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이중 스파이 (2)
설영석 이사는 피가 바싹바싹 마르는 심정이었다.
최성진 부회장의 눈을 피해서 스위스로 도망친 최준하가 아직까지 호텔로 복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여러 번 전화를 걸어 봤지만, 전원이 꺼져 있다는 기계음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하아… 이놈 때문에 내가 뭐하고 있는 짓인지 모르겠네.”
윙윙―
그때, 손에 들려 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당연히 최준하라고 생각하고, 재빨리 통화 버튼을 눌렀다.
“준하 씨, 지금 어디야? 부회장님이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단 말이야.”
[설 이사, 최 부회장님이 이곳에 와 계십니까?]
순간, 설영석 이사는 천장이 노래지는 느낌을 받았다.
수화기를 통해서 들려온 목소리는 최준하가 아니라 직속 상사인 조병석 실장이었기 때문이다.
뭐라도 변명해야 하지만, 뇌기능이 정지했는지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설 이사, 왜 대답이 없는 겁니까?]
“…….”
[묵비권을 행사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됩니까?]
“…아닙니다.”
[지금 당장 회장님 숙소로 오세요!]
뚝.
화가 잔뜩 났는지 조병석 실장이 전화를 거칠게 끊었다.
“…좆 됐네.”
* * *
“조 실장, 무슨 일입니까?”
상석에 앉아 있는 송훈석 회장이 호기심을 실어서 물었다.
“최 부회장을 피해서 스위스로 도망친 최준하가 아직도 복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놈은 언제 철이 들려고 하는지…….”
“지금까지 하는 짓을 보면 고쳐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평생 살다가 죽겠죠.”
딩동.
그때,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고 조병석 실장이 문을 열어 주었다.
예상대로 설영석 이사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문 앞에 서 있었다.
“헉헉… 부르셨습니까?”
“설 이사, 회장님은 모든 사실을 알고 계시니까 속일 생각하지 마세요.”
“헉헉… 알겠습니다.”
설영석 이사는 상석에 앉아 있는 송훈석 회장에게 허리 숙여 인사하고 빈자리에 앉았다.
“설 이사, 누가 쫓아왔습니까?”
“…죄송합니다.”
찔리는 것이 많다는 듯 설영석 이사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제부터 내가 묻는 말에 하나라도 거짓이 있으면, 내일 자로 우리 회사에서 쫓겨나는 줄 알고 있어요.”
“네, 알겠습니다.”
“언제부터 최 부회장의 사람이 됐습니까?”
다짜고짜 정곡을 찔러 오는 송훈석 회장의 물음에 설영석 이사는 흠칫 놀라 한참 만에 말문을 열었다.
“…최준하 씨가 전략기획팀에 발령받을 때부터입니다.”
“최 부회장이 뭐라고 하면서 회유했습니까?”
설영석 이사는 당시의 기억을 떠올렸다.
최준하가 전략기획실에 배치 받고 나서 며칠 지나지 않아서 최성진 부회장의 호출을 받았다.
그 자리에서 그는 아들인 최준하의 후견인 역할을 수행해 달라면서, 반대급부로 올해 상무로 승진시켜 주겠다고 제안했다.
드디어 때가 왔다고 생각하면서 그의 제안을 수용했고, 지금까지 별 탈 없이 관계를 유지해 오는 중이었다.
설영석 이사는 당시의 일을 사실대로 보고했다.
“설 이사, 참 어리석네요. 내가 반대하면 상무로 승진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당연히 못합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최 부회장 사람이 됐다는 말입니까?”
“…죄송합니다.”
“그나저나 최 부회장이 프랑스에는 왜 왔습니까?”
설영석 이사는 지금이 아주 중요한 순간임을 직감했다.
자기가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서 운명이 결정될 것이다.
이미 송훈석 회장의 눈 밖에 났기 때문에 최성진 부회장의 편을 들어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사실대로 얘기하고 송훈석 회장의 처분을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우리 회사가 송유관 건설공사와 잉가 3댐 건설공사를 수주하는 것을 방해하러 왔습니다.”
“최 부회장에게 우리의 정보를 낱낱이 보고했겠네요?”
“…네.”
“설 이사, 이적행위의 뜻이 무엇인지 얘기해 보세요.”
“…….”
쾅!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송훈석 회장이 손바닥으로 강하게 소탁을 내리쳤다.
설영석 이사는 겁을 덜커덕 집어먹고 머리를 조아렸다.
“당신의 이적행위 때문에 우리 회사가 얼마나 난처한 상황에 빠졌는지 알고 있어!”
“죽을죄를 졌습니다!”
“당신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도록 하겠어. 잘 듣고 결정해.”
“네!”
