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5화] 결산
다음 날 오전, 회의실.
약속된 10시가 되자, 사회자석에 서 있던 신지훈 실장이 회의 참석자들에게 정중한 자세로 인사하고 회의를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H&J 컨설팅의 신지훈 비서실장입니다. 본격적으로 회의를 시작하기 전에 여러분께 당부의 말씀을 전달하겠습니다. 아프리카 7개국이 발주한 품목들 중에는 전략전인 차원으로 인도에서 공급받을 수밖에 없는 품목들이 있습니다. 저희가 토론한 내용들이 인도 측에 유출되면 자원 수출 가격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상당히 높습니다. 이 점을 반드시 유의해 주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이제부터 아프리카 7개국에 공급할 품목들에 대한 공급 방안에 대해서 토론하도록 하겠습니다.”
팟.
회의실의 조명이 어두워지고 스크린에 ‘아프리카 7개국 발주 현황’이라는 제목의 장표가 비춰졌다.
― 콜레라를 비롯한 전염병 치료제 및 가정상비약품 : 105억 달러.
“저희 SH무역은 7개국으로부터 세 번에 걸쳐서 의약품을 발주 받았습니다. 1차로 발주 받은 50억 달러 상당의 의약품은 대한제약을 비롯한 대한민국의 제약 회사들로부터 공급받을 예정입니다. 2차와 3차에 발주 받은 55억 달러 상당의 의약품은 인도 제약 회사들로부터 공급받을 예정입니다만, 약간의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어떤 문제가 생겼습니까?”
“인도 측 제약 회사들이 계약서에 사인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중입니다.”
“이유를 알고 있습니까?”
“저희의 다급한 상황을 역이용해서 유리한 조건으로 계약하려는 속셈인 것 같습니다.”
“그들의 속셈에 대한 대책은 마련되어 있습니까?”
“제가 생각해 놓고 있는 대책은…….”
겨울은 신지훈 실장이 언급한 대책에 커다란 문제점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 문제점은 아프리카 7개국이 인도에 수출하는 자원의 가격을 인상시킬 수 없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55억 달러 상당의 의약품 수출 건은 죽으나 사나 인도와 결착을 볼 수밖에 없었다.
겨울은 신지훈 실장의 발언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조용히 발언권을 요청했다.
“저는 신 실장께서 언급한 대책에 하나의 대책을 추가했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대책입니까?”
“오후에 인도와 TTM을 재개하면…….”
겨울의 설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오코사 실장이 재빨리 발언권을 요청했다.
“인도 측과의 협상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저도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할 수 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나라 대표들이 역할을 수행하겠다고 자처하는 바람에 제비뽑기를 진행했고, 결국 부투야 실장이 협상 대표로 낙점되었다.
“제가 책임지고 자원 수출 가격을 인상시켜 드릴 테니까, 믿어 주십시오.”
“인도 측을 너무 강하게 밀어붙이면, 협상이 난관에 빠질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십시오.”
“그야 물론입니다.”
의약품과 관련한 얘기가 얼추 끝났다고 판단한 신지훈 실장이 대화의 주도권을 찾아왔다.
“스크린을 보시면, 케냐가 발주한 품목 중에서 정수기 80만 대는 미국에서 공급받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최신 사양의 컴퓨터 10만 대는 대한전자에서 공급받기로 했고, 인도 공장에서 생산할 예정입니다. 이제 선풍기 공급 방안에 대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 * *
같은 시각.
샹그릴라 호텔의 회의실에는 미국, 인도, 케냐, 모잠비크, 몰디브, 중국 대표가 모여서 협정 체결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미 사전에 협의가 완료되어서인지 협정 체결은 별다른 문제없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자오린 부총리님, 방금 전에 우리나라 정부 계좌에 8억 달러가 입금된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루퍼트 장관님, 이제 협정서에 사인해 주셨으면 합니다.”
“좋습니다.”
루퍼트 장관과 자오린 부총리는 협정서에 교차사인 후, 일사천리로 기념촬영까지 끝마쳤다.
사회자석에 서 있던 왕지쉰 국장은 어수선한 분위기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이제 인도와 협정 체결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 협정서 초안을 저희가 작성해 놓은 상태입니다. 인도 측은 내용을 확인해 보시고, 이의가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왕지쉰 국장에게 협정서 초안을 건네받아 검토하던 싱 총리는 두 눈을 의심했다.
