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제대로 헛다리 짚은 사람
천쥐펑 부회장에게 개망신을 당한 최성진 부회장은 자신의 스위트룸으로 돌아오자마자 괴성을 지르며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손과 발을 이용해서 눈에 보이는 것들을 쓸어버린 것으로도 부족해서 눈을 부릅뜨고 여기저기 무언가를 찾아다녔다.
그 결과, 옷장 벽에 설치되어 있는 행거를 뜯어내서 눈에 보이는 집기들을 향해 내리쳤다.
퍽!
퍽, 퍽!
쨍그랑!
우지끈!
벽에 걸려 있던 최고급 텔레비전의 액정이 심하게 찌그러졌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스위트룸에 남아 있는 집기들이 하나둘씩 부서져 나갔고, 그나마 온전한 것은 침대와 소파밖에 없었다.
임지태 회장 등은 최성진 부회장의 심정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말없이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반면, 원인 제공자인 박철헌 사장은 눈을 질끈 감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어느 정도 화가 풀렸는지, 최성진 부회장은 찌그러진 행거를 바닥에 집어 던지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온몸에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그는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훔쳐 내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박철헌 사장에게 말을 걸었다.
“후우… 박 사장, 이제 변명해 봐.”
“부회장님이 천쥐펑 부회장이 부린 꼼수에 우리가 당했습니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최성진 부회장이 잠시 가라앉은 화를 또다시 폭발시켰다.
반면에 박철헌 사장은 그가 화를 내거나 말거나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천 부회장은 콩고민주공화국에 어제 오후에 20억 달러를 기부했고, 30분 전에 20억 달러를 기부했습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가 뭐야?”
“송금 확인증에 기록된 시간이 각각 다릅니다.”
“그 인간이 나중에 20억 달러를 기부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최성진 부회장의 목소리가 조금 전보다 상당히 많이 누그러졌다.
박철헌 사장은 그의 화를 완전히 없애 버리기 위해서 입에 발린 소리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부회장님의 존재에 대해서 겁을 집어먹었기 때문일 겁니다.”
“내 존재 때문이라고?”
“만약에 부회장님이 송 회장의 손을 들어 주면, 완커건설은 죽었다 깨어나도 도로 확포장 공사를 수주할 수 없을 겁니다.”
“음… 충분히 일리 있는 얘기군.”
잠시 대화가 중단된 틈을 타 임지태 회장이 입을 열었다.
“박 사장, 우리가 천 부회장에게 준 20억 달러를 되돌려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원칙상으로는 되돌려 받을 수 없지만, 천 회장이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천 부회장이 어제 40억 달러를 기부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잖아.”
“천 부회장은 부회장님께 내기를 걸어올 때 일부러 날짜를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에이, 괜히 20억 달러만 날려먹게 생겼군.”
두 사람과는 달리 최성진 부회장은 운이 좋다면 전액은 아니더라도 절반 정도는 되돌려 받을 것이라 예상했다.
자기가 몽니를 부리면 완커건설이 도로 확포장 공사를 수주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이 따를 테니까.
그러나 천쥐펑 부회장의 의도를 정확히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 언급하지는 않았다.
“이제 그 얘기는 그만하고, 송유관 건설공사를 수주할 수 있는 방법을 다시 한번 점검해 보자고.”
* * *
같은 시각.
천쥐펑 부회장은 자신의 스위트룸에서 리스롱 사장과 심각한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부회장님, 굳이 10억 달러를 되돌려줄 필요가 있습니까?”
“리 사장, 최 부회장을 적으로 돌려서 우리한테 이익이 될 것은 하나도 없어. 우리는 10억 달러를 챙긴 것에 만족하자고.”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우리가 도로 확포장 건설공사를 수주하면, 30억 달러 정도는 충분히 조성할 수 있겠지?”
“200억 달러짜리 공사에서 30억 달러를 조성하지 못하면, 문제 있는 것 아닙니까?”
“하하, 마음에 들어. 역시 자신만만하군.”
가볍게 웃은 천쥐펑 부회장은 핸드폰을 들어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일입니까?]
예상한 대로 냉담한 목소리.
천쥐펑 부회장은 최성진 부회장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자신의 꼼수로 인해서 무려 20억 달러를 허공으로 날렸는데, 기분 좋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이제는 약을 줘서 잔뜩 곪아 터진 상처를 치료할 때였다.
“최 부회장님, 10억 달러를 되돌려 줄 테니까, 화 풀어요.”
