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이중 스파이의 미친 활약
“최 부회장님, 정 사장이 우리가 부릴 꼼수를 알고 있는 것 같지 않았습니까?”
천쥐펑 부회장이 손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최성진 부회장도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호텔로 돌아오자마자 일행들에게 의견을 물어봤으나, 우연의 일치라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래서 가볍게 치부하고 넘어갔는데, 천쥐펑 부회장이 그 얘기를 다시 꺼냈다.
“천 부회장님, 정 사장이 감리 회사를 언급하며 편법 운운했으면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을 겁니다. 그런데 정 사장은 건설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꼼수만 언급했을 뿐입니다.”
천쥐펑 부회장은 하나는 알고 둘을 모르고 있는 최성진 부회장이 진심으로 답답했다.
정명훈 사장이 자신들의 꼼수를 알든 모르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대한건설이 H&J 컨설팅에 제안한 정보를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했다.
정보를 알아내면 고민할 것도 없이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다.
두 건의 공사를 무사히 수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공사금액을 무리하게 제시하지 않고 이익을 극대화시킬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 얘기는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이 얘기를 꺼내는 순간, 최성진 부회장은 도로 확포장 공사에 숟가락을 얹으려고 할 것이 빤하기 때문에.
“만약의 상황을 상정하고 전략을 다시 수립하는 게 어떨까요?”
“그렇게 하십시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설영석 이사를 활용해 보는 건 어떨까요?”
최성진 부회장은 천쥐펑 부회장의 의도를 단숨에 읽었다.
대한건설이 H&J 컨설팅에 제시한 조건을 설영석 이사를 통해서 확인해 볼 생각이라는 것을.
정말 기막힌 아이디어였지만, 아무런 반대급부 없이 선뜻 그의 말에 동의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에 잘못되면, 설 이사의 인생도 종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과연 설 이사가 행동으로 나설까요?”
“수고비로 설 이사에게 1,000만 달러 정도 주는 것은 어떻습니까?”
최성진 부회장은 비록 천쥐펑 부회장에게 10억 달러를 되돌려 받았다고 해도 앙금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일단 설 이사한테 얘기를 꺼내 보도록 하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최성진 부회장은 시선을 옮겨 박철헌 사장에게 말을 걸었다.
“설 이사한테 전화 걸어서 천 부회장의 얘기를 제안해 봐.”
박철헌 사장은 최성진 부회장이 한국어를 사용해서 지시를 내린 이유를 단숨에 눈치챘다.
천쥐펑 부회장에게 바가지를 제대로 씌워 보라는 의미였다.
“부회장님, 큰 것으로 한 장이면 될까요?”
역시 박철헌 사장은 눈치가 백단이었다.
“그 정도면 되겠지.”
“저희는 어떤 대가를 요구하실 생각입니까?”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자고.”
“아차, 철도 건설 공사 건이 있었죠?”
“천 부회장이 들어야 하니까, 영어를 사용해서 통화하고.”
“네, 부회장님.”
짧게 대답한 후, 설영석 이사한테 전화 걸었다.
[네, 사장님.]
“설 이사, 내가 긴급하게 부탁할 것이 있는데, 들어줄 수 있나?”
[부탁 내용이 무엇인지 들어 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잉가 3댐 건설 공사와 도로 확포장 공사와 관련해서 대한건설이 H&J 컨설팅에 어떤 조건을 제시했는지 파악해 줘. 그에 대한 대가로 천 부회장님이 수고비로 1,000만 달러를 주신다고 했어.”
[네?! 그렇게 많이요?]
“이 친구야! 1,000만 달러면 충분한 것 아니야?”
[아, 더 지르라는 말씀이시죠?]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설영석 이사였다.
“에이, 송 회장이 그런 강수를 둘까?”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그럴 가능성이 상당히 높습니다.]
“알았어. 천 부회장님과 상의해서 다시 연락할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뚝.
급하게 전화를 끊은 박철헌 사장은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천쥐펑 부회장에게 말을 걸었다.
“천 부회장님, 설 이사는 지금 송 회장의 잔인함에 대해서 겁을 잔뜩 집어먹고 있습니다.”
“잔인함이라뇨?”
“작년 8월에 콩고민주공화국에서 핸드폰 기지국 업그레이드와 관련한 입찰이 있었습니다. 그때 당시 대한건설의 직원 두 명이 화웨이에 입찰 정보를 몰래 제공했다가 발각되는 바람에 검찰에 구속됐습니다. 두 사람은 현재도 교도소에서 복역하고 있는데, 설 이사는 그 점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음… 그렇다면 설 이사한테 수고비로 1억 달러를 주겠다고 제안해 보십시오.”
