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음식은 나눠먹을 때 맛있습니다
H&J 컨설팅 회의실.
약속된 10시 30분이 조금 안 된 시간에 송훈석 회장이 일행들과 함께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가 비어 있는 자리에 앉자마자, 시계를 쳐다보고 있던 신지훈 실장이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H&J 컨설팅에서 정명훈 사장님의 비서실장직을 수행하고 있는 신지훈이라고 합니다. 본격적으로 회의를 시작하기 전에 당부의 말씀을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회의 시간에 대화들은 외부로 유출되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점을 반드시 유의해 주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이제부터 콩고민주공화국, 탄자니아, 우간다, 케냐가 발주한 품목들에 대한 공급 방안에 대해서 토론하도록 하겠습니다.”
케냐라는 말이 언급되자, SH무역의 임진택 부사장은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가슴에 손을 가져갔다.
지난주 토요일 오후에 은센기 사장한테 받은 발주서에는 케냐를 제외한 세 나라의 발주 물량만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자신들은 세 나라가 발주한 물량에 대한 계획만을 수립했다.
그런데 케냐가 포함되어 있단다.
자신들이 수립한 계획보다 일감이 많아질 것만은 확실한 사실.
일단 일감이 얼마 정도 되는지 파악해 보는 것이 급선무였다.
“신 실장님, 케냐가 발주한 물량이 많습니까?”
“탄자니아와 비슷하거나 그보다 많은 수준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이고야…….”
정상호 사장을 포함한 SH무역의 임직원들이 즐거운 탄식을 내뱉었다.
신지훈 실장도 그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지만, 지금은 해 줄 말이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 모두 지혜를 짜내면 좋은 방법이 도출될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제 스크린을 주목해 주십시오.”
팟.
회의실의 조명이 어두워지고 스크린에 ‘아프리카 4개국 발주 현황’이라는 제목의 장표가 비춰졌다.
“콩고민주공화국을 비롯한 네 개의 나라가 발주한 물량은 저희 H&J 컨설팅이 H&E 트레이딩과 대한 그룹 아프리카 법인을 통해서 공급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결제 조건은 계약과 동시에 양도 가능한 SBLC로 결정됐습니다. 저희가 SBLC를 수취하는 즉시, 해당되는 금액만큼 각 회사에 양도해 드리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납기는 올해 말까지입니다. 먼저 케냐가 단독으로 발주한 물량부터 논의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다음 장을 보시겠습니다.”
― 콜레라를 비롯한 전염병 치료제 : 5억 달러
장표 내용을 보자마자 정상호 사장이 제일 먼저 발언권을 요청하고 입을 열었다.
“우리나라 제약 회사들은 저희와 계약한 전염병 치료제를 생산하기 위해서 공장을 24시간 풀가동하고 있습니다. 케냐가 발주한 5억 달러 상당의 전염병 치료제는 인도 측에 넘기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때, 정명훈 사장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무언가가 있었다.
“정 사장님, 나이지리아 등이 추가로 발주한 50억 달러 상당의 의약품 건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50억 달러 상당의 의약품 수출 건은 저희와 대한제약 측이 7대3 비율로 나눈 상태이고, 인도 제약 회사들과 비밀리에 접촉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추가 발주 건은 인도 정부 측에서 눈치채면 곤란한 거 알고 계시죠?”
“절대로 그럴 일은 없으니까, 염려 붙들어 매셔도 됩니다.”
겨울은 정상호 사장의 설명이 이해되지 않았다.
인도 제약 회사들이 50억 달러 상당의 의약품을 발주 받으면, 엄청난 규모 때문이라도 인도 정부가 발주처를 파악해 보려 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발주처가 SH무역과 대한제약이라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알아낼 것이다.
그 사실을 정상호 사장도 알고 있을 것이 빤한데, 인도 정부가 눈치채지 못할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었다.
겨울은 조용히 발언권을 요청하고 그 이유를 물었다.
“인도 제약 회사들과 비밀리에 접촉하고 있는 사람들은 저희가 고용한 미국과 유럽의 에이전트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의약품을 유럽과 미국으로 수출하는 것이라 알게 될 것입니다.”
“나중에 밝혀지면 인도 정부에서 저희한테 뭐라고 하지 않을까요?”
정상호 사장은 인도 정부가 자신들을 원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거래 금액이 큰 비즈니스의 경우에는 계약에 골인하기까지 수많은 고비를 넘긴다.