“내일 당장 우리 회사를 그만두든지, 아니면 우리를 위해서 정보원 역할을 수행하든지 결정해. 어떤 것을 선택할 거야?”
어차피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었다.
만약에 대한 그룹을 그만두면, 최성진 부회장은 쓸모없다 판단 내리고 가차 없이 자기를 버릴 테니까.
그렇다고 이 나이 먹고 호기롭게 회사를 그만둬 봐야 재취업된다는 보장이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대한 그룹에서 버티는 것이 정답이었다.
“회장님, 제가 이중 스파이 역할을 수행하면 됩니까?”
“잘 알고 있군그래. 그래서 대답은?”
“후자를 선택하겠습니다.”
“이제부터 조 실장이 당신이 수행해야 할 역할을 설명해 줄 테니까, 귀담아들어.”
송훈석 회장의 지시를 받은 조병석 실장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무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설 이사가 이제부터 수행해야 할 역할은…….”
설영석 이사는 조병석 실장의 의도가 무엇인지 진심으로 궁금했다.
‘이렇게 간단한 일을 나한테 시키는 이유가 뭘까? 내가 물어본들 대답해 주겠어. 시키는 일이나 제대로 수행하면 되겠지.’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엄청난 얘기가 조병석 실장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설 이사가 녹음한 음성 파일은 운이 없으면, 최 부회장의 눈앞에서 재생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그렇다면… 대화를 녹음한 사람이 누구인지 최 부회장이 알 수도 있잖아요?”
“공익 신고자의 신분을 공개하는 것 봤어요? 핸드폰으로 녹음하지 말고, 내가 건네주는 소형 녹음기를 사용하면 문제없을 겁니다.”
“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이제 돌아가서 임무를 수행하세요.”
소형 녹음기를 손에 쥔 설영석 이사는 선뜻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최성진 부회장과 만날 수 있는 방법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에.
그렇다고 무턱대고 그를 찾아갈 수는 없는 노릇.
윙윙―
아주 공교롭게도 설영석 이사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발신자를 힐끗 확인한 그는 핸드폰을 덮어 놓았다.
그의 모습을 본 송훈석 회장은 가만있지 않았다.
“누구야?”
“최준하 씨입니다.”
“우리는 이곳에 없다고 생각하고 전화 받아 봐.”
“네, 회장님.”
짧게 대답한 설영석 이사는 핸드폰을 집어 들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준하 씨, 어디야?”
[이제 호텔에 도착했어요. 그나저나 그렇게나 여러 번 전화한 이유가 뭡니까?]
순간, 설영석 이사는 최성진 부회장에게 접근할 수 있는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 아이디어는 잠시 머릿속에 저장하고, 그는 최준하와 통화를 이어 나갔다.
“부회장님이 준하 씨를 찾고 있는 중이야.”
[네? 아직도 아버지가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았어요?]
“적어도 이삼 일은 이곳에 머무를 예정이야.”
[하아… 이제 어떻게 하죠?]
“부회장님께 찾아가서 잘못했다고 사과해야지, 별수 있나.”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잖아요.]
“내가 준하 씨 옆에서 거들어 줄 테니까, 마음 편히 먹고 있어.”
[아버지한테 언제 찾아갈 건데요?]
“일단 부회장님과 먼저 통화해 보고.”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연락 주세요.]
뚝.
최준하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새끼.’
속으로 한마디 해 주고, 그는 재빨리 최성진 부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설 이사, 준하가 도착했나?]
잔뜩 술에 취한 목소리.
설영석 이사는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했다.
술에 취해 인지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진 틈을 이용하는 방법이 머리를 스쳤다.
“네. 준하 씨가 부회장님께 사과하고 싶다고 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빨리 데리고 와.]
“네. 최대한 빨리 데리고 가겠습니다.”
딸깍.
전화를 끊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송훈석 회장이 입을 열었다.
“이번 작전을 성공하면, 당신의 죄를 일부 경감시켜 주지.”
“감사합니다, 회장님.”
“빨리 나가 봐.”
축객령을 받은 설영석 이사는 허둥지둥 자리를 빠져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힐끗 쳐다본 송훈석 회장이 조병석 실장에게 물었다.
“조 실장, 저 인간을 누가 감시하고 있나요?”
“장 부사장이 도와주기로 했습니다.”
“알았어요.”
조병석 실장과 대화를 종료한 송훈석 회장은 말없이 앉아 있는 문세형 사장에게 시선을 옮겼다.
“문 사장, 대한 건설이 콩고민주공화국에서 발주하는 도로 확포장 공사를 단독으로 실행할 수 있을까요?”
“저희가 아프리카 대륙에서 실행해야 할 건설공사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기 때문에 불가능 할 것 같습니다.”
