담하시는 겁니다.”
“뭐야? 농담이었다고?”
“한 부사장님은 지금 만찬장에 술이 없었다는 점을 언급하신 겁니다.”
“술이 왜… 아차! 몰디브가 이슬람 국가였지?”
“그렇습니다. 그런데 법인장님, 자리를 넓은 곳으로 옮겨야 할 것 같습니다.”
“왜?”
“조금 있다가 회장님의 따님인…….”
하지만 하도진 실장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전혀 생각지 못한 사람들이 바에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에.
화들짝 놀란 추성민 법인장과 이용수 팀장은 마치 이등병마냥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그들을 맞이했다.
덩달아 다른 사람들도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어서 오십시오, 회장님.”
“추 법인장, 나도 합석해도 될까?”
“영광입니다.”
“이곳은 자리가 협소하니까, 넓은 곳으로 옮기자고.”
“그렇지 않아도 그럴 예정이었습니다.”
적당한 자리에 자리한 송훈석 회장은 주문한 칵테일을 한 모금 마시고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추 법인장, 내가 이곳에 온 이유가 궁금하지 않나?”
“궁금합니다.”
사실 송훈석 회장은 겨울과 호영의 의중을 파악해 보려고 송지유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이곳까지 방문한 것이다.
하지만 예상치 않은 사람들 때문에 목구멍까지 올라온 궁금증을 삭일 수밖에 없었다.
“내 딸이 오붓하게 데이트하자고 졸라대는 바람에 이곳에 와 봤지.”
추성민 법인장은 송훈석 회장이 거짓말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만약에 그렇다면 수행원들을 주렁주렁 데리고 오지는 않았을 테니까.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이 분명했지만, 자신의 목줄을 쥐고 있는 어려운 사람이기에 사사로이 관심을 나타낼 수 없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지금 어떤 대화를 나누고 있었나?”
“살라 대통령님과의 만찬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습니다.”
“뭔데? 특별한 일이 있었나?”
“제가 한 부사장에게 저녁 만찬이 어땠냐고…….”
추성민 법인장은 조금 전의 상황을 간단하게 보고했다.
“나도 한 부사장과 똑같은 생각으로 술을 마시러 올라온 거야.”
“아, 그렇군요.”
“그런데 추 법인장은 이곳에 무슨 일로 왔나?”
사실 추성민 법인장은 송훈석 회장이 TTM에 참석한다는 얘기를 듣고 몰디브에 오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 기회를 빌미로 자신과 아프리카 법인을 어필하기 위해서.
하지만 이 얘기는 절대로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기 때문에 그럴 듯한 변명거리를 만들어 냈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제가 파악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왔습니다.”
“그럼 조금 더 일찍 왔어야지.”
“저도 그러고 싶었는데,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서 겨우 짬을 내서 왔습니다.”
“그렇게 일이 많아?”
“대한 그룹이 수주한 잉가 3댐 건설 공사, 도로 확포장 공사, 송유관 건설 공사를 시작하기 위한 준비 작업에 돌입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탄자니아, 우간다, 나이지리아에서 진행할 핸드폰 기지국 업그레이드와 증설공사도 진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핸드폰 기지국 업그레이드와 증설공사는 국제입찰 하는 것 아니었나?”
“저희도 그렇게 알고 입찰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세 나라의 대통령님들이 통신회사 CEO와 담판 끝에 수의계약으로 진행하기로 결정됐습니다.”
“통신 회사들이 우리 회사를 원망하지 않을까?”
“제가 통신 회사들의 CEO를 만나서 달래 주느라, 이곳에 늦게 도착한 겁니다.”
“마무리는 잘됐겠지?”
“물론입니다.”
“원하는 게 있으면 이참에 얘기해 보게.”
연말에 상무로 승진할 수 있는 지 묻고 싶었지만, 차마 그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현재 저희 법인은 똥오줌을 가리지 못할 정도로 일감이 많은 상태입니다. 본사에서 직원들을 충원시켜 주기 어려우면, 현지 직원들이라도 채용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채용하면 되지, 뭐가 문제인가.”
“TO(Table of Organization)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저희 마음대로 채용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알겠네.”
추성민 법인장과 대화를 중단한 송훈석 회장은 서동호 실장에게 지시 내렸다.
“이진호 사장한테 전화 걸어서 나를 바꿔 줘.”
“네, 회장님.”
서동호 실장은 즉시 이진호 사장에게 전화 걸어서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은 후, 핸드폰을 송훈석 회장에게 건네주었다.
“이 사장, 너무 늦게 전화해서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내가 지금 아프리카 법인의 추성민 법인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지금 아프리카 법인의 업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까?”
[저희도 아프리카 법인을 백업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진호 사장도 아프리카 법인의 사정을 진즉에 파악한 듯했다.
송훈석 회장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아프리카 법인이 처해 있는 상황을 모르고 있었다면, 크게 실망할 뻔했다.
“그런데도 아프리카 법인에 인원을 충원해 주지 않는 이유가 뭡니까?”
[저희도 정재엽 인사담당 사장한테 끊임없이 인원을 충원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는 중이고, 정 안되면 현지 직원들을 늘릴 수 있도록 TO를 확대해 달라고 요청해 놓은 상황입니다.]
“TO를 본사 인사담당에서 관리하고 있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내가 정 사장한테 따로 얘기할 테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요.”
[고맙습니다, 회장님.]
“나중에 통화합시다.”
딸깍.
송훈석 회장은 핸드폰을 서동호 실장에게 돌려주며 말을 이어 나갔다.
“추 법인장, 들었지?”
“네, 회장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감사는 뭘… 그나저나 최준하는 요즘 어떻게 지내나?”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