자국이 중국과의 국경 지대에 2년 동안 무기와 군대를 증강 배치하지 않는 조건으로 중국에서 받는 보상금은 모두 10억 달러였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협정서 초안에는 20억 달러로 명기되어 있었다.
보상금으로 10억 달러를 주기로 사전에 합의를 끝냈는데, 가격이 두 배로 뛰었으니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다만, 하나 의심스러운 것은 자오린 부총리가 인센티브에 욕심을 내고 자발적으로 20억 달러로 인상했을 거라는 점이었다.
싱 총리는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 자오린 부총리에게 말을 건넸다.
“자오린 부총리님, 보상금 액수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잘못된 게 아니라, 그 금액이 맞습니다.”
“금액이 변동된 이유를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여기서는 곤란하고, 부속실에서 말씀드렸으면 합니다.”
“그렇게 합시다.”
부속실로 자리를 이동한 두 사람은 예열 없이 곧바로 대화를 진행했다.
“싱 총리님, 어떻게 된 영문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사실은 천 외교부장 때문에 부득불 10억 달러를 인상했습니다.”
“천 외교부장 때문이라니요?”
자오린 부총리는 어제 저녁에 천유런 외교부장과 대화를 나누다가 놀라운 사실을 하나 알아냈다.
그가 테러범들에게 납치됐을 당시에 몸값으로 무려 15억 달러를 지불했다는 내용이었다.
거짓말하지 말라며 그의 말을 일축했으나, 테러범들에게 15억 달러가 송금된 내역을 확인시켜 주는 바람에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천유런 외교부장은 축난 재산의 일부를 채워 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결국 그 부탁을 핑계 삼아 시쥔량 주석에게 싫은 소리를 들어가며 증액을 요청한 끝에, 보상금을 20억 달러로 인상시키는 데 성공했다.
짧게 생각을 끝낸 자오린 부총리는 보상금 인상 이유를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인센티브 2억 달러를 천 외교부장에게 되돌려줄 생각입니다.”
“시 주석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시면서 보상금 액수를 인상시켰습니까?”
“저희 측이 제안한 보상금 10억 달러를 싱 총리께서 강력하게 반대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자오린 부총리님, 저는 반대한 적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냉랭한 싱 총리의 반응에 자오린 부총리의 목소리가 급격하게 잦아들었다.
사실 싱 총리는 겉으로만 그랬을 뿐, 기분이 상당히 좋은 상태였다.
생각지도 않던 공돈 8억 달러가 생겼는데, 싫어할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싱 총리가 싸늘한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완벽한 알리바이를 위해서였다.
“자오린 부총리님, 위험을 감수하면서 천 외교부장을 챙겨 주는 이유가 뭡니까?”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미안해서입니다.”
“미안하다니요?”
“싱 총리님도 알고 계시다시피 저는 이곳에 와서 2억 달러라는 불로소득을 얻었습니다. 그에 반해서 천 외교부장은 개인재산 15억 달러를 날려먹었습니다. 측은지심이 저절로 생겨서 제가 선심 쓴 겁니다.”
‘저는 자오린 부총리님의 뒷주머니에 들어가는 돈이 35억 달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차마 이 말은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보상금 건으로 인해서 우리나라와 중국의 사이가 더욱 더 나빠질 것 같아서 심히 우려스럽습니다.”
“제가 본국으로 돌아가면, 시 주석님께 인도 측의 입장을 충분하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저는 자오린 부총리님만 믿고 있겠습니다.”
“믿어 준 만큼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하여간 알겠습니다. 이제 회의실로 돌아갑시다.”
자오린 부총리가 회의실로 돌아오자, 천유런 외교부장은 초조한 심정을 감추지 못하고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됐습니까?”
“내가 당신 때문에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네.”
“부총리님, 고맙습니다.”
“만약에 이 사실을 주석님이 알게 되면, 당신과 나는 죽은 목숨이야.”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에이, 못난 친구.”
이 말과 함께 시선을 옮기며 싱 총리에게 말을 걸었다.
“협정서 초안에 문제가 없으면, 곧바로 사인 절차에 돌입했으면 좋겠습니다.”
“자오린 부총리님, 협정서 초안의 내용은 문제가 없지만, 다른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아프리카 7개국과의 자원 거래를 6월 말로 종료한다는 확인서가 보이지 않습니다.”
