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먹고 나서 생각해 보자고
마사카 부통령은 정명훈 사장이 던진 미끼를 천쥐펑 부회장이 제대로 물었다고 판단했다.
자신들이 조급하게 굴면, 눈치 백단인 그가 물고 있던 미끼를 토해 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이제부터는 시간은 우리 편이라는 마음으로 느긋하게 기다리는 것이 관건이었다.
따라서 철도 건설 프로젝트에 대한 얘기를 이쯤에서 중단하는 것이 맞았다.
화제를 전환하기 위해서 조용히 발언권을 요청하고 말문을 열었다.
“천 부회장님, 저희가 이 자리에 모인 목적은 송유관 건설 공사와 관련한 협상 때문입니다. 철도 건설 프로젝트와 관련한 대화는 한가할 때 나누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마사카 부통령의 제안을 들은 천쥐펑 부회장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송유관 건설 공사를 수주해 봐야 완커건설에 돌아오는 몫은 기껏해야 17억 달러 정도.
이에 반해 철도 건설 프로젝트의 공사 규모는 무려 400억 달러에 달했다.
자신들이 독식하면 좋겠지만, YCM건설과 공동으로 수주한다고 해도 200억 달러 규모의 엄청난 공사였다.
그러니 송유관 건설 공사가 눈에 들어오겠는가.
하지만 당사자 중에 한 명인 마사카 부통령이 제동을 걸어오고 있는 중이었다.
그의 심기를 건드려 봐야 좋은 일은 없기에 한 템포 쉬어 가기로 결정했다.
“네, 알겠습니다.”
“당초 약속대로 저희는 중립을 지켜 드릴 테니까, 정명훈 사장을 제대로 설득해 보세요.”
천쥐펑 부회장은 두 명의 부통령이 자신들의 손을 들어 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비록 기부금이라는 명목으로 포장했지만, 자신들로부터 3억 달러라는 거액의 뇌물을 수수한 사실은 변함이 없으니까.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정 사장님, 우리는 이 자리에 없다고 여기고 YCM 그룹 측과 협상을 시작하십시오.”
마사카 부통령이 자신의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한 후, 뒤로 물러났다.
정명훈 사장은 고맙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송유관 건설 공사와 관련해서 제가 어느 분과 대화를 나눴으면 좋겠습니까?”
사실 최성진 부회장은 기분이 무척 상한 상태였다.
오늘 협상의 주인공은 누가 뭐라 해도 자기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송유관 건설 공사에 완커건설을 끌어들인 장본인이 자기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배은망덕하게도 천쥐펑 부회장은 점심 식사 할 때와 마찬가지로 자리에 앉기 무섭게 대화의 주도권을 날름 가져가 버렸다.
이대로 있으면 존재감이 사라질 것 같은 강한 위기감이 머리를 지배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판단에 따라 재빠르게 행동으로 나섰다.
“정 사장, 나하고 대화를 나누면 될 겁니다.”
사실 정명훈 사장은 최성진 부회장을 처음 만나 점심 식사 할 때부터 기분이 별로였다.
그는 자기를 아직도 대한 그룹 상무라고 여기고 있는 듯, 아랫사람 대하듯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서 사용하며 신경을 긁어 댔다.
조금 전도 마찬가지.
그는 아랫사람을 상대할 때 사용하는 ‘나’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또다시 심기를 건드렸다.
비록 무의식중에 나온 말이겠지만,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었다.
“최 부회장님, 송유관 건설 공사를 수주하기 위해서 대한 그룹의 송훈석 회장님이 이곳에 와 계신 것은 알고 계십니까?”
“알고 있습니다.”
“최 부회장님과 송 회장님이 어떤 사이인지는 모르지만, 대한 그룹의 부회장님이 YCM건설과 완커건설을 위해서 이적 행위를 해도 될까 모르겠네요? 이 사실을 송 회장님께서 알고 계십니까?”
정곡을 찌르는 그의 말에 최성진 부회장은 움찔했다.
아무리 자기가 송훈석 회장과 대척점에 서 있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노골적으로 이적 행위를 하는 것은 누가 봐도 이상할 테니까.
설령 이적 행위를 한다고 해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행동하는 것이 정상인데,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보란 듯이 하고 있었으니.
