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확정된 착공식 날짜
아무리 와인이 비싸고 맛이 있다고 하더라도 열두 명이 50병을 모두 마시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부투야 실장 등은 최성진 부회장의 심정을 생각해서 성의껏 와인을 마셨지만, 아직도 절반 가까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
“최 부회장님, 남은 와인을 어떻게 처리할까요?”
부투야 실장의 질문을 받은 최성진 부회장은 모두 가져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체면상 그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오늘 진귀한 와인을 원 없이 마신 것에 만족하겠습니다.”
“남은 와인을 처분할 수 있는 권리를 저한테 주셨다고 생각하면 됩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최 부회장님께 와인 열 병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네? 너무 많습니다.”
“내일 중국에서 귀한 손님이 오신다면서요?”
즉, 천쥐펑 부회장에게 선물하라는 의미였다.
“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내일은 정명훈 사장과 점심 식사한 후에 저녁 무렵까지 이곳에서 휴식을 취할 예정입니다.”
최성진 부회장은 부투야 실장의 의도를 단숨에 이해했다.
오후에 천쥐펑 부회장을 만나 줄 수 있다는 의미였다.
자기도 그 얘기를 언제 꺼낼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불감청고소원으로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을 들여다 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만의 착각일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내일 천쥐펑 부회장을 부투야 실장님께 소개시켜 드려도 될까요?”
“내일 오후 3시부터 6시까지 시간을 비워 놓도록 하겠습니다.”
“하하, 알겠습니다.”
“이제 휴식을 취했으면 좋겠는데, 괜찮겠지요?”
“그야 물론입니다. 저희는 일어나겠습니다.”
최성진 부회장 등이 빈티지 와인 열 병을 챙겨서 떠나갔다.
이윽고 그 자리를 이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던 겨울과 송훈석 회장 일행이 차지했다.
남은 와인을 마시며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을 때, 부투야 실장이 진심으로 궁금한 표정으로 겨울에게 물었다.
“한 부사장님, 정말로 YCM 그룹이 24억 달러를 우리나라에 기부할까요?”
“높은 확률로 기부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YCM 그룹이 전액 부담하지는 않겠죠?”
“상황이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정확하게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정명훈 사장도 그 점에 대해서는 겨울과 생각이 같았다.
만약에 잉가 3댐 건설공사를 YCM건설 컨소시엄이 수주한다면, 두 회사가 실행하게 될 공사 비중에 따라서 기부 금액이 결정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들이 잉가 3댐 건설공사를 수주할 가능성은 불가능하다.
천쥐펑 부회장이 정상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확신이 설 때까지 섣불리 기부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결국 YCM 그룹이 24억 달러를 먼저 기부하고 잉가 3댐 건설공사 수주가 확정된 후, 천주펑 부회장에게 청구하기로 합의가 될 가능성이 높다.
아니면 정반대의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고.
그러니 겨울도 정확하게 예측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생각을 끝낸 정명훈 사장이 발언권을 요청하고 입을 열었다.
“부투야 실장님, 기부 금액 분배는 그들의 사정이니까 저희는 신경 쓸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하긴… 정 사장님의 말씀이 맞는 것 같네요.”
“저희와 콩고민주공화국과의 계약은 언제 체결하는 게 좋을까요?”
“내일은 그렇고… 모레 오전이 어떨까요?”
“네, 좋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송훈석 회장이 발언권을 요청했다.
“부투야 실장님, H&J 컨설팅과 얼마에 계약할 예정입니까?”
“아직 확정되지 않았지만, 150억 달러 플러스알파로 계약할 생각입니다.”
송훈석 회장은 은근히 기분이 좋아졌다.
만약에 그 금액으로 계약이 체결되면, 자신들은 140억 달러에 H&J 컨설팅과 계약을 체결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면 최하 5억 달러 가까이 이익을 확보할 수 있다.
“하하, 알겠습니다.”
“제가 누누이 말씀드렸지만, 6월 중에는 공사가 시작됐으면 좋겠습니다.”
“염려 마십시오.”
그때, 겨울이 발언권을 요청하고 대화에 끼어들었다.
“회장님, 잉가 3댐 건설공사 착공식은 6월 29일 전후에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꼭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6월 29일이 바통고 대통령님의 생신이기 때문입니다.”
“아,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반면에 부투야 실장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자기는 지금까지 잉가 3댐 건설공사 착공식을 바통고 대통령의 생신과 연계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있었으니까.
겨울의 아이디어를 따른다면 당연히 바통고 대통령은 환영의 뜻을 나타낼 것이다.
