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산 넘어 산
윙윙―
부투야 실장이 장담한 대로 불과 10분이 지나지 않아서 정명훈 사장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케냐의 루사토 부통령과는 처음 통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특별히 예의를 갖출 필요가 있었다.
정명훈 사장은 가벼운 헛기침으로 목을 풀어 주고, 천천히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안녕하십니까, 윌리엄 루사토 부통령님. 저는 H&J 컨설팅의 대표이사인 정명훈 사장입니다.”
[저 역시 반갑습니다, 정 사장님.]
“케냐는 지금 새벽 시간일 텐데, 통화하기 괜찮습니까?”
[정 사장님한테 걸려온 전화는 24시간 아무 때고 받을 테니까, 통화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연락 주십시오.]
역시 기부금 40억 달러의 위력은 확실히 강했다.
“제가 루사토 부통령님과 통화하고 싶은 이유는 인도에 자원을 수출하는 건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부투야 실장님께 엄청나게 시달렸습니다. 이유 불문하고 정말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아무리 늦어도 한국 시간 기준으로 오늘 오후 6시까지 인도에 수출할 자원들의 리스트를 보내 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정 사장님, 우리나라에 40억 달러를 기부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수화기를 통해서 들려오는 루사토 부통령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루사토 부통령님, 케냐 정부에 40억 달러를 기부한 회사는 저희가 아니라 중국의 완커건설입니다.”
[천쥐펑 부회장이 우리나라에 기부하도록 유도하신 분은 정 사장님과 한겨울 부사장님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순간, 정명훈 사장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완커건설 컨소시엄은 해가 서쪽에서 뜨지 않는 한, 탄자니아, 케냐, 우간다를 연결하는 철도 건설 프로젝트를 절대로 수주할 수 없다.
철도 건설 프로젝트가 대한건설 컨소시엄으로 넘어가는 순간, 완커컨설 컨소시엄은 수주 실패에 따른 책임을 놓고 격렬하게 다툴 것이 확실했다.
당연히 기부금 80억 달러에 대해서도 책임 공방이 벌어질 것이고.
더 깊숙이 파고들어 가다 보면, 자신들이 배후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챌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완벽한 알리바이를 위해서 루사토 부통령의 입을 막을 필요가 있었다.
“루사토 부통령님, 기부 건과 관련해서 히스토리를 알고 있는 사람이 몇 분인지 알려 주실 수 있습니까?”
[대통령님과 저밖에 모르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중국 정부에서 대통령님과 부통령님의 핸드폰 통화 내용을 도감청할 수 있으니까, 각별히 주의 부탁드립니다.”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에 미국 정부에서 도감청이 불가능한 핸드폰을 대통령님을 포함해서 정부 고위관료들에게 나눠줬습니다.]
일대일로 프로젝트와 관련해서 중국이 아프리카 대륙에서 제일 공을 많이 들이는 나라는 단연코 케냐일 것이다.
가장 큰 이유는 ‘아프리카의 뿔’(에티오피아, 소말리아, 지부티가 자리 잡고 있는 아프리카 북동부를 가리키는 용어)의 바로 아래 위치한 천혜의 항구인 몸바사가 있기 때문이다.
몸바사 항구는 아프리카 대륙과 아시아를 연결해 주는 주요 교통로로 예전부터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던 곳이었다.
중국도 이 점을 고려해서 케냐에 제일 먼저 진출했을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중국이 애지중지 다루고 있는 케냐가 일대일로 프로젝트에서 탈퇴할 생각을 가지고 있단다.
만약에 이것이 사실이라면 중국은 콩고민주공화국을 포함한 다섯 개 나라와 결별할 때보다 더 큰 대미지를 입을 것이 확실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케냐와 중국 정부 사이의 문제였기 때문에 관여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정 사장님, 우리나라는 멀지 않은 장래에 중국과 결별할 예정입니다. 그 후에 우리나라에 적극 투자해 주십시오.]
“그 점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마십시오.”
[인도 정부와의 TTM 일정이 확정되면 연락해 주십시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몰디브에서 뵙겠습니다.]
딸깍.
정명훈 사장이 전화를 끊자, 마음 급한 김윤중 전무가 말을 걸어왔다.
“사장님, 루사토 부통령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오늘 저녁 6시까지 자원 리스트를 보내 준다고 합니다.”
“정말 다행이네요.”
