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화] Made in Korea
[한 부사장님, 대학교에 에어컨을 설치하는 프로젝트를 다른 나라에도 확대하자는 뜻이겠죠?]
“네, 그렇습니다.”
[날이 밝는 대로 다른 나라에 한 부사장님의 의견을 전달하고, 물량을 취합해서 최대한 빨리 발주하도록 할게요.]
하지만 겨울의 생각은 달랐다.
“실장님, 제 의견을 다른 나라에 전파하고 물량은 취합하시더라도, 지금 당장 에어컨을 발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네? 서둘러야 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부투야 실장의 궁금해하는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대학교 에어컨 설치 프로젝트는 인도와의 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질 때를 대비해 히든카드로 사용할 예정입니다. 만약에 히든카드를 사용하지 않아도 될 것 같으면, Made in Korea 에어컨을 공급해 드리겠습니다.”
[가급적이면 한국에서 생산한 에어컨을 공급받고 싶네요.]
“그렇게 되도록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이제 편히 주무십시오.”
딸깍.
겨울이 전화를 끊자마자,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송훈석 회장이 질문을 던져 왔다.
“한 부사장, 대학교 에어컨 설치 프로젝트가 무엇인지 얘기해 줄 수 있나요?”
겨울은 어떻게 설명해 줄까 짧게 생각한 후, 말을 이어 나갔다.
“이 프로젝트는 콩고민주공화국이 YCM 건설 컨소시엄에게서 기부 받은 25억 달러를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 논의하다가 시작되었습니다. 당시에 저희 사장님은 콩고민주공화국 전역에 산재해 있는 학교에 선풍기를 공급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고…….”
겨울의 설명을 듣고 있던 정상호 사장은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맴돌았다.
대학교 에어컨 설치 프로젝트의 시발점이 호영의 아이디어였기 때문이다.
호영은 입사해서 지금까지 짧은 기간 동안 SH무역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조카라서 머뭇거리고 있었지만, SH무역을 위해서 종횡무진 활약을 펼치고 있는 호영에게 보상을 안겨 주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다.
방법을 논의하기 위해서 옆자리에 앉아 있는 원효석 실장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원 실장, 호영이한테 어떤 보상을 해 주는 게 좋을까?”
“호영 씨를 사장님의 후계자로 공식 지정하는 것이 어떨까요?”
“너무 이른 거 아닐까?”
“호영 씨가 우리 회사에 일감을 얼마나 많이 안겨 줬는지 사장님도 잘 알고 계시잖아요.”
그 점에 대해서는 정상호 사장도 백번 공감했다.
물론 겨울과 은센기 사장의 도움이 컸지만, 호영은 불과 4개월 동안에 무려 85억 달러가 넘는 일감을 수주했다.
그가 수주한 85억 달러의 일감은 SH무역이 지난 10년 동안 매출한 것보다 많은 금액이었다.
그것보다 더 기쁜 일은 호영이 겨울의 둘도 없는 절친이라는 것에 있었다.
이대로 겨울과 좋은 관계를 이어 간다면, 일감이 늘어나면 늘어났지 줄어들 가능성은 없다고 보면 된다.
이에 대한 결과로 SH무역은 대한민국에서 아무도 넘볼 수 없는 무역 회사로 우뚝 솟아오를 것이 확실하고.
짧게 생각을 끝내고 원효석 실장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원 실장, 호영의 직위는 무엇이 좋을까?”
“이사가 적당할 것 같습니다.”
“사원을 이사로 승진시키면 직원들이 반발하지 않을까 모르겠네?”
“사장님, 호영 씨는 SH무역의 후계자입니다. 남들과 똑같은 잣대를 들이댈 필요는 없습니다.”
“알았어. 5월 1일자에 이사로 승진시키도록 하자고.”
“네, 사장님.”
두 사람이 소곤대는 동안에도 겨울의 설명은 계속됐다.
“…대학부터 설치해 보고, 효과가 좋으면 모든 학교에 확대설치 하는 것으로 결정한 상태입니다.”
“아프리카 국가들은 전기가 매우 부족한 상황입니다. 따라서 대한전자는 초절전 에어컨을 공급해야 할 것입니다.”
겨울의 뒤를 이어서 하도진 실장이 한마디 보탰다.
“한 부사장, 전국의 학교에 에어컨을 설치하려면 비용이 상당히 많이 투입될 텐데, 아프리카 국가들이 예산을 확보할 수 있을까요?”
“그 점에 대해서는 제가 대신 말씀드리겠습니다.”
겨울보다 정명훈 사장의 입이 먼저 열렸다.
“네, 얘기해 보세요.”
