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화] 낮말은 새가 듣는 법
하마드 부통령이 비행기에서 내리는 자오린 부총리에게 다가가며 인사말을 건넸다.
“우리 몰디브를 방문하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하마드 부통령님,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것 같습니다. 저를 환영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자오린 부총리님, 저희 때문에 다른 승객들이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머지 대화는 VIP 라운지에서 나누는 게 어떨까요?”
“어이쿠, 이런. 빨리 자리를 이동합시다.”
자오린 부총리는 이상하게 느낌이 좋지 않았다.
외국에서 손님이 찾아오면 밝은 표정으로 맞이해 주는 게 상대방에 대한 예의 아닌가.
그런데 하마드 부통령은 비행기에서 내려서 인사를 나눌 때부터 지금까지 고민이 있다는 듯 표정이 상당히 무거웠다.
느낌상 자신들과 관련된 고민인 것 같았다.
“하마드 부통령님,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하마드 부통령은 오늘 아침에 겨울에게 모종의 작전 지시를 받았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자오린 부총리를 만났을 때 일부러 심각한 표정을 지은 것인데, 이제야 반응을 보인 것이다.
속으로 천만다행이라 생각하며 그의 질문에 대답했다.
“사실은 어젯밤에 큰 사고가 발생해서 그럽니다.”
“어떤 사고였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우리나라 경찰들이 큰 사고를 당했습니다.”
“아이고, 어쩌다가요?”
“자오린 부총리님께 말씀드리기에는 조금 곤란한 측면이 있습니다.”
역시 자신의 추측이 맞아떨어졌다.
자오린 부총리는 자세한 영문을 캐물어보고 싶었지만,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서 궁금증을 거둬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하는 수 없군요. 몰디브 경찰들의 빠른 쾌유를 기원하겠습니다.”
“이제 자오린 부총리님께서 묵을 숙소와 관련된 대화를 잠깐 해 봤으면 합니다. 우리 몰디브 정부는…….”
천유런 외교부장은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오린 부총리가 비행기에서 내릴 때부터 지금까지 말은 고사하고 눈길조차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이렇게 유치한 행동을 보인 이면에는 자기에게 화가 났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함일 것이다.
하지만 이 자리에는 자기뿐만 아니라 하마드 부통령을 비롯한 몰디브 정부 측의 사람들도 같이 있지 않은가.
아무리 자기가 미워도 개인적인 감정을 절대로 표출해서는 안 되는 자리였다.
이런 얘기를 꺼내고 싶었으나, 지은 죄가 있기 때문에 함부로 꺼낼 수는 없었다.
천유런 외교부장이 속으로 끙끙 앓고 있는 사이에도 두 사람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영빈관을 제공하는 게 타당하지만, 만약을 대비하기 위해서 안가를 제공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만약이라뇨?”
“천 외교부장을 납치한 놈들이 파키스탄에 본거지를 둔 테러 단체인지 아직 확인이 안 된 상태입니다.”
“어젯밤에 테러범 놈들을 소탕하지 않았습니까?”
“천 외교부장을 구출하는 과정에서 그놈들이 자살폭탄을 터트리는 바람에 형체도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러면 된 것이 아닙니까?”
“아닙니다. 그놈들이 테러 단체에 소속되어 있다면, 상황이 더 복잡해집니다. 저희가 파악해 본 결과…….”
자오린 부총리는 하마드 부통령의 표정이 무겁던 이유를 이제야 눈치챘다.
천유런 외교부장을 구출하는 과정에서 테러범들이 자폭하는 바람에 몰디브 경찰과 CIA가 죽거나 다친 모양이었다.
이유야 어찌됐든 그들에 대한 보상 책임은 온전히 자신들의 몫.
미국 정부와 몰디브 정부가 자기에게 내밀 청구서를 생각하니, 가슴이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하아, 이 인간은 테러범 놈들에게 왜 납치돼서 일을 키우는 건지…….’
자오린 부총리는 천유런 외교부장에게 원망의 시선을 힐끗 보내고 하마드 부통령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저희는 하마드 부통령님께서 제안하신 대로 안가를 이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 대신 저희가 경찰력을 동원해서 안가를 철통같이 지켜 드리겠습니다.”
“몰디브 정부의 조치에 대해서 감사드립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제가 자오린 부총리님의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은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루퍼트 장관과의 협상을 잘 마무리 짓기를 기원하겠습니다.”