“굳이 확인서를 작성해 드릴 필요가 있을까요?”
“확인서를 작성해 주지 않으면, 협정서에 사인할 수 없습니다.”
단호한 싱 총리의 반응에 자오린 부총리는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오기 시작했다.
어제 저녁때 시쥔량 주석에게 싱 총리가 요구한 확인서에 대해 말을 꺼냈다가 싫은 소리만 잔뜩 들었기 때문이었다.
구렁이 담 넘어가듯 확인서 건을 유야무야 피하려 했는데, 이제는 모두 틀려 버렸다.
그는 인상을 굳히고 부속실로 이동해서 시쥔량 주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오린 부총리, 협정 체결을 잘 진행되고 있습니까?]
“미국과는 별다른 문제 없이 협정 체결을 마무리했습니다만, 인도와의 협정 체결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확인서가 발목을 잡고 있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확인서를 작성해 주지 않으면, 협정 체결은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자오린 부총리는 인도 놈들이 확인서에 목숨 걸고 있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합니까?]
“우리나라의 꼼수를 읽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하아…….]
시쥔량 주석이 내뱉는 한숨 소리가 귓속깊이 들려왔다.
“주석님, 7개국은 이미 우리나라의 통제권에서 벗어났습니다. 미련을 버리고, 다른 나라들이 일대일로 프로젝트에서 탈퇴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급선무인 것 같습니다.”
[…알았습니다. 확인서를 작성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딸깍.
시쥔량 주석과의 통화를 끝낸 자오린 부총리는 혼잣말을 내뱉으며, 부속실 문을 나섰다.
“결국 동의할 수밖에 없으면서, 고집부리는 이유를 모르겠단 말이야.”
자오린 부총리가 회의실로 돌아오자, 이번에도 천유런 외교부장이 궁금함을 담은 얼굴로 물어왔다.
“부총리님, 어떻게 됐습니까?”
“알면서 왜 물어? 작성해 놓은 확인서를 인도 측에 전달해.”
“주석님께서 동의하셨습니까?”
“동의하지 않으면, 이 난감한 상황을 돌파할 방법이 있겠어?”
“하긴… 부총리님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오늘 오후에는 본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야 하니까, 서두르자고.”
“네, 부총리님.”
싱 총리는 건네받은 확인서 내용을 꼼꼼하게 읽어 본 후, 자오린 부총리에게 말을 건넸다.
“확인서에 우리나라가 원하는 내용이 모두 포함되어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이제 협정서와 확인서에 사인했으면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가 원하던 바였습니다.”
싱 총리와 자오린 총리는 협정서와 확인서에 교차 사인 후, 기념촬영을 완료했다.
뒤이어 진행된 케냐, 모잠비크, 몰디브의 일대일로 프로젝트 탈퇴와 관련한 협정 체결도 별다른 문제없이 완료되었다.
이제 가장 중요한 인센티브 결산만 남아 있었다.
인센티브 수혜자인 자오린 부총리가 루퍼트 장관에게 말을 건넸다.
“시 주석께서 루퍼트 장관께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전달하기가 애매하니, 부속실로 자리를 이동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합시다.”
자오린 부총리의 의도를 바로 눈치챈 루퍼트 장관이 즉각 화답했다.
부속실로 자리를 이동한 자오린 부총리는 이것저것 재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꺼내 들었다.
“루퍼트 장관님, 이제 인센티브를 정산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겠습니다. 은행 계좌번호를 알려 주시면, 케냐와 모잠비크의 몫까지 해서 33억 달러를 송금해 드리겠습니다.”
“이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천 외교부장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는 그 방법이 깔끔할 것 같아서 그럽니다.”
“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은행 계좌번호는 여기 있습니다.”
루퍼트 장관은 미리 준비해 놓고 있던 노트북을 키고, 약속대로 33억 달러를 송금시켜 주었다.
“자오린 부총리님, 확인해 보십시오.”
루퍼트 장관에게 노트북을 건네받은 자오린 부총리는 자신의 은행 홈페이지에 접속해서 33억 달러가 입금되었는지 확인했다.
“루퍼트 장관님, 확인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회의실로 돌아가서 싱 총리를 보내드리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중국으로 안녕히 돌아가시고, 다음에 뵙겠습니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