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화] 치열한 눈치 싸움 (1)
“한 부사장, 나는 H&J 컨설팅의 경영진이 아닌데 데리고 가려는 이유가 뭐야?”
겨울의 옆에 앉아 있던 호영이 뚱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의 번뜩이는 재치가 필요할 것 같아서.”
“캬, 이제야 네가 내 진가를 알아주는구나. 그나저나 자오린 부총리한테 나를 어떻게 소개하게?”
“네 소속 회사는 밝히지 않고 그냥 이사라고만 소개하려고.”
“고작 이사가 H&J 컨설팅의 경영진이라고 하면, 자오린 부총리가 우습게 보지 않을까?”
“하 실장님도 직위는 이사야.”
“아, 그렇지. 만약에 중국 측에서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한다면, 어떻게 대처할 생각이야?”
중국은 일대일로 프로젝트를 이용해서 아프리카 국가들로부터 여러 가지 자원을 국제가격 대비 절반 이하로 수입하는 중이었다.
그러니 굳이 따져 보지 않아도 현실적인 가격을 반영해서 수입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 것이다.
“나는 사람의 생각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즉, 신통치 않는 제안을 할 거라는 얘기였다.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자오린 부총리를 만나 보려는 이유가 뭐야?”
“만약을 대비하기 위해서.”
“만약이라니?”
“잘 생각해 봐.”
순간, 호영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무언가가 있었다.
“뭐야?! 설마… 너… 거기까지 내다본 거야?”
“그러니까 만약이라고 했잖아.”
“와아, 한겨울 너… 진짜 많이 컸다. 대단하다, 정말.”
“어쭈, 웬일로 칭찬이래?”
그들의 선문답을 지켜보던 하도진 실장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머리를 돌렸다.
“부사장님, 몰디브에서 일어난 사건들의 배후에 저희가 있다는 사실을 자오린 부총리가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까무러치지 않을까 싶네요.”
“그런 모습을 봤으면 좋겠는데, 아쉬울 따름이네요.”
* * *
그 시각.
식당 지배인의 안내를 받아서 VIP 룸의 안으로 들어간 자오린 부총리는 짜증이 물밀듯이 몰려들었다.
휑하니 비어 있는 공간만이 자신들을 반겨 주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심정을 알고 있다는 듯 천유런 외교부장이 재빨리 말을 걸어왔다.
“그… 부총리님, 약속 시간이 조금 남아 있습니다.”
“루퍼트 장관은 그렇다 하더라도 H&J 컨설팅 놈들은 미리 도착해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제가 그놈들이 도착하면 따끔하게 한마디 할 테니까, 부디 노여움을 푸십시오.”
“후우, 그렇다고 함부로 시비 걸지는 말고.”
잠시 후, 약간의 시차를 두고 루퍼트 장관과 겨울 일행이 VIP룸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각자 정해진 자리에 앉자마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천유런 외교부장이 입에서 불을 뿜었다.
“H&J 컨설팅 측은 너무하는 것 아닙니까?”
정명훈 사장은 천유런 외교부장이 성질내는 이유를 단숨에 캐치했다.
그는 자신들을 일개 브로커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리라.
‘천 외교부장,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군. 뜨거운 맛을 보여 줄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그는 각오를 단단히 하고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뜬금없이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들이 도착하기 전에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예의 아닙니까?”
“저희가 꼭 그래야 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당신은 우리가 누구인지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그러는 당신은 누군데요? 나한테 누군지 알려 준 적이 있습니까?”
“뭐야! 당신?”
천유런 외교부장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정명훈 사장은 전혀 위축되지 않고 차분한 목소리로 되받아쳤다.
“당신이라는 표현을 누가 먼저 사용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나한테 이렇게 함부로 대하는 이유가 뭡니까!”
“당신이 먼저 함부로 대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당신같이 무례한 사람과 식사를 같이할 생각이 없습니다. 루퍼트 장관님, 다음에 뵙겠습니다.”
이 말과 함께 정명훈 사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VIP룸의 문을 열고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겨울을 포함한 일행들도 그의 뒤를 따랐다.
정명훈 사장이 이곳에 도착해서 퇴장할 때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1분도 채 지나지 않았다.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자오린 부총리가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천 외교부장, 도대체 뭐 하는 짓이야!”
‘아니, 뭐 하는 짓이라니요? 저는 부총리님의 지시를 따랐을 뿐입니다만…….’
