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화] 돌발변수
다음 날.
아프리카 7개국과 인도의 TTM은 정확하게 오전 10시에 시작되었다.
양측의 소개와 모두 발언을 끝내고 본격적인 협상에 돌입하려는 순간, 싱 총리가 급하게 발언권을 요청하고 입을 열었다.
“우리 인도는 아프리카 7개국이 수출하려는 자원들을 전량 수입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네?!”
오코사 실장을 비롯한 7개국의 대표와 H&J 컨설팅의 임직원들이 깜짝 놀라는 소리가 회의실에 가득 들어찼다.
싱 총리는 그들의 반응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만족스런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오코사 실장님, 우리나라가 이렇게 제안할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습니까?”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상상조차 못했습니다.”
“7개국이 수출하겠다는 자원들을 우리나라가 모두 수입하지 못한다고 가정했을 경우에 대책은 수립해 놓았습니까?”
아프리카 7개국의 협상 대표인 오코사 실장은 그 문제를 생각하면 아직도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인도가 자원을 전량 수입하는 것은 무리임을 일찌감치 예상하고 대책을 수립하기 위해서 어젯밤 늦게까지 회의를 진행했다.
하지만 나라마다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얽혀 있었기 때문에 마땅한 묘안을 찾지 못한 상태였다.
사실대로 대답하려는 순간, 정명훈 사장이 은밀하게 신호를 보내왔다.
그 신호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빠르게 생각한 끝에 겨우 해답을 찾아냈다.
‘아하, 그런 뜻이 숨어 있었군요?’
그는 재빨리 생각을 구체화하고 싱 총리의 질문에 대답했다.
“한국과 미국에서 수입해 주기로 약속해 준 상태입니다.”
사실 싱 총리가 아프리카 7개국에 통 큰 제안을 한 이유는 자원의 수입 가격 때문이었다.
인도가 수입하는 자원의 물량이 많으면 많을수록 가격 할인 폭이 커지는 것은 사실이니까.
하지만 오코사 실장은 자국의 의도를 눈치채고 있다는 듯 이미 플랜 B를 수립해 놓았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가격을 인하해서 수입해야 하는 상황.
“오코사 실장님, 우리나라가 자원들을 모두 수입해줌으로써 7개국의 일손을 많이 덜어 줬다는 점을 감안해 주십시오.”
“물론입니다. 저희는 기존에 약속한 대로 국제가격보다 낮은 가격으로 자원들을 인도에 수출할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하, 고맙습니다. 본격적인 가격 협상은 샤르마 장관과 하시기 바랍니다.”
주어진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한 싱 총리가 2선으로 물러나고, 그 자리를 샤르마 장관이 차고 들어왔다.
“오코사 실장님, 우리나라는 7개국이 수출하고자 하는 자원들을 국제가격 대비 15% 할인해서 수입했으면 합니다.”
바이어는 최대한 저렴하게, 셀러는 최대한 비싸게 제품을 판매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다.
양측이 보유하고 있는 카드를 하나씩 꺼내 가며 절충점을 찾아가는 과정이 바로 TTM이다.
때문에 오코사 실장은 인도 측의 제안에 대해서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는 카드들 또한 제법 강력했기 때문에.
그렇다고 지금 당장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카드를 모두 공개할 생각은 없었다.
TTM은 100m 달리기가 아닌 42.195㎞를 달리는 마라톤 경기였으니까.
“샤르마 장관님, 국제가격 대비 15% 할인 요구는 너무 심한 것 같습니다.”
“저희가 아프리카 7개국의 자원들을 전량 수입한다는 점을 감안해 주십시오.”
“인도 측의 제안은 저 혼자서 결정할 수 없으니까, 저희끼리 상의한 후에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저희가 언제까지 기다리면 될까요?”
“오늘 중으로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저희는 숙소로 돌아가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잠시 대화가 중단된 틈을 이용해서 김윤중 전무가 발언권을 요청하며 공지 사항을 전달했다.
“예상보다 TTM이 빨리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지금부터 점심 식사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찬성합니다.”
“오후 TTM 일정은 아프리카 7개국의 협의가 끝날 때까지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TTM 재개 시간은 한 시간 전에 인도 측에 통보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좋습니다.”