“케냐가 인도에 수출하기를 원하는 자원 물량이 예상보다 훨씬 많아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김윤중 전무는 케냐 정부가 일주일이 넘도록 자원 리스트를 보내오지 않은 이유를 이제야 확실하게 파악했다.
그들도 중국 정부가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는 일대일로 프로젝트에서 탈퇴할 계획을 가지고 있는 것이리라.
인도에 수출할 자원들의 현황 파악을 중국 정부에 들키지 않기 위해 비밀리에 움직이느라고 시간이 걸리는 것이었고.
“사장님, 케냐가 일대일로 프로젝트에서 언제쯤 탈퇴할 것으로 예상하십니까?”
정명훈 사장은 김윤중 사장의 날카로운 통찰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에게 케냐가 인도에 수출하는 자원 물량이 많아질 수 있다는 얘기밖에 언급하지 않았는데, 케냐가 일대일로 프로젝트에서 탈퇴할 예정이라는 사실까지 유추해 냈으니.
그의 날카로운 식견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질문에 대답했다.
“저도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다음 달 중에 결판날 것 같습니다.”
“가뜩이나 바쁜데, 앞으로 더욱 바빠질 것 같네요.”
“어쩔 수 없지요, 뭐.”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승훈 상무가 발언권을 요청했다.
“사장님, 투자분석 검증팀의 인원을 늘렸으면 좋겠습니다.”
“장 부사장이 인원을 충원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으니까, 조만간에 가시적인 결과가 있을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제가 언제나 말씀드렸듯이 우리들이 나눈 대화가 외부로 흘러나가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네, 사장님.”
* * *
같은 시각.
SH무역의 정상호 사장은 H&J 컨설팅과의 회의를 위해서 호영, 원효석 실장과 함께 이동하고 있는 중이었다.
“원 실장, 임원들은 따라오고 있나?”
“네, 사장님.”
“H&J 컨설팅 측에서 기다리지 않도록 늦지 말라고 공지했지?”
“아무리 늦어도 9시 50분까지는 H&J 컨설팅의 회의실에 도착하라고 연락해 놓은 상태입니다.”
“알았네. 그런데 말이야, 세 나라가 발주한 물량을 납기 안에 공급할 수 있을까?”
“조금 무리가 따르기는 하지만, 어찌어찌하면 가능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호영아, 은센기 사장이 세부적인 품목 리스트를 보내왔니?”
은센기 사장은 약속대로 지난주 토요일 저녁에 콩고민주공화국, 탄자니아, 우간다가 발주한 선풍기, 운동화, 의류와 관련한 발주서를 보내왔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가 보내온 발주서에는 품목이 세분화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즉시 은센기 사장한테 전화를 걸어서 품목별로 세분화된 발주서를 다시 요청했고, 오늘 아침까지 보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그런데 회의시작 30분 전인 지금까지도 보내오지 않고 있었다.
그에게 전화해서 이유를 물어보고 싶었지만, 콩고민주공화국은 이제 새벽 1시 30분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아직 받지 못한 상태입니다.”
“아무리 늦어도 회의 시작 전까지 보내왔으면 좋겠는데.”
윙윙―
정상호 사장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호영의 손에 들려 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발신자가 누구인지 확인하자마자, 재빨리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은센기 사장님.”
[호영 씨, 늦어서 정말 미안합니다. 조금 전에 메일을 발송했으니까, 확인하십시오.]
“정말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원래대로 하면 어젯밤까지 보내 줄 수 있었는데, 갑자기 케냐가 추가되는 바람에 늦었습니다.]
“네? 케냐가 왜요?”
전혀 예상치 못한 그의 말에 호영이 큰 목소리로 되물었다.
[문두야 부통령님이 그저께 밤에 저한테 전화를 걸어 주셨습니다. 그분께서 케냐의 루사토 부통령님과 통화해 보라고…….]
호영은 은센기 사장의 얘기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케냐가 추가됨으로 인해서 자신들이 수립해 놓은 계획이 무용지물이 될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기 때문이었다.
여유롭게 진행과정까지 세세하세 들을 시간이 없었다.
“은센기 사장님,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 급한 일이 생겨서 그러니까, 나중에 통화하면 안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세요.]
뚝.
호영이 급하게 전화를 끊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정상호 사장이 말을 걸어왔다.
“도대체 어떤 상황이야?”
“은센기 사장이 세분화된 품목 리스트를 보내왔는데, 케냐가 발주한 물량도 포함되어 있답니다.”
“품목과 물량이 얼마나 되는데?”