[제가 천 부회장님의 내기에서 진 것 때문에 화난 것이 아니라, 저의 멍청함에 대해서 자책한 것입니다.]
“5분 뒤에 최 부회장님의 계좌로 10억 달러가 입금될 겁니다.”
[천 부회장님, 고맙습니다.]
“오히려 제가 고마워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크흠, 그 얘기는 이제 그만하도록 하죠.]
“하하, 알았습니다. 10분 뒤에 로비에서 만납시다.”
[네.]
* * *
“네?! 기부를 또 했다고요!”
화들짝 놀란 겨울이 다시 한번 물었다.
[네. 사실입니다.]
“어찌됐든 축하드립니다.”
[한 부사장님, 나중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까요?]
거액의 돈이 뒤탈을 남기는 매개체로 작용한 경우가 허다했다.
부투야 실장은 그 점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때, 장대산 부사장이 겨울에게 메모지를 건네주었다.
메모지 내용을 확인한 겨울은 장대산 부사장한테 고맙다는 신호를 보내 주고 부투야 실장과 통화를 이어 갔다.
“부투야 실장님, 천 부회장이 최 부회장과 내기해서 20억 달러를 땄다가 조금 전에 10억 달러를 되돌려주었답니다.”
[천 부회장이 딴 돈의 절반을 되돌려 준 이유를 알고 계십니까?]
“천 부회장이 최 부회장을 적으로 돌려 버리면, 도로 확포장 공사를 수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최 부회장이 대한 그룹 소속이라는 점을 감안하시면 이해되실 겁니다.”
[아… 무슨 말씀인지 감 잡았습니다. 그나저나 완커건설로부터 기부 받은 20억 달러는 어떻게 할까요?]
겨울은 부투야 실장이 이런 질문을 던져 올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고, 이미 대답거리를 준비해 놓고 있었다.
“콩고민주공화국이 H&J Investment로부터 빌리는 돈을 줄이면 될 것 같습니다.”
[아, 그 방법이 있었군요?]
“네, 그렇습니다.”
[오늘 협상 잘하시고, 내일 봅시다.]
“네, 실장님.”
* * *
토탈 본사 회의실에서는 문두야 부통령과 마사카 부통령이 최성진 부회장 등을 기다리며 조용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마사카 부통령님, 좋은 건수가 없을까요?”
“네? 좋은 건수라니요?”
“콩고민주공화국은 잉가 3댐 건설공사, 도로 확포장 공사를 적절히 이용해서 YCM 그룹과 완커건설로부터 무려 65억 달러를 기부 받았잖아요. 그에 반해서 우리는 고작 3억 달러가 전부입니다.”
마사카 부통령도 문두야 부통령처럼 배가 아프기는 매한가지였다.
초대형 공사건을 미끼로 두 회사에게서 기부 받으면 좋겠는데, 딱히 생각나는 방법이 없었다.
“우리끼리 끙끙대지 말고, 한 부사장님한테 SOS를 쳐 보는 것은 어떨까요?”
“무작정 SOS를 치면 안 되니까, 작전을 수립해 보십시다.”
“좋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아이디어는…….”
똑똑.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겨울을 비롯한 H&J 컨설팅 사람들과 뿌요네 회장 일행이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들이 자리에 앉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문두야 부통령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한 부사장님, 저희는 정말 섭섭합니다.”
“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콩고민주공화국은 YCM 그룹과…….”
겨울은 문두야 부통령과 마사카 부통령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그들도 사람인데, 왜 돈 욕심이 없겠는가.
하지만 두 나라는 추진하고 있는 초대형 공사가 없다는 점에 문제가 있었다.
그렇다고 YCM 그룹과 완커건설에 반강제로 기부를 요구할 수도 없는 상황.
좋은 방법이 뭐가 있을까 궁리하는 사이, 문두야 부통령의 끝이 없을 것 같던 하소연이 끝났다.
“…우리나라와 우간다도 혜택 받을 수 있도록 신경 써 주십시오.”
그때, 하도진 실장이 발언권을 요청했다.
“문두야 부통령님, 이번기회에 탄자니아의 다르에스살람에서부터 우간다의 수도인 캄팔라까지 연결하는 도로를 정비하는 게 어떨까요?”
문두야 부통령은 5년 전의 기억을 되살려 냈다.