아프리카 7개국 대표들과 H&J 컨설팅의 임직원들은 별도의 회의실로 이동해서 샤르마 장관의 제안에 대해서 토론을 시작했다.
“정 사장님, 인도 측의 의도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정명훈 사장은 인도 측이 국제가격 대비 10% 정도 할인된 가격을 제안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국제가격 대비 15% 할인된 가격을 요구했다.
그러나 흘러가는 분위기상 인도 측이 이 가격을 끝끝내 고수하지 않을 것이 확실했기 때문에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최종적으로 인도 측은 국제가격 대비 10% 할인된 가격으로 자원들을 수입할 생각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대응하면 됩니까?”
“기존에 수립해 놓은 계획대로 협상전략을 고수하면 될 것 같습니다.”
“저희가 양보해 주지 않아도 될까요?”
“최대한 버텨 보고 최악의 경우에 양보해 줬으면 합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인도 측이 저희의 자원들은 전량 수입해 줄 것을 알고 있었습니까?”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아, 그래서 저한테 은밀한 신호를 보내오셨군요?”
“네, 그렇습니다.”
윙윙―
그때, 겨울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케냐 등의 일대일로 프로젝트 탈퇴와 관련해서 자오린 부총리와 세부적인 협상을 벌이고 있는 루퍼트 장관이 걸어온 전화였다.
그가 전화를 걸어왔다는 것은 무언가 돌발 상황이 발생했다는 뜻.
겨울은 조용히 회의실 밖으로 나가서 그와 통화를 시작했다.
“네, 루퍼트 장관님.”
[한 부사장님, 방금 전에 자오린 부총리한테 전화가 왔습니다.]
“그가 뭐라고 했습니까?”
[H&J 컨설팅의 경영진들을 꼭 만나 봤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겨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루퍼트 장관과 통화를 이어 나갔다.
“장관님, 자오린 부총리가 저희의 존재를 알고 있었습니까?”
[천 외교부장에게 어젯밤에 전해 들었답니다.]
“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자오린 부총리가 저희를 만나려고 하는 이유를 알고 계십니까?”
[정확하게 얘기해 주지는 않았습니다만, 아프리카 7개국의 자원 수출과 관련해서 대화를 나눠 보고 싶어 했습니다.]
겨울은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대충 감이 잡혔다.
아프리카 7개국이 중국에 수출하는 자원 거래는 6월 말로 종료된다.
부족한 자원들을 다른 나라로부터 수입해야 하는 중국으로서는 마땅한 대책이 강구되어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궁여지책으로 기존의 나라들로부터 수입하던 자원 가격을 인상해서 수입할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리라.
겨울은 중국과 인도의 자원 확보 전쟁에 도화선을 당겨 주면 원하는 결과를 손쉽게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관님, 저희가 어디로 가면 됩니까?”
[내가 묵고 있는 호텔에서 점심 식사를 같이하는 건 어떨까요?]
“아, 그럼 12시까지 가도록 하겠습니다.”
겨울이 전화를 끝내고 회의실 안으로 들어와 자신의 자리에 앉자, 부투야 실장이 잔뜩 호기심을 품으며 물어왔다.
“한 부사장님, 누구와 통화했습니까?”
겨울은 숨길까 생각하다가 사실대로 털어놓기로 결정했다.
“…중국 측과 점심 식사를 같이하기로 했습니다.”
“한 부사장님은 중국 측의 의도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자오린 부총리를 만나서 대화를 나눠 봐야 하겠지만, 다른 나라들로부터 자원 확보가 쉽지 않아서…일 것 같습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저희는 어떻게 대처하면 좋겠습니까?”
“제 생각은…….”
칠리마 모잠비크 부통령은 부투야 실장을 비롯한 5개국의 대표들이 겨울을 친자식처럼 아끼는 이유를 금방 깨달았다.
만약에 그의 아이디어가 실현된다면, 자신들이 직접 인도와 치열한 수 싸움을 벌일 필요가 전혀 없었다.
양손에 쥐고 있는 빵 중에서 맛있는 것을 골라 먹으면 그만이니까.
칠리마 부통령이 짧은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에도 겨울의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인도 정보국 요원들이 이곳에 쫙 깔려 있기 때문에 저희가 자오린 부총리를 만난다는 얘기가 인도 측의 귀에 들어갈 겁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오코사 실장님은 샤르마 장관께 전화가 걸려오면, 제가 말씀드린 대로 대답하십시오.”
