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순수하지 않은 순수한 목적
“…우리가 철도 건설 프로젝트를 수주하기 위해서는 케냐에 내일 중으로 기부해야 할 것 같습니다.”
최성진 부회장은 미치고 팔짝 뛰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기는 철도 건설 프로젝트가 성사되지 않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최대한 뇌물 제공을 늦출 예정이었다.
그런 이유로 천쥐펑 부회장과의 치열한 수 싸움 끝에 케냐 구간을 책임지게 되었고.
그런데 자신의 이런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천쥐펑 부회장이 케냐의 루사토 부통령과 통화되는 순간, 뇌물과 관련한 대화를 주고받을 것이 빤하기 때문에.
이제는 어쩔 수 없이 40억 달러를 뇌물로 제공할 수밖에 없는 상황.
문제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돈이 모두 20억 달러밖에 없다는 점에 있었다.
“천 부회장님, 20억 달러만 빌려주십시오.”
사실 천쥐펑 부회장은 문두야 부통령하고 통화하던 도중에 철도 건설 프로젝트를 독식할 수 있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다.
하지만 시간이 촉박한 관계로 완벽하지는 못한 상태.
일단 최성진 부회장을 숙소로 되돌려 보낸 후, 리스롱 사장과 묘안을 찾아보기로 마음속 결론을 내렸다.
“최 부회장님, 밤이 많이 늦었습니다. 그 얘기는 내일 하는 게 어떨까요?”
최성진 부회장은 천쥐펑 부회장의 의도가 빤히 들여다보였다.
철도 건설 프로젝트를 독차지할 꿍꿍이수작을 부리고 있는 중이리라.
이에 맞대응하기 위해 두뇌를 극한으로 회전시켜 유불리를 따져 보았다.
‘철도 건설 프로젝트가 실현될 가능성은 50% 정도밖에 안 된다 가정하고, 욕심 많기로 소문난 송 회장이 버티고 있으니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자신들이 철도 건설 프로젝트를 수주할 수 있는 확률은 25%가 최대였다.
이렇게 낮은 확률에 40억 달러를 배팅하는 것은 누가 봐도 어리석은 짓이었다.
“아무래도 그게 좋겠네요.”
“내일 오전에는 H&J 컨설팅과 미팅해야 하니까, 오후에 진지하게 대화를 나눠 봅시다.”
“그렇게 합시다.”
“내일 오전에 부투야 실장이 묵고 있는 호텔에서 뵙겠습니다.”
최성진 부회장이 자리를 뜨자, 천쥐펑 부회장은 리스롱 사장과 묘안을 찾기 위한 대화를 즉시 시작했다.
“리 사장, 내 의도가 무엇인지 눈치챘지?”
“부회장님, 저희가 철도 건설 프로젝트를 독식하면, 최 부회장이 가만히 있을까요?”
“그러니까 반발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봐야지.”
“저희가 최 부회장한테 돈을 빌려주는 게 아니라 거꾸로 돈을 빌리는 방법은 어떨까요?”
“왜 그래야 하는지 이유를 설명해 봐.”
“우간다와 탄자니아는 저희가 단독으로 철도 건설 프로젝트를 수주하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쥐펑 부회장은 리스롱 사장의 의도를 이제야 완벽하게 이해했다.
철도 건설 프로젝트를 자신들이 독자적으로 수주하고 YCM건설에 공사를 일부 나눠 주자는 의미였다.
여차하면 최성진 부회장한테 빌린 20억 달러를 되돌려주고 철도 건설 프로젝트를 독식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알았어. 그렇게 하자고.”
“부회장님, H&J 컨설팅에 도로 확포장 공사의 공사비와 공사 기간은 어떻게 제안할까요?”
“이제부터 작전을 수립해 봐야지.”
* * *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난 호영은 샤워를 끝내고 나오는 겨울에게 물었다.
“겨울아, 우리 언제 귀국할 예정이냐?”
“뜬금없이 귀국 일정을 물어보는 이유가 뭐야?”
“귀국 선물을 언제 사야 할지 궁금해서.”
“아차, 귀국 선물이 있었지?”
“그나저나 내가 한 질문에는 언제 대답해 줄 거야?”
“우리 회사와 대한건설 컨소시엄과 계약절차가 남아 있기 때문에 적어도 오늘은 아닐 것 같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식당에 내려오니 양경운 과장과 송지유가 식사 중에 있었다.
“우리 양 과장님과 합석할까?”
반색하는 호영을 향해 겨울이 혀를 끌끌 차며 한마디 했다.
“하여간 너도 정성이다.”
“너는 싫다는 뜻으로 들리는데, 따로 앉든지.”
“누가 싫대.”