안가로 출발하기 위해서 차에 오른 자오린 부총리는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입을 열었다.
“천 외교부장, 하마드 부통령의 표정이 심각하던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저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하, 잘 알고 있군. 그나저나 어떻게 하다가 테러범 놈들한테 납치당한 거야?”
“장 국장의 작전에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기 위해서…….”
천유런 외교부장은 왕지쉰 국장과 말을 맞춰 놓은 시나리오를 입에 올렸다.
하지만 바에서 미녀 바텐더에게 수작을 건 내용은 철저하게 숨겼다.
“…술에 취해서 안가로 돌아가는 도중에 테러범 놈들에게 납치된 겁니다.”
“당신들이 몰디브에 입국한 사실을 테러범들이 모르고 있었다고 하지 않았나?”
“저도 그게 궁금해서 테러범 대장 놈에게 물어봤는데, 이미 알고 있었답니다.”
“어떻게?”
“놈들이 공항청사 밖에서 저희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답니다.”
“그럼… 우리가 묵을 안가도 테러범들에게 노출됐다는 말이잖아?”
“몰디브 경찰이 철통같이 지켜 준다고 했으니까… 그리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흐음…….”
자오린 부총리는 생각할 게 있는지 끝말을 흐리며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천유런 외교부장은 그의 생각을 방해하지 않고 적당할 때 찾아온 반가운 침묵을 유지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난 후, 생각을 끝낸 자오린 부총리가 천유런 외교부장에게 말을 걸었다.
“몰디브 정부가 우리한테 영빈관을 제공하지 않은 이유가 뭘까?”
“부총리님도 알고 계시겠지만, 영빈관은 도심과 약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작은 언덕 밑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테러범 놈들이 언덕에서 영빈관을 향해서 로켓포라도 날린다면, 저희는 큰 불상사를 입을 수 있습니다. 이 점을 고려해서 영빈관을 제공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안가도 로켓포 공격을 받을 수 있는 것은 마찬가지잖아?”
“안가는 주택가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로켓포 공격에는 안전한 편입니다.”
“알았어. 이제 다른 얘기를 잠깐 해 보자고. 당신의 구출 소식을 왕 국장한테 들어야 하는 이유가 뭐야?”
“그게… 테러범 놈들한테 핸드폰을 빼앗기는 바람에 미처 연락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럼 큰일이잖아?”
천유런 외교부장은 자오린 부총리의 의도를 단숨에 이해했다.
외교관들은 만약을 대비하기 위해서 핸드폰의 잠금장치를 이중, 삼중으로 설정해 놓는다.
하물며 그들이 그럴 정도인데, 중국의 외교를 총괄하는 자기는 어떠하겠는가.
“부총리님, 제 핸드폰에는 잠금이 여러 개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비밀번호를 알려 주지 않았다는 뜻이겠지?”
자오린 부총리는 자존심도 강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의심이 많았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천유런 외교부장은 신중을 기해서 얘기했다.
“테러범 놈들은 저한테 비밀번호조차 묻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
“어제 오전부터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간 것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어떤 상황이 있었는지 얘기해 봐.”
“테러범 놈들한테 납치돼서 깨어난 곳은 음습한 분위기가 풍기는 지하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테러범 놈들이 갑자기 허둥대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이유를 물어보니, 루퍼트 장관 납치 미수 사건과 제 납치 사건이 동시에 발생해서 몰디브가 발칵 뒤집혔답니다. 그러면서 그놈들도 그곳에서 탈출해야…….”
테러범들이 중요 인물을 납치하는 가장 큰 이유는 몸값을 받아 내기 위함일 것이다.
그랬기에 자오린 부총리는 테러범들이 천유런 외교부장의 몸값을 요구할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지만, 생각과는 다르게 감감무소식.
케냐와 모잠비크의 부통령에게 건네줄 뇌물 2억 달러에 손을 댔는지 확인해 봤지만, 그것도 아무 이상이 없었다.
이유가 무엇일까 무척이나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이유는 의외로 싱거웠다.
경황이 없어서였단다.
“핸드폰은 되찾았나?”
“형체를 알아볼 수 없도록 부서진 핸드폰을 되돌려 받았습니다.”
“음, 그렇군. 자네를 구출하는 데 CIA가 동원된 이유가 뭔가?”
“저도 그게 궁금해서 CIA 요원에게 물어봤는데… 그저 루퍼트 장관의 지시를 받았다는 얘기밖에 듣지 못했습니다.”