가장 큰 이유는 바이어가 막강한 바잉파워를 앞세워서 셀러를 길들이려 하기 때문이다.
바이어의 갑질을 이겨 낸 셀러만이 계약이라는 열매를 딸 수 있다는 뜻인데, 계약 조건이 멀쩡할 리 없었다.
이에 반해서 자신들은 셀러에게 갑질을 행사하지도 않았고, 거래 조건도 상당히 후하게 제시한 상태였다.
“저희가 인도 제약 회사들을 신사적으로 대하고 있기 때문에 그 정도 거짓말은 이해하고 넘어가 줄 겁니다.”
“정 사장님, 나이지리아를 포함한 일곱 개 나라가 수출하는 자원을 인도가 수입해 준다는 점을 감안하시고, 제약 회사들에게 갑질을 행사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야 물론입니다.”
“이제 신 실장님과 계속 말씀 나누십시오.”
궁금증을 해소한 겨울이 2선으로 물러나고, 그 자리를 신지훈 실장이 차고 들어왔다.
“정 사장님, 인도 제약 회사들이 납기를 맞춰 줄 수 있다고 합니까?”
“저희가 지금까지 인도 회사들과 비즈니스를 진행한 경험에 따르면, 말로는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반대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에 대한 대책은 있습니까?”
“계약서를 작성할 때 페널티 조건을 삽입하면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케냐가 발주한 전염병 치료제는 SH무역과 대한제약이 책임지고 공급해 주는 것으로 알고 있겠습니다. 이제 다음 장표를 보시겠습니다.”
― 정수기 : 800,000대
SH무역에서 정수기 수급을 책임지고 있는 구명수 전무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현재, 콩고민주공화국을 포함한 세 나라에서 발주 받은 정수기 270만 대를 공급하기 위해서 대한민국에 소재하고 있는 정수기 제조 회사들을 모두 동원한 상태였다.
그런데 또 80만 대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연말까지 정수기 80만 대를 케냐에 공급하는 것은 무리였다.
“신 실장님, 케냐 측에 납기를 두 달 정도 연장해 달라고 요청할 수 있습니까?”
“최악의 경우에는 그렇게 하겠지만, 상황이 그 정도로 심각한 상황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가쿠타 부장이 손을 들어서 발언권을 요청했다.
“제 한국어 실력이 부족해서 영어로 말씀드리는 점을 이해해 주십시오. 아프리카 시장에 정수기를 제일 많이 판매하는 나라는 독일, 중국, 미국, 일본 순입니다. 이들 나라에서 정수기를 구입해서 케냐에 공급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정명훈 사장이 장대산 부사장에게 말을 걸었다.
“해인스 상무부장관께 도움을 요청해 보는 것이 어떨까?”
장대산 부사장은 정명훈 사장의 의도를 단숨에 캐치했다.
중국이 케냐와 결별하는 순간, 아프리카 대륙에서 중요한 교두보 하나를 잃게 되는 셈이다.
그렇게 되면 수혜를 입는 쪽은 미국.
정명훈 사장은 그에 대한 선물로 케냐에 미국산 정수기를 저렴한 가격으로 공급해 달라고 요청할 생각인 것이다.
미국은 옳다구나 하며 자신들의 제안을 수용할 가능성이 높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장대산 부사장은 자신을 지켜보는 사람들 눈을 피해 밖으로 나가 해인스 장관에게 전화 걸었다.
[장 부사장이 이 늦은 시간에 어쩐 일인가?]
“장관님, 긴급한 부탁이 하나 있어서 연락드렸습니다.”
[어떤 부탁인지 얘기해 봐.]
“미국이 공을 들이고 있는 케냐에서 저희 회사에 정수기 80만 대를…….”
장대산 부사장은 현재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장 부사장의 부탁은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지만, 궁금증 하나만 해소시켜 줄 수 있나?]
“네. 말씀하십시오.”
[케냐 정부가 정수기 80만 대를 수입하기 위해서는 최소 2억 5,000만 달러가 필요한데, 그 정도로 많은 예산이 있을까?]
“케냐 정부는 얼마 전에 중국의 완커건설로부터 40억 달러를 기부 받았습니다.”
[그놈들이 왜?]
해인스 장관의 궁금해하는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서 쩌렁쩌렁 들려왔다.