자연스럽게 두 사람과 합석하는 데 성공한 호영은 가져온 음식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저희는 오늘 오후에 귀국 선물 사러 외출할 예정인데, 지유 씨도 같이 가실래요?”
사실 송지유는 어제 오후에 틈나는 시간을 이용해서 귀국 선물을 이미 구입해 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호영의 제안을 뿌리치고 싶은 마음은 이상하게도 들지 않았다.
“몇 시쯤 외출할 예정인데요?”
“아직 정확하게 확정된 것은 아닌데, 적어도 오후 서너 시는 되어야 할 것 같아요.”
“알겠어요. 시간을 비워 놓고 있을게요.”
양경운 과장은 그런 송지유를 빤히 쳐다보았다.
자기와 송지유는 어제 오후에 귀국 선물을 이미 구입한 상태.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과 함께 쇼핑하러 외출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둘 중 누군가에게 호감이 있다는 뜻이리라.
누구인지 보나마나 빤하겠지만.
그가 짧은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겨울이 말을 걸어왔다.
“양 과장님, 최준하는 얌전히 지내고 있습니까?”
양경운 과장은 최준하만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그는 최성진 부회장의 질책을 피하기 위해서 스위스로 도망쳤다가 일요일 밤에 돌아왔다.
마지못해 들어온 듯 그는 한동안 눈치를 보더니 최근 또다시 슬그머니 밖으로 나갔다가 아침에 들어오는 게 아닌가.
그때는 최성진 부회장과 하룻밤 함께 잤을 거라 판단하고 가볍게 넘어갔다.
그런데 어젯밤에도 슬그머니 밖으로 나갔고, 조금 전 아침밥을 먹으러 내려오기 직전까지 복귀하지 않았다.
이로 미루어 보면 자기가 불편해서 방을 따로 얻은 것이 분명했다.
“그 인간 얼굴을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숙소를 또 몰래 얻었다는 것인가요?”
“저는 그렇게 판단하고 있어요.”
“하여간 구제불능이네요.”
“이 사실을 조 실장님께 보고해야 하는 게 맞겠죠?”
“최준하가 발뺌할 가능성이 있으니까, 확실한 증거부터 확보해 놓는 게 먼저인 것 같네요.”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그때, 칼리마니 실장이 다가와서 겨울에게 말을 걸어왔다.
“한 부사장님, 문두야 부통령님께서 잠시 뵙기를 원하십니다.”
겨울은 두 분의 부통령에게 전해 주고 싶은 얘기가 있었기 때문에 마침 잘됐다고 생각했다.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저기 보이는 룸에서 무사카 부통령님과 아침 식사 중이십니다.”
겨울이 비어 있는 자리에 앉자, 문두야 부통령과 마사카 부통령이 푸근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한 부사장님, 마자리 대통령님께서 고맙다는 말씀을 전해 오셨습니다.”
“루군다 대통령님도 고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사람은 이미 결론 난 것처럼 인사를 해 오고 있었으나 겨울은 축배를 들기에는 시기상조라고 생각했다
“저는 마무리가 덜 끝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마사카 부통령은 마무리라는 말에 담긴 의미를 단숨에 이해했다.
자신들이 천쥐펑 부회장에게서 기부 증서를 받아 놓지 않는다면, 시한폭탄을 끌어안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뜻.
철도 건설 프로젝트가 대한건설 컨소시엄으로 넘어가는 순간, 기부 건을 문제 삼아서 행동으로 나설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만약에 그가 중국 정부를 등에 업고 자신들에게 시비를 걸어온다면, 최악의 경우 기부 받은 돈을 토해 내야 할 수도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하니 온몸에 솜털이 곤두섰다.
“기부 증서를 받아 놓으라는 말씀이겠죠?”
“네, 그렇습니다. 오늘 오전에 천 부회장은 엄청난 상실감을 체험할 예정입니다. 그의 기분이 좋을 때 최대한 빨리 기부 증서를 받아 놓으십시오. 참고로 저희와 천쥐펑 부회장은 10시에 만나기로 했습니다.”
“아, 무슨 말인지 알았어요.”
무세베니 실장은 주저하지 않고 리스롱 사장에게 전화 걸어서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은 후, 통화를 종료했다.
“어떻게 됐나?”
“한 시간 후에 크리용 호텔 비즈니스 룸에서 천 부회장을 만나기로 했습니다.”
“지금 준비하고 천천히 떠나면 되겠네.”
“가실 때 가시더라도 제 말씀을 마저 듣고 가십시오.”
자리에서 일어서는 두 부통령을 겨울이 불러 세웠다.
“저희한테 할 말이 있습니까?”
“천 부회장을 만나게 되면…….”
문두야 부통령은 겨울이 심계가 깊은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멀리까지 내다보고 있는 줄은 상상조차 못했다.