“알겠습니다.”
박철헌 사장은 설영석 이사한테 다시 전화를 걸어서 천쥐펑 부회장이 수정한 제안을 알렸다.
[제가 정보를 파악하려면 시간이 제법 걸릴 수 있습니다. 그때까지 기다려 주십시오.]
“너무 오랫동안 기다리게 하지 말라고.”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 * *
같은 시각.
뿌요네 회장의 저택 정원에서는 저녁 식사를 겸한 파티가 흥겹게 벌어지고 있었다.
“정 사장, 최 부회장한테 개망신을 준 이유를 얘기해 주세요.”
서동호 실장이 호기심 어린 눈빛을 반짝이며 물었다.
“최 부회장이 저를 송유관 건설 공사와 관련해서 협상 대표가 아니라, 아랫사람처럼 취급하고 있어서 따끔하게 한마디 해 줬을 뿐입니다.”
“최 부회장의 안하무인 버릇은 언제쯤 고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이제 그 얘기는 그만하시고, 철도 건설 공사 프로젝트에 대해서 잠깐 대화를 나눴으면 합니다.”
“네? 철도 건설 공사 프로젝트라니요?”
서동호 실장보다 송훈석 회장의 입이 먼저 열렸다.
“5년 전에 탄자니아, 케냐, 우간다는 세 나라의 물류 인프라 개선을 위해서, 다르에스살람, 나이로비, 캄팔라를 연결하는 철도를 건설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했습니다.”
정명훈 사장은 문두야 부통령 등에게 들은 얘기를 가감 없이 전달했다.
“조만간에 저희 회사에서는 타당성 검토를 시작해서 긍정적인 결과가 나오면 투자할 예정입니다.”
“그럼 우리도 최대한 빨리 태스크 포스를 구성해야겠네요?”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겨울이 발언권을 요청하고 입을 열었다.
“회장님, 철도 건설 공사 프로젝트는 대한건설이 단독으로 실행하기 어려울 정도로 규모가 큽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VINCH와 컨소시엄을 구성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내일 오전에 페키르 회장과 만나기로 했으니까, 그때 의사를 물어볼게요.”
“만약에 페키르 회장님이 동의하신다면, 태스크 포스부터 참여해 달라고 부탁해 주십시오.”
“그렇게 할게요.”
겨울이 2선으로 물러나고 그 자리를 다시 정명훈 사장이 차고 들어왔다.
“회장님, 도로 확포장 공사와 관련해서 공사 기간과 공사금액은 산출됐습니까?”
“공사 기간은 10년에서 최대 6년까지 단축이 가능하고, 공사금액은 170억 달러까지 가능할 것 같아요.”
“공사금액에 대한건설 컨소시엄의 이익이 포함되어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윙윙―
한창 중요한 얘기가 오고가는 중에 조병석 실장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는 발신자를 확인하자마자 재빨리 통화 버튼을 눌렀다.
“설 이사, 무슨 일입니까?”
[실장님, 조금 전에 박철헌 사장한테 전화 받았습니다.]
“박 사장이 뭐라고 했습니까?”
[잉가 3댐 건설 공사와 도로 확포장 공사와 관련해서 대한건설이 H&J 컨설팅에 제안한 조건을 알아봐 달라고 했습니다.]
“회장님하고 상의해서 연락 줄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요.”
[네, 알겠습니다.]
조병석 실장은 즉시, 설영석 이사와의 통화 내용을 모두에게 알렸다.
“…저희가 모르고 있는 꿍꿍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겨울은 YCM건설 컨소시엄의 꿍꿍이가 무엇인지 단박에 알아챘다.
아마도 정명훈 사장의 엄포에 겁을 집어먹고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서 설영석 이사를 활용할 의도인 것이리라.
마침 잘됐다고 판단 내리고, 발언권을 요청했다.
“저는 그들의 꿍꿍이가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빨리 얘기해 보세요.”
“그들은 저희 회사 사장님의 엄포에…….”
겨울의 설명을 듣고 있던 정명훈 사장은 그제야 긴장감을 누그러뜨리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자신들이 수립해 놓은 전략은 약간 억지스러운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그쪽에서 먼저 움직이는 바람에 다소 불안하던 전략이 필요 없게 되어 버렸다.
이제 새로운 전략이 필요한 시점.
정명훈 사장은 느긋하게 기다렸다.
무리한 방법을 동원하지 않고도 YCM건설 컨소시엄을 얼마든지 포기시킬 수 있는 방법을 겨울이 일러 줄 테니까.