당시에 자국, 우간다, 케냐는 세 나라의 물류 인프라 개선을 위해서 다르에스살람, 케냐의 나이로비, 우간다의 캄팔라를 연결할 철도를 건설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천문학적인 공사비를 조달할 방법이 없어서 중간에 계획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만약에 철도 건설공사비를 H&J Investment가 투자해 준다면, 이번이 세 나라를 연결하는 철도 건설 프로젝트를 화려하게 부활시킬 절호의 기회였다.
그는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크게 심호흡하고 하도진 실장과 대화를 시작했다.
“하 실장님, 도로 정비공사 말고 철도 건설 프로젝트는 어떻습니까?”
“철도 건설 프로젝트는 뭡니까?”
“5년 전에 우리나라, 케냐, 우간다를 연결하는 철도…….”
문두야 부통령은 당시의 일을 모두에게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의 얘기가 끝나자마자, 정명훈 사장이 입을 열었다.
“문두야 부통령님, 당시에 철도 건설공사비용이 얼마로 산출됐습니까?”
“400억 달러였습니다.”
“철도 건설 프로젝트와 관련된 자료를 저희가 받아 볼 수 있습니까?”
“최대한 빨리 받아 보실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 드리겠습니다.”
그들의 얘기를 듣고 마사카 부통령이 급하게 발언권을 요청했다.
“정 사장님, 철도 건설 프로젝트에 투자할 생각을 가지고 계신 겁니까?”
“타당성 검토를 통해서 긍정적인 결과가 나오면, 적극 검토해 보겠습니다.”
“정 사장님, 정말 고맙습니다.”
그들의 얘기가 어느 정도 마무리될 무렵, 움티카 비서실장이 최성진 부회장 일행과 함께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천쥐펑 부회장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으면 중압감 때문에 좌중의 분위기가 차분하게 가라앉기 마련인데, 이상하게 화끈하게 달아오른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호기심이 치솟아 오른 그는 감추지 않고 솔직하게 물었다.
“뿌요네 회장님, 무언가 좋은 일이라도 있습니까?”
“있기는 하지만, 저희 회사와 상관없는 일이라서 말씀드릴 수 없다는 점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어느 분한테 여쭤보면 될까요?”
“문두야 부통령님 또는 마사카 부통령님께 여쭤보십시오.”
“문두야 부통령님,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아주 중요한 순간이었다.
자기가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서 이후의 분위기가 결정되기 때문에.
“5년 전에 우리나라, 케냐, 우간다가 공동으로 추진하던 프로젝트와 관련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어떤 프로젝트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길게는 설명해 드릴 수 없고, 철도 건설과 관련된 프로젝트입니다.”
천쥐펑 부회장은 느낌이 강하게 왔다.
탄자니아를 비롯한 세 나라는 철도 건설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했고, 비자금 조성회사인 H&J 컨설팅에 철도 건설 프로젝트 선정권을 넘길 생각인 것이라고.
‘흐흐흐… 운이 따라 준다면, 세 나라를 연결하는 철도 건설 프로젝트도 가지고 올 수 있겠군.’
그는 속으로 음흉한 웃음을 흘리며 문두야 부통령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당시에 공사비가 대략 얼마로 산출됐습니까?”
“400억 달러 정도 됐는데, 지금 다시 산출해 봐야 합니다.”
“철도 건설 프로젝트는 어떤 방식으로 시공사를 선정할 예정입니까?”
“H&J 컨설팅에서 알아서 선정할 겁니다.”
역시 자신의 추측이 맞아떨어졌다.
천쥐펑 부회장은 시선을 정명훈 사장에게 옮기며 질문을 던졌다.
“정 사장님, 철도 건설 프로젝트의 시공사는 언제 선정할 생각입니까?”
정명훈 사장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문이 막혔다.
아직 밥을 하려고 쌀도 씻지 않았는데, 천쥐펑 부사장은 숟가락을 손에 쥐고 퍼먹을 생각부터 하고 있었으니까.
나중에 돌아오는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라도 사실대로 얘기해 주는 것이 맞았다.
“천 부회장님, 아직 타당성 검토도 시작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거짓말일 것이다.
타당성 검토가 끝나지 않았는데, 세상에 어느 누가 400억 달러에 이르는 돈을 선뜻 투자하겠는가.
무언가 노림수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것이 무엇일까 이런저런 궁리 끝에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한 천쥐펑 부회장이었다.
‘정 사장, 세 나라에 건네줄 뇌물 금액을 올리려는 속셈인 것을 내가 모를 것 같습니까?’
제대로 헛다리 짚은 천쥐펑 부회장이었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