겨울이 빈틈없이 쳐놓은 거미줄에 걸려서 옴짝달싹 못하는 천쥐펑 부회장이 불쌍할 따름이었다.
“무슨 말인지 알았어요.”
“건투를 빕니다.”
크리용 호텔 비즈니스 룸.
기존에 작성해 놓은 기부 증서 양식이 있었기 때문에 두 명의 비서실장과 리스롱 사장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기부 증서를 만들 수 있었다.
두 명의 부통령과 천쥐펑 부회장은 기부 증서의 내용을 짧게 읽어 본 후, 망설임 없이 사인했다.
완벽하게 마무리를 끝낸 문두야 부통령은 겨울에게 전달받은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서 시동을 걸었다.
“천 부회장님, 케냐의 루사토 부통령님과 통화해 보시겠습니까?”
“그래 주시겠습니까?”
예상한 대로 천쥐펑 부회장이 반색하며 대답했다.
“제가 엉뚱한 사람한테 전화할 수도 있으니까,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영상통화를 시도하는 건 어떨까요?”
사실 천쥐펑 부회장도 그 점에 대해 은근히 걱정하고 있던 중이었다.
문두야 부통령이 자기에게 사기 칠 가능성이 없다고 보장할 수 없었으니까.
그 얘기를 꺼낼 타이밍을 노리고 있었는데, 그가 먼저 말을 꺼내 주니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제안을 덥석 물으면 자기의 생각을 드러내는 꼴.
한 번 정도 거절하는 것이 예의였다.
“문두야 부통령님을 믿지 못하면 세상에 누구를 믿습니까?”
“하하하,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기분이 좋네요. 그래도 확실한 것이 낫겠죠?”
“정히 그러시다면 부통령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문두야 부통령은 씨익 웃으며 루사토 부통령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
[문두야 부통령님, 뜬금없이 영상통화는 뭡니까?]
“루사토 부통령님께 귀한 사람을 소개시켜 주려고 영상통화를 걸었습니다.”
[그분이 누구십니까?]
“중국에 본사를 둔 완커건설의 천쥐펑 부회장님입니다.”
[제가 천 부회장님과 인사를 나눌 이유가 있을까요?]
“사실은 우리나라의 다르에스살람을 출발해서 케냐의 나이로비와 우간다의 캄팔라를 연결하는 철도를 건설 프로젝트에 완커건설이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저는 아직 타당성 검토를 시작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타당성 검토는 곧 시작할 예정이고, 적어도 서너 달이면 완료할 수 있을 겁니다.”
[철도 건설 프로젝트는 국제 입찰을 통해서 시공사를 선정하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저희도 그렇게 계획을 세워 놓았는데, 투자자가 수의계약을 원하고 있습니다.”
천쥐펑 부회장은 문두야 부통령의 발언에서 커다란 힌트를 하나 캐치했다.
투자가 이뤄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타당성 검토절차를 거친다.
수익이 발생하지 않는데 투자할 바보 멍청이는 없을 것이니까.
투자자 물색이 끝나면 투자금액을 확정하고 시공회사를 선정하는 단계로 진행된다.
그런데 문두야 부통령은 타당성 검토조차 시작하지 않았는데, 투자자가 시공 회사를 선정할 방법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었다.
이를 뒤집어 생각하면 타당성 검토는 물론이고, 투자자까지 이미 확보해 놓고 있다는 뜻과 일치한다.
‘문두야 부통령님, 나는 바보 멍청이가 아닙니다.’
천쥐펑 부회장이 자신만의 착각에 빠져 있는 동안에도 두 사람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참고적으로 하나만 말씀드리면, 우리나라와 우간다는 완커건설로부터 각각 20억 달러씩 기부 받았습니다.”
[물론 목적이 있는 기부겠죠?]
“천 부회장님이 작성해 준 기부 증서에는 ‘순수한 목적’이라는 단어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어찌됐든 정말 부럽습니다.]
“이제 천 부회장님을 바꿔 줄 테니까, 통화해 보십시오.”
문두야 부통령한테 핸드폰을 건네받은 천쥐펑 부회장은 루사토 부통령과 화상으로 인사를 나누고 본격적인 대화를 시작했다.
[천 부회장님, 천쥐한 회장님은 잘 계십니까?]
“루사토 부통령님께서 제 형님을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2년 전에 리스롱 사장과 우리나라를 방문하신 적이 있습니다.]
천쥐펑 부회장은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 리스롱 사장에게 고개를 돌렸다.
리스롱 사장은 맞다는 뜻으로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부통령님께서 염려해 주신 덕분에 무탈하게 잘 계십니다.”
[아, 그렇군요.]
“제가 부통령님과 영상통화 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케냐에 기부하려고 합니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