그는 겨울의 설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바로 입을 열었다.
“한 부사장, 우리가 어떻게 대처하는 게 좋을까?”
“설 이사한테 피해가 돌아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중 작전을 사용해야 할 것 같습니다.”
겨울은 거침없이 아이디어를 밝힌 뒤, 각자에게 알맞은 역할을 부여했다.
“…조 실장님은 30분 내로 조건을 수정한 제안서를 만들어서 사진 촬영해 놓으십시오.”
“그렇게 할게요.”
“이 작전의 성패는 사장님께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한 부사장, 나한테 너무 많은 역할을 맡기는 것 아니야?”
말은 그렇게 했어도 정명훈 사장의 입가에는 미소가 배어 있었다.
걱정 말라는 뜻이다.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 분위기 메이커인 하도진 실장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사장님, 부담스러우시면 제가 대신 총대를 멜 생각도 있습니다.”
“이 사람아, 말이 그렇다는 얘기지.”
* * *
설영석 이사는 한 시간 가까이 아무 움직임이 없는 핸드폰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래도 되는 걸까? 아니야. 내가 살려면 어쩔 수 없지.”
윙윙―
자문자답을 끝내고 마음을 다잡은 순간에 핸드폰이 진동했다.
그는 지체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실장님.”
[설 이사, 우리가 H&J 컨설팅에 제안한 내용을 알려 주기 전에 하나만 물어봅시다.]
“네, 말씀하십시오.”
[박철헌 사장이 정보를 알려 달라는 대가로 제시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까?]
“천쥐펑 부회장이 저한테 1억 달러를 준다고 제안했습니다.”
[그 돈을 떼어먹을지 모르니까, 확실하게 받아 내고 정보를 알려 주세요.]
“저도 그러고 싶지만, 해외에 보유하고 있는 제 계좌가 없습니다.”
[메모하세요. 예금주는 장 보아르라는 사람이고, BNP 파리바 은행, 계좌번호는 124―570―1234570입니다. 참고로 예금주는 뿌요네 회장님의 집사 계좌입니다. 입금이 확인되면, 우리나라로 돌아가서 지급해 줄게요.]
“네, 알겠습니다.”
[잘 들어요. 우리가 H&J 컨설팅에 제안한…….]
조병석 실장에게 행동 요령을 지시받은 설영석 이사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박철헌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설 이사, 알아봤나?]
“네. 방금 전에 확인했습니다.”
[빨리 얘기해 봐.]
“사장님, 아시다시피 제가 스파이 짓을 한 사실이 발각되면, 제 인생은 끝납니다.”
[그래서 1억 달러를 보상금으로 준다고 했잖아.]
“먼저 주십시오.”
[…….]
1억 달러를 중간에서 가로챌 생각이었는지, 그에게서 아무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살짝 격앙된 그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서 들려왔다.
[계좌번호 불러.]
“은행은 BNP 파리바이고…….”
설영석 이사는 조병석 실장에게 받은 은행정보를 또박또박 불러 주었다.
[설 이사의 차명 계좌인가?]
“네, 그렇습니다.”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
뚝.
박철헌 사장이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약 10분 정도 지난 후에 1억 달러를 송금했다는 송금 확인증이 문자로 수신되었다.
설영석 이사는 즉시 조병석 실장에게 전화 걸어서 1억 달러가 입금되었는지 확인 의뢰했다.
[입금 됐어요. 이제 자료를 보내 주세요.]
“네, 실장님.”
딸깍.
전화를 끊은 설영석 이사는 조병석 실장에게 전달받은 사진을 박철헌 사장에게 전송했다.
윙윙―
예상한 대로 30초도 지나지 않아서 핸드폰이 진동했다.
“네, 사장님.”
[설 이사, 이게 뭔가?]
“대한건설이 H&J 컨설팅에 제출한 제안서 중에서 중요한 내용 일부를 사진 촬영한 겁니다.”
[하하하, 수고했어.]
“제가 보내 드린 자료가 밖으로 유출되면, 저는 죽은 목숨입니다. 각별히 신경 써 주십시오.”
[그 점에 대해서는 내가 책임질게.]
이제 만약을 대비해서 도망갈 구석을 만들어 놓을 때였다.
“사장님, 제가 보내 드린 자료가 최종 제안서가 아닐 가능성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알았어.]
뚝.
이번에도 박철헌 사장이 먼저 전화를 끊었다.
설영석 이사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겨우 가다듬고 소파에 몸을 파묻으며 행복한 상상에 빠져들었다.
“1억 달러로 뭐 할까?”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