만약에 자신의 이적 행위가 송훈석 회장의 귀에 들어간다면… 어떤 후폭풍이 닥쳐올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온몸에 솜털이 곤두섰다.
“정 사장, 미안합니다. 내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제 더 이상 대한 그룹의 사람이 아니라, H&J 컨설팅의 대표이사입니다. 사석이든 공석이든 적절한 예의를 갖춰 주십시오.”
“내가 언제…….”
“최 부회장님, ‘내가’라는 단어를 언제 사용하는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순간, 최성진 부회장은 아차 했다.
자기가 은연 중에 정명훈 사장을 얕잡아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에게 밉보여 봐야 득 될 것이 하나도 없는 상황.
자신의 잘못이 맞았기 때문에 이런저런 변명을 늘어놓지 않고 쿨하게 사과하기로 마음먹었다.
“정 사장님, 제가 실언했습니다. 미안합니다.”
“최 부회장님이 저한테 사과한 것에 보답하는 의미로 오늘 일은 송 회장님께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저를 만나지 않았다고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원하신다면 그렇게 해 드리겠습니다.”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최 부회장님, 이제부터 임지태 회장님과 대화를 나누겠습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반면, 천쥐펑 부회장은 은근히 기분이 상했다.
송유관 건설 공사를 수주하기 위해서 자신들도 3억 달러라는 거금을 투자했다.
그런데 정명훈 사장은 자신들을 대화 파트너로 생각하고 있지 않은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자신들의 존재감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정 사장님, 우리 완커건설도 협상에 참여했으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왜 그래야 하는지 이유를 말씀해 주십시오.”
“저희도 송유관 건설 공사를 위해서 탄자니아와 우간다에 3억 달러를 기부했습니다.”
“문두야 부통령님, 마사카 부통령님, 천 부회장님의 말씀이 맞습니까?”
“우리나라는 기부 받은 적이 없습니다.”
“우리 우간다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사람에게 대답을 들은 정명훈 사장은 시선을 천쥐펑 부회장에게 옮기며 무언의 질문을 던졌다.
천쥐펑 부회장은 정말 난감했다.
엄밀하게 말하면, 자신들은 두 나라에 기부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렇다고 힘차게 칼을 뽑아 들었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칼집에 다시 꽂아 넣을 수는 없지 않은가.
“사실 두 나라가 YCM 그룹으로부터 기부 받은 6억 달러의 절반은 저희가 부담한 것입니다.”
“천 부회장님, 우리 입은 비뚤어졌어도 말은 똑바로 합시다. 3억 달러는 두 나라가 아니라 YCM 그룹에 건네준 거잖아요.”
‘그게 그거 아닙니까?’라는 말이 식도를 타고 올라와서 입 안에 머물렀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했다.
철도 건설 프로젝트를 수주하기 위해 정명훈 사장의 심기를 건드려서는 안 되기 때문에.
“정 사장님, 미안합니다.”
“천 부회장님, 이제 임 회장님과 대화를 나눠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십시오.”
천쥐펑 부회장을 향해 크게 한 방 휘두른 정명훈 사장은 임지태 회장과 본격적인 협상을 시작했다.
“임 회장님, 송유관 건설 공사의 개략적인 현황에 대해서 브리핑해 드릴까요?”
“저희도 송유관 건설 공사에 대해서 알 만큼 알고 있기 때문에 굳이 그럴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송유관 건설공사를 수주하기 위해서 대한건설도 뛰어들은 상황입니다. 저희는 대한건설과 며칠 전부터 협상을 진행해 오고 있는 상태이고, 따라서 저희는 그들이 제안한 내용을 알고 있습니다.”
정명훈 사장은 중요한 말을 하려는 듯 잠깐 말을 끊었다가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YCM건설 컨소시엄이 어떤 내용으로 제안하는지 들어 보고 이 자리에서 승자를 결정해 드리겠습니다.”
대부분의 발주 회사는 수주 경쟁에 뛰어든 건설 회사들을 경쟁시켜서 이익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취한다.
때문에 임지태 회장은 오늘은 서로의 입장을 확인하는 정도에서 협상을 마무리할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의 예상과는 달리 H&J 컨설팅은 오늘 당장 승자를 결정할 생각이란다.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는 그 즉시 옆자리에 앉아 있는 최성진 부회장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매형, 정 사장이 저런 결정을 내린 이유가 송 회장과 관련이 있는 것 아닐까요?”