“저희 H&J Investment에서는 아프리카 국가들의 교육 인프라 구축 사업에 적극 투자할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았어요. 우리도 아프리카 국가에 초절전 에어컨을 염가에 공급하도록 할게요.”
“그래 주시면 더욱 감사하겠습니다.”
시계를 쳐다보고 있던 신지훈 실장이 발언권을 요청하고 입을 열었다.
“지금 12시 30분이 넘었습니다. 아직 토론할 것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에 간단하게 점심 식사하고 오후에 회의를 속개했으면 합니다. 여러분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좋습니다.”
“회사 근처에 설렁탕 전문점 집을 예약해 놓았습니다. 그곳에서 식사하고 한 시간 뒤에 다시 만나겠습니다.”
점심 식사 장소로 이동하던 송훈석 회장은 느닷없이 서동호 실장에게 물었다.
“서 실장, 호영 씨의 생활 수준은 어때?”
“부모님이 강원도 영월에서 농사짓고 있습니다만, 갑자기 왜 묻습니까?”
“호영 씨가 우리 회사에 얼마나 큰 도움을 줬는지 몰라서 하는 소리야?”
즉, 호영에게 보상을 해 주라는 얘기였다.
“회장님, 이번 기회에 호영 씨와 한 부사장의 부모님 집에 가전제품을 최신형으로 바꿔 주는 게 어떨까요?”
“반대할 게 분명하니까, 두 사람이 절대로 눈치채지 못하도록 추진하라고.”
“그야 물론입니다.”
“그나저나 한 부사장의 집에 인테리어를 도와준 건 어떻게 됐어?”
“한가을 씨와 통화해 봤는데, 별다른 문제없이 잘 넘어갔답니다.”
“우리가 3,000만 원을 괜히 청구한 게 아닐까?”
“만약에 저희가 무상으로 제공했으면, 한 부사장이 화를 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알았어. 그 문제는 더 이상 언급하지 말자고.”
한편, 겨울도 가쿠타 부장과 대화를 나누며 식사 장소로 이동하고 있었다.
“부사장님, 지난주에 이상한 일이 있었습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얘기해 보세요.”
“토탈의 움티카 실장이라는 사람한테서 전화를 받았는데, 대한전자에서 생산하는 최신형 핸드폰 20만 대를 구입할 예정이라고 했습니다. 혹시 알고 계신 것이 있습니까?”
“아니요.”
“그럼 장난전화인 보네요.”
“가쿠타 부장님, 움티카 실장님의 핸드폰 번호를 알고 있습니까?”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이 말과 함께 가쿠타 부장이 핸드폰을 꺼내 번호를 보여 주었다.
겨울은 자신의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는 움티카 실장의 전화번호와 대조해 보았다.
정확하게 일치하는 전화번호.
호기심 해결을 위해서 움티카 실장에게 전화해 보려다 멈칫했다.
프랑스는 이제 겨우 새벽 5시 40분을 넘었을 뿐이었으니까.
겨울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가쿠타 부장이 말을 걸어왔다.
“부사장님, 장난전화가 아니었습니까?”
“그런 것 같네요.”
“토탈이 저희 회사를 통해서 핸드폰을 구입하려는 이유가 뭘까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뒤를 따르던 하도진 실장은 지난주 월요일 오후의 일을 기억에 떠올렸다.
토탈 본사 회의실에서 YCM 건설 컨소시엄과의 협상을 순조롭게 마무리 지은 후, 문두야 부통령 등과 함께 철도 건설 프로젝트에 대한 후속 대책을 논의할 때였다.
철도 건설 프로젝트와 관련이 없는 뿌요네 회장과 움티카 실장이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는데, 분명 자신들의 회사와 관련된 내용이었다.
뿌요네 회장의 입에서 H&J 컨설팅이란 말이 언급되었기 때문에.
두 사람이 어떤 내용으로 대화를 나누는지 귀담아들어 보려 했지만, 워낙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눴기 때문에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다만, 개업 축하 선물이라는 단어는 확실하게 알아들었다.
느낌상 뿌요네 회장은 H&J 컨설팅의 창립 기념 선물로 최신형 핸드폰을 구입해 줄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추리를 끝낸 하도진 실장은 두 사람에게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부사장님, 토탈이 최신형 핸드폰 20만 대를 구입하려는 이유를 제가 알고 있습니다.”
“빨리 말씀해 보세요.”
“토탈은 저회 회사의…….”
하도진 실장은 당시의 상황과 방금 전의 추리한 내용까지 간략하게 옮겼다.