“만약에 대한건설이 컨소시엄을 맺는다면, 어느 건설사가 괜찮을까요?”
문세형 사장은 편법을 사용하지 않고 완커건설을 압도할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하고 있었고, 방금 전에 제법 괜찮은 아이디어를 하나 생각해 냈다.
자신의 아이디어를 사용하면, 완커건설도 어쩔 수 없이 도로 확포장 공사에서 발을 뺄 수밖에 없을 거라 판단했다.
“회장님, 저는 콩고민주공화국에서 건설공사를 실행해 본 건설사를 파트너로 선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야 하는 이유를 얘기해 보세요.”
“H&J 컨설팅이 건설사를 선정할 때, 제가 방금 전에 언급한 조건을 전제조건으로 설정하면, 완커건설이 낭패를 볼 것 같습니다.”
“완커건설이 도로 확포장 공사를 컨소시엄을 구성하지 않고 단독으로 실행한다고 하면,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컨소시엄을 반드시 구성해야 하는 조건을 달거나 완공 시기를 대폭 줄이면, 어쩔 수 없이 컨소시엄을 구성해야 할 겁니다.”
“만약에 H&J 컨설팅이 그 조건을 삽입하면, 완커건설 측에서 반발하지 않을까요?”
“공평한 조건에서 입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반발하지 못할 겁니다. 막말로 얘기해서 아니꼬우면 도로 확포장 공사 수주를 포기하면 그만이니까요.”
서동호 실장은 문세형 사장의 의견이 충분히 일리 있다고 판단했다.
건설사를 선정할 수 있는 권리는 H&J 컨설팅이 가지고 있으니까.
그러나 H&J 컨설팅이 이 조건을 삽입하는 경우, 대한건설도 상황이 그다지 녹록치는 않다는 것에 문제가 있었다.
아무리 늦어도 내일까지는 조건을 갖춘 건설사를 섭외해서 프랑스로 불러들여야 하는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점을 언급하며 즉시 문세형 사장에게 의견을 물었다.
“도로 확포장 건설공사 계약을 이삼 일 정도 늦추면, 충분히 건설사를 부를 수 있을 겁니다.”
“우리가 그렇다면, 완커건설도 건설사를 급히 섭외해서 부르지 않을까요?”
“아차, 제가 그 생각을 하지 못했네요.”
“두 사람은 잠깐 대화를 멈추세요.”
이 말과 함께 송훈석 회장이 핸드폰을 들어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송 회장님, 우리나라에 언제 입국하셨습니까?]
상대방이 반가워하는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서 들려왔다.
“수요일에 들어왔습니다.”
[지금에야 연락을 주시다니, 정말 섭섭합니다.]
“페키르 회장님, 시간이 없으니까 용건만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말씀하십시오.]
페키르 회장의 목소리가 처음과는 달리 사무적으로 돌변했다.
“콩고민주공화국이 발주하는 건설공사를 VINCH가 수주한 실적이 있습니까?”
[셀 수 없이 많지만, 특별하게 꼽으라면 잉가 1, 2댐 공사를 우리 VINCH가 실행했습니다.]
“페키르 회장님, 도로 공사를 수주한 실적은 없습니까?”
[이런… 제가 잘못 짚었나요?]
“네, 그렇습니다.”
[킨샤사와 루붐바시를 연결하는 도로 공사를 저희가 실행했습니다.]
VINCH가 킨샤사와 루붐바시를 연결하는 도로 공사를 처음 시작했다는데, 더 이상 무슨 질문이 필요하겠는가.
“저희는 지금 리츠 파리라는 호텔에 묵고 있습니다. 이곳까지 오시는 데 얼마나 걸릴까요?”
[갈 때 가더라도 이유를 알려 주십시오.]
“저희가 콩고민주공화국에서 킨샤사와 루붐바시를 연결하는 도로의 확포장 공사를 수주할 예정입니다.”
[저희 회사를 도로 확포장 공사에 참여시켜 줄 생각입니까?]
“VINCH가 원한다면, 적극 고려해 보겠습니다.”
[지금 출발할 테니까 넉넉잡고 한 시간만 시간을 주십시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딸깍.
페키르 회장과 통화를 끝낸 송훈석 회장은 서동호 실장에게 말을 걸었다.
“지금 정 사장은 누구와 같이 있나요?”
“부투야 실장과 같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 사장한테 전화해서 한 시간 뒤에 귀한 손님을 소개시켜 준다고 하세요.”
“네, 회장님.”
서동호 실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문 사장은 나한테 한 얘기를 정 사장과 부투야 실장한테 다시 한번 설명하도록 하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회의실을 또다시 예약해야 할 겁니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