정치적으로나 개인적으로 기념비를 남길 만한 절호의 기회였다.
생각을 끝낸 부투야 실장은 송훈석 회장에게 얼른 말을 걸었다.
“송 회장님, 착공식을 성대하게 치를 예정인데, 초청장을 보내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만사 제쳐 놓고 달려가겠습니다.”
“하하, 알겠습니다.”
마사카 부통령도 할 말이 있다는 듯 대화에 끼어들었다.
“송 회장님, 송유관 건설공사 착공식은 6월 27일로 예정하고 있습니다.”
“저한테도 초청장을 보내 주실 거죠?”
“당연히 보내 드릴 예정입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꼭 참석하도록 하겠습니다.”
송훈석 회장과 대화를 마무리한 마사카 부통령은 시선을 뿌요네 회장에게 옮겼다.
“뿌요네 회장님께도 초청장을 보내도 되겠습니까?”
“저도 만사 제쳐 놓고 우간다로 날아가겠습니다.”
한편, 문두야 부통령은 호영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는 모습이 은근히 신경 쓰였다.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잠시 대화가 중단된 틈을 타서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호영 씨, 고민거리라도 있습니까?”
호영은 순간적으로 아차 했다.
대화에 낄 자격이 없기에 구석 자리에 앉아서 정수기와 관련해서 기분 좋은 상상에 빠져 있었을 뿐이었는데.
아직 정수기는 정식으로 발주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그는 핑계거리를 재빨리 생각해 낸 후, 문두야 부통령의 질문에 대답했다.
“송유관 건설공사와 잉가 3댐 건설공사 착공식에 얼마나 많은 축하객이 올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이유가 있겠죠?”
“착공식 기념 선물을 저희 SH무역이 공급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아무리 늦어도 4월 말까지는 제안서를 주셔야 합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정호영 씨, 우리도 제안서를 받아 봤으면 좋겠습니다.”
부투야 실장이 입가에 미소를 가득 머금고 한마디 보탰다.
의도치 않게 두 나라에서 컨펌을 받은 호영은 이게 웬 떡인가 싶었다.
“네, 알겠습니다.”
“한 가지 제안을 추가하면, 기념 선물은 VIP용과 일반하객용으로 구분해서 제안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 * *
유쾌한 술자리가 끝나고, 숙소로 복귀한 겨울은 피곤한 몸을 침대에 뉘였다.
그러나 호영이 귀찮게 하는 바람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호영아, 맑은 정신으로 아침에 얘기하자.”
“나도 그러고 싶은데, 조금 있다가 작은아버지와 통화할 일이 있어서 그래.”
“나한테 묻고 싶은 게 뭐야?”
“부투야 실장님이 최 부회장한테 받을 기부금 중에서 나머지는 어디에 사용할 것 같니?”
“필요한 곳에 알아서 사용하시겠지. 도대체 그게 왜 궁금한 거야?”
사실 호영이 부투야 실장이 남은 기부금을 어디에 사용할지 처음부터 관심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술자리에서 마히무 산업부 장관과 왈라카 수자원 장관이 작은 목소리로 대화 나누는 것을 엿듣고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마히무 장관은 남은 기부금으로 도로를 확장 공사하는 것을 원했고, 왈라카 장관은 정수기를 수입해서 국민들에게 저렴하게 공급하기를 원했다.
만약에 부투야 실장이 후자를 선택하면, 정수기 공급은 SH무역에서 책임지게 된다.
문제는 우간다와 탄자니아에서 발주 받을 정수기 양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이었다.
호영은 두 사람이 나눈 대화 내용과 자신의 생각을 보태서 겨울에게 얘기해 주었다.
“…내가 작은아버지한테 어떻게 보고했으면 좋겠니?”
“콩고민주공화국 건은 확정될 때까지 말씀드리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아무래도 그게 낫겠지?”
드르륵―
그때, 아주 공교롭게도 소탁 위에 있던 호영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핸드폰을 들어 발신자를 확인하니 은센기 사장이 걸어온 전화였다.
호영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와 통화를 시작했다.
“은센기 사장님, 한밤중에 무슨 일이십니까?”
[제가 방금 전에 부투야 실장님, 문두야 부통령님, 마사카 부통령님과 차례로 통화했습니다. 그분들과 나눈 대화 내용을 알려 드리려고 전화했습니다.]
기분 좋은 일이 있었는지 그의 목소리가 상당히 들떠 있었다.
덩달아 호영의 마음도 급해졌다.