“5년 전에 탄자니아, 케냐, 우간다를 연결하는 철도 건설 프로젝트를 추진하다가, 자금 확보가 어려워서 중단된 적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 저희 회사가 자금을 지원하기로 결정했고, 완커건설은 철도 건설 프로젝트를 수주해 볼 욕심으로 세 나라에 기부라는 형식을 빌어서 80억 달러를 뇌물로 전달한 상태입니다.”
[그 돈을 빌미로 완커건설이 철도 건설 프로젝트를 수주하는 것은 아니겠지?]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알았네. 정수기 80만 대는 우리나라가 책임지고 공급해 줄게.]
“SH무역의 정상호 사장님께 장관님의 연락처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하고, 이곳은 한밤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 좋겠어.]
즉, 나중에 전화하라는 의미였다.
“네, 알겠습니다.”
회의실로 돌아온 장대산 부사장은 해인스 장관과의 통화 내용을 간단하게 언급했다.
“…해인스 장관님의 연락처는 회의가 끝나는 즉시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의 설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정상호 사장이 질문을 던졌다.
“장 부사장님, 미국 기업이 손해를 감수하고 저희에게 정수기를 공급하려 할까요?”
“미국 상무부장관의 말은 가볍지 않습니다.”
“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가 중단된 틈을 타서 신지훈 실장이 회의 진행을 위해서 입을 열었다.
“이제 다음 장표를 보겠습니다.”
― 최신 사양의 컴퓨터 : 100,000대
임용식 대한전자 사장은 컴퓨터 공급을 책임질 유석균 이사와 모니터 공급을 책임질 최홍주 이사와 함께 이곳으로 오면서 대책을 논의했고, 그럴싸한 아이디어를 생각해 놓은 상태였다.
그는 자신 있는 모습으로 손을 높게 들어 발언권을 요청했다.
“컴퓨터와 모니터는 저희 회사가 책임지고 납기 안에 공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임 사장, 대책이 있습니까?”
어느 누구보다도 송훈석 회장의 입이 먼저 열렸다.
“네, 회장님. 컴퓨터와 모니터 생산에 필요한 부품들을 인도 공장에 보내서 생산할 예정입니다.”
“하하하, 그렇게 하면 되겠군요.”
근심걱정을 덜었다는 듯 송훈석 회장이 환하게 웃었다.
반면, 정명훈 사장은 궁금한 것이 생겼다.
대한전자는 중국, 태국, 인도, 베트남들에 공장을 보유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인도 공장에서 컴퓨터와 모니터를 생산할 것처럼 얘기하고 있었으니까.
숨은 의도가 있는 것 같아서 임용식 사장에게 물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인도 정부에 생색내기 위함입니다.”
“어떤 방법으로 생색내신다는 말씀입니까?”
“컴퓨터와 모니터를 각각 10만 대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잔업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공장 근로자들한테 인건비를 조금이나마 늘려 주겠다는 뜻.
“임 사장님, 컴퓨터와 모니터를 생산하는 데 얼마 정도 기간이 걸릴까요?”
“아무리 늦어도 3개월이면 충분할 겁니다.”
“인도 정부에 생색내기 위해서는 3개월은 너무 짧은 것이 아닐까요?”
“그런 점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겨울의 머릿속에 기발한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다.
하지만 그 아이디어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전제 조건이 하나 있었다.
일단 저질러 보고 나중에 뒷수습하기로 결정 내렸다.
“임 사장님, 인도 공장에서 에어컨도 생산합니까?”
“물론입니다.”
“알겠습니다.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임용식 사장과 대화를 중단한 겨울은 누군가에게 전화 걸었다.
[…네, 한 부사장님.]
자다가 전화를 받았는지, 부투야 실장의 목소리에서 잠이 뚝뚝 떨어졌다.
“부투야 실장님, 주무시는 중에 죄송합니다. 긴급으로 확인해 볼 것이 있어서 연락드렸습니다.”
[말씀해 보세요.]
“대학교에 에어컨을 설치하는 프로젝트는 언제부터 시작할 예정입니까?”
[지금 현황을 파악하고 있는 중이기는 합니다만…….]
묻는 이유를 파악하기 위해서 부투야 실장이 의도적으로 끝말을 흐렸다.
“사실은 콩고민주공화국이 발주하는 에어컨을 대한전자 인도 공장에서 생산할 예정입니다.”
[인도 정부에 생색내기 위한 목적인가요?]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부투야 실장의 안목은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뛰어났다.
“실장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하하, 알았어요. 최대한 빨리 발주하도록 하겠습니다.]
“실장님, 음식은 나눠 먹을 때 맛있다는 말을 알고 계십니까?”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