“토탈이 저희에게 창립 기념 선물을 주려는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한 부사장, 무슨 일이야?”
앞서 걸어가던 정명훈 사장까지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점심 식사 시간 동안에도 여럿이 그 문제를 가지고 추리해 봤지만, 모두들 ‘이유가 뭘까’라는 벽에 부딪혀서 제자리로 돌아왔다.
H&J 컨설팅 회의실.
각자 정해진 자리에 앉자마자, 송훈석 회장이 제일 먼저 궁금증을 드러냈다.
“한 부사장, 뿌요네 회장에게 전화해 보는 게 어떨까요?”
“저도 그러고 싶은데, 프랑스는 이제 아침 6시 30분입니다.”
“뿌요네 회장은 잠이 없다고 들었으니까, 전화해 보셔도 될 겁니다.”
“알겠습니다. 일단 저질러 보겠습니다.”
짧게 대답한 겨울은 뿌요네 회장에게 곧바로 전화 걸었다.
[한 부사장님, 이른 아침부터 어쩐 일입니까?]
“회장님께 긴급으로 여쭤볼 것이 있어서 연락드렸습니다.”
[무엇이 궁금한지 얘기해 보세요.]
“사실은 지난주에 저희 회사 직원이 움티카 실장으로부터…….”
겨울은 부투야 실장에게 들은 얘기를 사실 그대로 전달했다.
단, 자신들이 추리한 내용은 언급하지 않았다.
[아, 그거요? 해리슨 상원의원이 H&J 컨설팅의 개업 선물을 부탁해 와서 핸드폰을 발주하려는 겁니다.]
“회장님, 20만 대라면 엄청난 양인데, 꼭 필요합니까?”
[우리 회사 창사 기념 선물로 직원들한테 나눠 줄 예정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견적서를 보내 드리겠습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나저나 인도 정부와의 TTM은 언제쯤 시작할 것 같습니까?]
“아직 정확하게 확정되지 않았습니다만, 5월은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딸깍.
겨울이 전화를 끊자, 이번에도 송훈석 회장이 제일 먼저 질문을 던져 왔다.
“한 부사장, 우리 대한 전자의 최신형 핸드폰을 공급하면 되겠죠?”
“물론입니다. 저희는 대한 그룹의 유럽 법인을 통해서 토탈에 핸드폰을 공급하도록 하겠습니다.”
“하하하, 고마워요.”
송훈석 회장이 환하게 웃으며 만족한 심기를 드러냈다.
핸드폰과 관련한 대화가 마무리 됐다고 판단한 신지훈 실장은 재빨리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오후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선풍기 공급 방안에 대해서 토의하도록 하겠습니다. 스크린을 주목해 주십시오.”
팟.
회의실의 조명이 꺼지고 스크린에 각 나라별 선풍기 발주 수량이 표시되었다.
스탠드형 선풍기는 모두 300만 대, 벽걸이형 선풍기는 모두 180만 대라는 글자가 비춰졌다.
“정 사장님, 선풍기 480만 대를 올해 안에 공급할 수 있습니까?”
정상호 사장은 점심 식사 시간에 선풍기 제조업체 사장들과 통화한 내용을 떠올리며 신지훈 실장의 질문에 대답했다.
“350만 대는 납기를 준수할 수 있지만, 케냐가 발주한 130만 대는 납기를 한 달 정도 연장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케냐 측과 상의해서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선풍기 제조업체와 생산 일정을 확정해야 하니까, 최대한 빨리 컨펌해 주십시오.”
“만약에 케냐 측에서 불가입장을 보이면, 플랜 B는 수립해 놓고 있습니까?”
“베트남과 태국에서 선풍기를 수입해서 공급할 생각입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정명훈 사장이 발언권을 요청했다.
“신 실장, 루사토 부통령님께 선풍기가 ‘Made in Korea’라는 점을 강력하게 어필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이제 운동화 공급방안에 대해서 토론해 보겠습니다.”
― 콩고민주공화국 500만 켤레, 탄자니아 400만 켤레, 우간다 200만 켤레, 케냐 400만 켤레.
정상호 사장은 운동화만큼은 국산을 고집하지 않기로 했다.
국산 운동화의 가격이 동남 아시아산 운동화보다 턱없이 비쌀 뿐 아니라, 생산 능력 또한 한참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베트남과 미얀마에서 생산한 운동화를 콩고민주공화국 등에 공급할 생각이었으나, 이에 대한 결정권은 자신들이 아닌 H&J 컨설팅이 가지고 있었다.
그는 발언권을 요청하고 현재 상황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한 후, 의견을 구했다.
“…두 나라에서 생산한 운동화를 공급했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