“흐음… 루퍼트 장관이 그런 지시를 내린 이유가 무엇일까?”
“제 핸드폰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이 아닌가 싶습니다.”
“음, 충분히 그럴 수 있겠군,”
여전히 헛다리를 크게 짚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차는 안가에 도착했다.
자오린 부총리는 소파에 앉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음료수를 한 모금 마신 후, 만족스런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안가도 나름대로 괜찮은 편이군.”
“몰디브 정부가 저희를 위해서 여러모로 신경을 많이 써 주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그래야 하겠지. 그건 그렇고, 도청이나 감청에 안전하겠지?”
“정보국에서 꼼꼼하게 점검해 봤는데, 아무 이상이 없었습니다.”
“알았어. 내가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야, 테러범들이 자네한테 몸값을 요구하지는 않았나?”
안타깝게도 몸값은 자기가 먼저 얘기를 꺼냈고, 비자금으로 모아 놓은 15억 달러를 주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 얘기는 목에 칼이 들어오는 한이 있더라도 입 밖으로 끄집어 낼 수 없었다.
“당연히 요구했습니다만, 제가 주지 못하겠다고 버텼습니다.”
“그게 사실이야?”
“네, 그렇습니다.”
자오린 부총리의 목소리에는 의심이 한가득 실려 있었다.
천유런 외교부장은 테러범 대장에게 가슴팍을 얻어맞은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웃옷을 위로 걷었다.
그러고는 가슴에 멍든 상처를 그에게 보여 주었다.
“그 상처는 뭔가?”
“테러범 두목 놈이 저를 발로 걷어찬 흔적입니다.”
“꽤 아프겠는데? 그 상처뿐인가?”
“네. 천운이 닿아서인지, 테러범 놈들 중에 하나가 지하실로 뛰어 들어오면서 비상사태가 발생했다고 외치는 덕에 이 정도에서 멈춘 겁니다. 그 이후는 아까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천만다행이었군. 이제 테러범들 얘기는 그만하고 이제 루퍼트 장관과의 협상 전략에 대해서 대화를 나눠 보자고.”
‘휴우, 다행이다.’
무사히 고비를 넘긴 천유런 외교부장은 아무도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루퍼트 장관이 몰디브에 비밀리에 입국한 이유를 알아봤나?”
“제가 이곳에 도착하는 날에 그자와 만나서 대화를 나눠 봤는데, 케냐와 모잠비크가 저희의 공세에 흔들리지 못하도록 막아 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아차, 루퍼트 회장과의 내기는 어떻게 됐나?”
천유런 외교부장은 이런 질문을 받을 것이라 예상하고 왕지쉰 국장과 이미 말을 맞춰 놓은 상태였다.
“제가 약속 장소에 가지 못하는 바람에 실격패 당했습니다.”
자오린 부총리는 왕쥐신 국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왕 국장은 뭐 했는데?”
“루퍼트 장관에게 전후사정 얘기해 주며 내기가 무효라고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만… 케냐와 모잠비크 부통령까지 합세해서 저를 몰아세우는 바람에 어쩔 수없이 패배를 인정했습니다.”
“아이고, 이거 골치 아프게 생겼군.”
자오린 부총리는 손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생각에 잠겼다.
수세에 몰린 국면을 전환하기 위해서 천유런 외교부장이 급하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부총리님께서 나서서 내기를 무효화시켜 주십시오.”
“뭔가 묘안이라도 있는 거야?”
“내기는 제가 독단적으로 결정해서 진행했기 때문에 우리나라 정부는 절대로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하하하, 그렇게 하면 되겠군.”
침울하던 자오린 부총리의 목소리가 정상으로 돌아오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저도 적극적으로 부총리님을 엄호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라고. 왕 국장, 장 국장과 정보국 요원들의 상태를 확인해 봤나?”
“네, 부총리님. 어제 저녁 무렵에 장 국장을 면회하러 갔는데, 스위트룸에서 편안하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미국 놈들이 장 국장한테 그런 조치를 취한 이유가 뭘까?”
“어차피 장 국장의 숙박비는 저희가 부담해야 하기 때문에 특별한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긴, 그렇겠군. 루퍼트 장관이 나한테 요구할 게 무엇일까?”
“제일 먼저 우리나라 정부의 사과를 요구할 것이고…….”
자오린 부총리는 루퍼트 장관이 또 다른 안가 상황실에서 자신들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었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