“아직 모르겠습니다만, 은센기 사장의 성격상 사고를 크게 친 것이 분명합니다.”
“아이고야.”
“사장님, 이 사실을 구두로라도 H&J 컨설팅 측에 알려 줘야 할 것 같습니다.”
“알았어. 빨리 연락해 줘.”
정상호 사장의 허락을 받은 호영은 재빨리 겨울에게 전화 걸었다.
[호영 씨, 도착했나요?]
“지금 가고 있는데, 은센기 사장이 거하게 사고를 친 것 같다.”
[어떤 사고를 쳤는데?]
“은센기 사장이 어제 오전에 문두야 부통령님의 소개로 케냐의 루사토 부통령님과 통화 했단다.”
[혹시… 나이지리아 등이 우리 회사에 발주하던 품목을 알려 준 거 아니야?]
겨울도 은센기 사장의 스타일을 잘 알고 있다는 듯 묻는 목소리가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네 예상이 맞아.”
[아이고, 큰일 났네.]
“조금 있다가 은센기 사장이 보내온 메일을 전송해 줄 테니까, 참고해라.”
[알았어. 빨리 보내 줘.]
딸깍.
겨울이 통화를 끝내자마자, 하도진 실장이 재빨리 질문을 던져 왔다.
“부사장님, 지금 어떤 상황입니까”
“케냐가 우리 회사에 전염병치료제를 포함해서 여러 가지 품목을 발주한 것 같습니다.”
“아이고.”
예상한 대로 하도진 실장의 입에서도 탄식부터 나왔다.
사무실까지 다녀올 시간이 없다고 판단한 겨울은 급하게 정명훈 사장에게 말을 걸었다.
“사장님의 노트북을 사용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알았어.”
정명훈 사장의 책상 앞에 앉은 겨울은 호영이 보내온 이메일을 클릭하고, 첨부 파일 내용을 확인했다.
― 콜레라를 비롯한 전염병 치료제 : 5억 달러.
― 정수기 : 800,000대
― 최신 사양의 컴퓨터 : 100,000대
― 스탠드형 선풍기 : 콩고민주공화국 100만 대, 탄자니아 80만 대, 우간다 50만 대, 케냐 70만 대
― 벽걸이형 선풍기 : 콩고민주공화국 50만 대, 탄자니아…….
다른 품목도 문제가 심각했지만, 최신형 컴퓨터 문제가 특히 더 심각했다.
부족한 10만 대는 BK전자에서 공급받으면 되지만, 송훈석 회장에게 허락 받아야 하는 문제가 따른다.
컴퓨터와 관련한 문제는 나중에 생각해 보기로 하고, 일단 인쇄 버튼을 눌렀다.
겨울에게 발주서를 건네받은 정명훈 사장은 황망한 얼굴로 누군가에게 급하게 전화 걸었다.
[네, 정 사장님.]
“서 실장님, 돌발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어떤 상황인지 얘기해 보세요.]
“케냐가 최신 사양의 컴퓨터 10만 대를 발주했습니다.”
[…….]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서동호 실장에게서 아무런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정명훈 사장은 그가 생각을 정리할 동안 잠시 기다려 주는 센스를 발휘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평소보다 무거워진 그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서 들려왔다.
[정 사장님, 지금 회장님과 함께 그곳으로 출발할 테니까, 회의 시작 시간을 30분만 늦춰 주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정명훈 사장은 신지훈 실장에게 지시 내렸다.
“신 실장, 회의는 10시 30분에 시작하는 것으로 합시다.”
“네, 사장님.”
짧은 대답과 함께 신지훈 실장이 핸드폰을 들고 사장실 밖으로 나갔다.
* * *
한편, 정명훈 사장과 통화를 끝낸 서동호 실장은 급하게 송훈석 회장의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서 실장,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회장님, 심각한 문제가 하나 발생했습니다.”
“어떤 문제인데?”
“케냐가 H&J 컨설팅에 최신 사양의 컴퓨터 10만 대를 발주했답니다.”
“아이고, 산 넘어 산이구먼.”
송훈석 회장도 상황의 심각함을 깨달았는지 가볍게 탄식을 내뱉었다.
“10시 30분에 예정된 긴급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지금 출발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임용식 사장을 포함해서 컴퓨터와 모니터를 담당하는 임원도 회의에 참석시켜.”
“네, 알겠습니다.”
“대책은 H&J 컨설팅으로 이동하면서 생각해 보자고.”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