“빨리 말씀해 보세요.”
[탄자니아와 우간다는 정수기 발주하는 것으로 확정됐습니다. 제가 내일까지 발주서를 보내 주겠습니다.]
“은센기 사장님, 정수기 수량은 확정됐습니까?”
[각각 60만 대로 확정됐습니다.]
“우와! 장난이 아니네요.”
[콩고민주공화국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는데, 150만 대 정도를 발주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백, 백오십만 대요?!”
진심으로 놀란 호영이 심하게 말을 더듬었다.
[저도 부투야 실장님께 그 얘기를 듣고 놀라서 까무러치는 줄 알았습니다.]
“확정되는 즉시 발주서를 보내 주세요.”
[그야 물론입니다. 납기는 따로 말씀드리지 않아도 되겠죠?]
“최대한 서둘러 보겠습니다.”
[그리고 송유관 건설공사와 잉가 3댐 건설공사 착공식 당시에 축하객들한테 선물할 기념 선물 중에서 VIP용은 홍삼이 함유된 건강식품으로 결정됐습니다.]
“은센기 사장님이 우리나라에 출장 왔을 당시에 제가 드린 선물을 얘기하는 겁니까?”
[네, 그렇습니다.]
“더 이상 저한테 하실 말씀이 없으시면, 전화를 끊어야겠습니다.”
[급한 일이 있으신가 보네요?]
“이 기쁜 소식을 SH무역 사장님께 보고하려고 그럽니다.”
[알겠습니다. 나중에 통화하겠습니다.]
딸깍.
호영이 전화를 끊자, 겨울이 득달같이 질문을 던졌다.
“우간다와 탄자니아가 발주한 정수기는 모두 몇 대야?”
“각각 60만 대.”
“너희 회사가 정수기 270만 대를 공급할 수 있을까?”
“너희 회사라니? 기분이 상당히 나쁘네?”
겨울은 순간적으로 큰 실수를 저질렀음을 깨달았다.
콩고민주공화국을 포함한 세 나라에 정수기를 공급하는 역할은 H&J 컨설팅이 수행해야 한다.
H&E 트레이딩과 SH무역은 보조 역할을 수행할 뿐이고.
그런 사실을 간과하고 남의 일처럼 생각하고 있었으니, 당연히 호영이 기분 나쁠 만했다.
“내가 깜빡했네. 정말 미안하다.”
“알았어. 용서해 주마.”
“정 사장님한테 빨리 전화해 봐.”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
호영이 빠른 동작으로 정상호 사장한테 전화 걸었다.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
한국은 일요일 아침이라서 그런지 정상호 사장의 목소리는 쌩쌩했다.
“우간다 등으로부터 일감을 발주 받은 것이 있어서 연락드렸습니다.”
[어떤 일감인데?]
“큰 건과 작은 건이 있는데, 어느 것부터 말씀드릴까요?”
[알면서 왜 물어?]
“6월 말경에 우간다와 콩고민주공화국에서…….”
호영은 작은 건부터 입에 올렸다.
송유관 건설공사와 잉가 3댐 건설공사 착공식과 관련된 기념 선물 발주 건에 대해서 상세하게 보고했다.
[제안서는 최대한 빨리 너한테 송부해 줄게.]
“네, 알겠습니다.”
[이제 큰 건에 대해서 얘기해 봐.]
“탄자니아와 우간다로부터 정수기를 각각 60만 대…….”
[자, 잠깐. 6만 대를 잘못 얘기한 거 아니야?]
화들짝 놀란 정상호 사장이 호영의 말을 끊으며 물어왔다.
“60만 대가 맞습니다.”
[아이고…….]
정상호 사장이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듯 탄식을 내뱉었다.
“발주서는 늦어도 내일까지 보내 드린답니다.”
[제일 중요한 납기는?]
“최대한 빨리랍니다.”
[이번에도 죽어나게 생겼군.]
“마지막으로 콩고민주공화국과 관련된 일감 하나가 남아 있는데, 아직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뭔지 얘기해 봐,]
“정수기 150만 대입니다.”
“…….”
정상호 사장에게서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너무 놀라서 할 말을 잊었으리라.
“작은아버지, 정수기 150만 대는 공급하지 못한다고 이대로 토해 낼까요?”
[이 녀석아, 농담이라도 그런 소리는 하지 마라.]
호영의 장난에 정상호 사장이 곧바로 반응해 왔다.
“하하, 알았어요.”
[바이어분들께 내가 진심으로 고마워한다고 전해 줘.]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