이 말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와 입안에 머물렀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뭐 해! 빨리 쫓아가서 붙잡지 않고!”
“제 체면에 어떻게…….”
“체면이 밥 먹여 줘?!”
천유런 외교부장이 마지못해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루퍼트 장관이 불쑥 대화에 끼어들었다.
“자오린 부총리님, 제가 데리고 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래 주시겠습니까?”
자오린 부총리가 반색하며 대답했다.
루퍼트 장관은 빠른 걸음으로 VIP룸 밖으로 나갔다.
예상한 대로 정명훈 사장 일행이 멀지 않은 곳에 멈춰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엄지손가락을 위로 치켜들고 밝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정 사장님, 정말 멋있었습니다.”
“이제 슬슬 2라운드를 시작해 볼까요?”
“네? 2라운드라뇨?”
“저희가 다투는 목소리를 VIP룸 안에 있는 사람들이 듣도록 만들어야 하잖아요.”
“아하!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루퍼트 장관님, 바쁜 사람들을 불러 놓고 뭐 하시는 겁니까!”
“미안합니다, 정 사장님.”
“VIP룸 안에 있는 중국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인데, 이렇게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 겁니까?”
한편, 자오린 부총리는 쉽게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천 외교부장, 내가 언제 저놈들하고 대놓고 시비를 붙으라고 그랬어!”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저놈들이 가 버리면, 어떻게 할 생각이야!”
그때, 장쉬엔량 국장이 급하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부총리님, 지금 밖에서 가오리 방쯔 놈이 루퍼트 장관에게 신경질을 부리고 있습니다.”
“뭐? 뭐라고 신경질을 부리고 있는데?”
“아프리카 7개 나라들과 인도와의 TTM까지 중단시켜 놓고 식사하러 왔는데, 이게 뭐냐고 하면서 따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천 외교부장님의 무례한 행동에 대해서도 한마디 하고 있는 중입니다.”
“가오리 방쯔 놈이 우리를 안중에 두고 있지 않은 이유가 뭘까?”
“아프리카 7개국의 자원들을 인도에 수출할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인도가 그렇게 많은 물량을 소화할 수 있을까?”
“바쁘기로 소문난 싱 총리가 TTM에 참석한 것에 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음, 충분히 그럴 수 있겠군.”
그때, VIP룸의 문이 열렸다.
마지못해 발걸음을 옮기는 거라고 티를 팍팍 내는 정명훈 사장 일행을 루퍼트 장관이 데리고 안으로 들어왔다.
자오린 부총리 등은 자리에서 급히 일어나 사과의 말부터 건넸다.
“루퍼트 장관님, 불편을 끼쳐 드려서 정말 미안합니다.”
“제 잘못도 있으니까, 비긴 셈으로 칩시다.”
“루퍼트 장관님이 어떤 잘못을 하셨는데요?”
“사실은 제가 H&J 컨설팅의 정명훈 사장님께 자오린 부총리님과 식사를 같이한다고 얘기하지 않았거든요.”
자오린 부총리는 정명훈 사장이 발끈한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아무것도 모르고 점심 식사에 참석한 그에게 예의가 없다면서 질책을 가했으니, 발끈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따름이었다.
자신들이 잘못했기 때문에 사과하는 것이 맞았다.
“정명훈 사장님, 저희가 경솔했습니다. 미안합니다.”
“저희와 식사를 같이하는 분이 자오린 부총리님이라고 알았더라면, 결코 무례를 저지르지 않았을 겁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정식으로 사과드립니다.”
“우리들의 신분을 밝히지 않은 책임이 크니까, 이쯤에서 화해하고 넘어갔으면 좋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이제부터 자오린 부총리님께 저희에 대해서 소개하겠습니다. 저는 H&J 컨설팅의 대표이사인…….”
다소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양측의 상견례가 끝나고, 점심 식사가 시작되었다.
“자오린 부총리님께서는 몰디브에 무슨 일 때문에 오셨습니까?”
이유를 빤히 알고 있었지만, 정명훈 사장은 시치미를 똑 떼고 물었다.
처음에 자오린 부총리는 숨길까 생각했다가 마음을 바꿔먹었다.
자기가 이곳을 방문한 이유를 알고 있는 사람이 제법 많았기 때문에.
“어떤 인간이 사고 친 것을 뒷수습하러 왔습니다.”
그러면서 슬쩍 천유런 외교부장을 힐끔거렸다.