“알았어요.”
“언제나 하는 말이지만, 모든 것이 물이 흘러가듯 자연스러워야 합니다.”
“하하, 그 점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는 이제 루퍼트 장관님을 만나러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 * *
“라울 요원, 그게 사실이야?”
[네, 국장님. 조금 전에 정명훈 사장을 비롯한 H&J 컨설팅의 경영진들이 호텔을 떠났습니다.]
“그들이 어디로 가던가?”
[루퍼트 장관의 숙소가 있는 샹그릴라 호텔로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때, 액정에 또 다른 정보국 요원의 핸드폰 번호가 찍혔다.
“라울 요원, 산디프 요원한테 전화가 왔으니까 나중에 통화하자고.”
[네, 국장님.]
급하게 라울 요원과 통화를 종료한 데사이 국장은 산디프 요원과 통화를 시작했다.
“무슨 일인가?”
[국장님, 조금 전에 자오린 부총리가 루퍼트 장관의 숙소가 있는 샹그릴라 호텔에 도착했습니다.]
데사이 국장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 짧게 짐작해 보았다.
느낌상 자오린 부총리가 루퍼트 장관에게 H&J 컨설팅의 경영진을 만나게 해 달라고 요청한 것 같았다.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자원 거래’라는 단어가 불현듯 떠올랐다.
만약에 그렇다면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산디프 요원, 나중에 통화하자고.”
뚝.
데사이 국장이 급하게 전화를 끊자, 뒷자리에 앉아 있던 싱 총리가 말을 걸어왔다.
“데사이 국장, 지금 어떤 상황입니까?”
“루퍼트 장관의 숙소인 샹그릴라 호텔에 H&J 컨설팅 경영진과 자오린 부총리가 미팅을 가질 것 같습니다.”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자원 거래 때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자원 거래라…….”
끝말을 흐린 싱 총리는 생각할 것이 있는지 차창 밖의 에메랄드빛 바다로 시선을 돌렸다.
덕분에 자동차 안에는 나지막하게 엔진 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싱 총리가 시선을 차 안으로 옮기며 말문을 열었다.
“샤르마 장관, 중국의 의도가 무엇일까요?”
“아마도 아프리카 7개국과의 자원 거래를 중단하지 않으려는 속셈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과연 미국이 동의할까요?”
“미국의 동의 여부보다는 아프리카 7개국의 의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최악의 경우, 우리는 빈손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이네요?”
“그렇게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데사이 국장이 발언권을 요청했다.
“총리님, H&J 컨설팅과 자오린 부총리가 다른 목적으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오코사 실장한테 정확한 정보를 파악해 보는 것이 어떨까요?”
“그러는 편이 낫겠군요. 샤르마 장관, 한번 전화해 보세요.”
“네, 총리님.”
짧게 대답한 샤르마 장관은 즉시 오코사 실장에게 전화 걸었다.
[네, 샤르마 장관님.]
“오코사 실장님, 긴급하게 하나만 여쭤도 되겠습니까?”
[네, 말씀해 보십시오.]
“H&J 컨설팅의 정 사장님이 경영진들과 함께 호텔을 떠났다고 방금 전에 보고받았습니다. 혹시 그 이유를 알고 계십니까?”
[루퍼트 장관이 H&J 컨설팅 경영진들과 점심 식사를 같이하자고 초대했습니다.]
샤르마 장관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 짧게 추리해 보았다.
자오린 부총리가 루퍼트 장관에게 H&J 컨설팅의 경영진들을 만나게 해 달라고 부탁한 것이 확실했다.
이에 루퍼트 장관은 점심 식사를 빙자해서 정명훈 사장에게 양측의 만남을 주선하고 있는 중이었고.
“오코사 실장님, 점심 식사와 관련해서 정 사장님한테 별도로 들은 얘기가 없습니까?”
[점심 식사가 생각보다 길어질 수 있다고 했고, 또 몰디브에 머무르는 기간이 늘어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쯤이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정명훈 사장은 아프리카 7개국과 자신들과의 TTM이 결렬될 경우를 대비해서 중국과의 TTM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오코사 실장님, 시간 괜찮으시면 저희와 식사를 같이하실까요?”
[그러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