“그렇게 생각한 이유가 뭐야?”
“송 회장이 H&J 컨설팅 측에 뿌리칠 수 없는 조건을 제시한 것 같아서요.”
충분히 일리 있는 얘기였다.
송훈석 회장의 강한 승부욕을 예전부터 경험해 왔으니까.
“처남 말이 맞겠군.”
“매형,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처남 생각을 먼저 말해 봐.”
“저희가 기부한 3억 달러가 아깝기는 하지만, 이쯤에서 발을 빼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최성진 부회장의 생각은 달랐다.
만약에 자신들이 송유관 건설 공사에서 발을 뺀다면, 400억 달러짜리 철도 건설 프로젝트를 가져올 가능성은 현저히 떨어진다.
송훈석 회장이 송유관 건설 공사를 미끼로 탄자니아와 우간다 정부에 공을 들일 것이 빤하기 때문에.
비록 적자가 발생하더라도 송유관 건설 공사를 수주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처남,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고.”
“아차, 철도 건설 프로젝트가 대기하고 있었죠?”
“이제야 알아듣는군. 천 부회장하고 합의해야 하니까, 처남이 시간을 끌어 줘.”
“그렇게 할게요.”
최성진 부회장과 짧은 대화를 끝마친 임지태 회장은 정명훈 사장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정 사장님, 굳이 오늘 결정을 내려야 하는 이유를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두 부통령님이 곧 귀국길에 올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 무슨 말씀인지 알았습니다.”
“이제부터 임 회장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번복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발언할 때 신중을 기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YCM건설 컨소시엄이 송유관 건설 공사를 수주한다고 가정할 경우에 언제부터 공사를 시작할 수 있습니까?”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고민하는 사이, 완커건설의 리스롱 사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정 사장님, 계약을 체결한 시점으로부터 5개월 안에 착공하도록 하겠습니다.”
“리 사장님, 우간다와 탄자니아 정부는 아무리 늦어도 상반기 안에 공사를 착공하고 싶어 합니다. 이 점을 고려해 주십시오.”
본격적으로 건설 공사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최소 2∼3개월은 소요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스롱 사장이 5개월이라는 다소 긴 시간을 제시한 이유는 송유관 건설 공사 장소가 아프리카는 점 때문이었다.
건설 장비를 배로 운송해서 공사 현장까지 도착시키는 데에만 2개월은 감안해야 하기 때문에.
그러나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밝히면, 마이너스 요소로 작용할 것이 분명했다.
‘착공식만 먼저 끝내고, 본 공사는 천천히 시작해도 되니까 뭐.’
간단하게 결론 내리고 정명훈 사장의 요구에 응답했다.
“두 나라의 의견을 존중해서 상반기 안에 착공토록 하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이제 임 회장님과 대화 나누십시오.”
자신의 역할을 끝마친 리스롱 사장이 2선으로 물러났다.
“임 회장님, 이제 중요한 질문입니다. YCM건설 컨소시엄은 송유관 건설 공사에 얼마를 투입할 예정입니까?”
임지태 회장은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공사비를 결정하기 위한 최성진 부회장과 천쥐펑 부회장의 대화가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조급한 마음에 최성진 부회장에게 속삭이듯 물었다.
“매형, 지금 어떤 상황입니까?”
“나는 기존에 계획한 대로 32억 달러를, 천 부회장은 30억 달러를 주장하고 있는 중이야.”
“32억 달러도 적자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은데, 30억 달러라니요?”
“천 부회장은 편법을 사용하면 2억 달러는 얼마든지 만회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 그리고 철도 건설 프로젝트를 수주하기 위해서라도 좋은 인상을 남겨 줄 필요가 있다고 하더라고.”
“제가 어떻게 대답할까요?”
“일단 먹고 나서 생각해 보자고.”
“네, 알았어요.”
짧게 대답한 임지태 회장은 정명훈 사장의 질문에 대답했다.
“저희 YCM건설 컨소시엄은 30억 달러에 송유관 건설 공사를 수주하겠습니다.”
“네?! 진심입니까!”
전혀 예상하지 못한 가격이라는 듯 정명훈 사장이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그의 크게 놀라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임지태 회장은 송유관 건설 공사는 자신들이 수주했음을 직감했다.
“하하하, 그렇습니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