“어떤 인간이라면… 천 외교부장을 말씀하는 겁니까?”
“네, 그렇습니다.”
“어떤 사고를 쳤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천 외교부장이 루퍼트 장관을 납치하려고 했습니다.”
“…정말 무모한 일을 벌이셨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나도 궁금한 것이 있는데, 물어봐도 됩니까?”
“얼마든지 말씀하십시오.”
“루퍼트 장관님과는 어떻게 알게 됐습니까?”
정명훈 사장은 사전에 루퍼트 장관과 말을 맞춰 놓은 상태였다.
“일전에 콩고민주공화국의 부투야 비서실장의 소개로 인사를 나눴습니다.”
“부투야 실장과는 어떻게 인연을 맺었습니까?”
“제가 근무하던 회사가 대한 그룹의 아프리카 법인이었습니다. 그때 인사를 나누었고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 오고 있는 중입니다.”
“이곳에 온 아프리카 7개국의 대표들과도 안면이 있습니까?”
“어떻게 하다 보니 인연을 맺게 됐습니다.”
“그렇다면 아프리카 7개국과 우리나라 사이에서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잘 알고 있겠네요?”
정명훈 사장은 아주 중요한 순간이라고 판단했다.
나이지리아를 포함한 7개국이 일대일로 프로젝트에서 탈퇴한 사실은 외부로 유출돼서는 절대로 안 되는 비밀이었다.
따라서 자기가 그 얘기를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비밀을 누설하게 되는 셈.
그렇게 되면 아프리카 7개국은 계약서에 명시되어 있듯이 비밀을 누설한 대가로 중국에 막대한 금액의 페널티를 지불해야 한다.
그렇다고 모른 척할 수도 없는 것이 일대일로 프로젝트는 자원 수출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그는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고 자오린 부총리의 질문에 대답했다.
“아프리카 7개국이 불가피한 사정으로 인해서 중국에 자원을 수출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정 사장님은 그 불가피한 사정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흐음, 저도 그게 궁금해서 부투야 실장 등에게 물어봤지만, 끝내 대답해 주지 않았습니다. 혹시 자오린 부총리님께서는 알고 계신 것이 있습니까?”
순간, 자오린 부총리는 실망감이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내심 정명훈 사장이 일대일로 프로젝트에 대해서 언급하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그래야 이를 빌미 삼아서 아프리카 7개국과의 자원 거래를 중단 없이 이어 갈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정명훈 사장은 마치 자신의 의도를 알고 있는 것마냥 문젯거리를 만들지 않았다.
이제는 정공법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우리나라가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던 일대일로 프로젝트에서 7개국이 탈퇴한 상황입니다. 그럼으로 인해서 그 나라들로부터 자원들을 수입할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고요.”
“일대일로 프로젝트와 자원 거래가 상관관계가 있습니까?”
“사실은 우리나라가 7개국으로부터 수입하던 자원들 가격이 매우 저렴했습니다.”
“아, 그렇군요.”
정명훈 사장은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아래위로 끄덕였다.
“정 사장님, 이왕 말이 나온 김에 하나만 더 물어봐도 될까요?”
“얼마든지 물어보십시오.”
“아프리카 7개국이 수출하려는 자원들에 대해서 인도는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까?”
“싱 총리께서는 전량 수입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하셨습니다.”
“인도 측이 제시한 조건은 어떻게 됩니까?”
“가격 조건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국제가격 대비 15% 할인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부총리님도 알고 계시다시피 자원 가격은 셀러가 결정하기 때문에 인도 측이 제시한 가격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만약에 인도 측이 자원의 수입 가격을 그대로 고수하면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겠지만, TTM을 결렬시킬 생각입니다.”
“플랜 B가 수립되어 있다는 뜻으로 들리는데, 맞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미국이 책임지고 자원들을 다른 나라에 수출해 주기로 약속한 상태입니다.”
“TTM이 결렬될 경우를 대비해서 제가 이곳에 와 있는 겁니다.”
정명훈 사장의 뒤를 이어서 루퍼트 장관이 한마디 거들었다.
사실 자오린 부총리는 정명훈 사장에게 국제가격 대비 20% 할인한 가격을 제안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정명훈 사장은 15% 할인한 가격도 수용할 생각이 없는 듯해 보였다.
이제 자신들이 아프리카 7개국과의 자원 거래를 중단 없이 이어 갈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정 사장님, 우리나라는 국제가격 대비…….”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