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치열한 수 싸움의 승자 (2)
마사카 부통령은 이 기세를 몰아서 원하는 것을 얻어 내기로 마음먹었다.
“최 부회장님, 송유관 건설공사와 관련해서 드릴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네, 말씀해 보세요.”
“송유관 건설공사와 관련해서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은 우리나라의 루군다 대통령님과 탄자니아의 마자리 대통령님입니다.”
최성진 부회장은 그의 말이 백번 옳았기 때문에 대답하지 않고 인정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루군다 대통령님께 YCM 그룹 측에서 우리나라 3억 달러를 기부했다고 말씀드렸더니,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YCM 그룹의 선행을 언론에 널리 알리라고 지시를 내리셨는데, 여기에서 결정적인 문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어떤 문제가 생겼다는 말씀입니까?”
잔뜩 호기심을 느낀 최성진 부회장이 마사카 부통령 쪽으로 몸을 가져가며 물었다.
“우리나라에 기부해 주신 명의는 YCM 그룹이 아니라 최 부회장님이신데, 결정적으로 부회장님은 대한 그룹 소속이라는 겁니다.”
최성진 부회장은 마사카 부통령이 언급한 문제가 무엇인지 즉각 알아챘다.
우간다 정부가 YCM 그룹 이름으로 3억 달러를 기부했다고 언론에 알리면, 보나마나 기자들은 후속기사를 내기 위해서 취재에 들어갈 것이다.
우간다 정부에 3억 달러를 실제로 기부한 사람이 누구인지 밝혀지는 것은 시간문제.
만약에 자기라고 밝혀지면, 그야말로 초대형사고가 발생한다.
우간다 정부는 거짓말한 사실이 들통날 것이고, 자기의 입장 또한 상당히 난처해질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우간다 정부가 입금 받은 3억 달러를 자기에게 반납하고, YCM 그룹 이름으로 다시 송금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그런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것은 확실했다.
결국 YCM 그룹 이름으로 3억 달러를 다시 송금해야 한다는 의미인데, 그러기에는 죽기보다 싫었다.
“마사카 부통령님, 좋은 방법이 없습니까?”
“YCM 그룹의 총수인 임지태 회장님 이름으로 기부 증서를 발행해 주시면 어떨까요?”
전혀 예상치 못한 얘기를 들은 최성진 부회장은 어리둥절했다.
자기는 마사카 부통령이 YCM 그룹의 이름으로 추가 기부해 달라고 요청할 것으로 예상했다.
어느 누가 봐도 그 방법이 가장 그럴싸했으니까.
그런데 자신의 예상과는 달리 추가 기부가 아니라 기부 증서를 달라고 한다.
이게 웬 떡이냐 싶은 마음으로 마사카 부통령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마사카 부통령님, 저희가 기부 증서를 언제까지 작성해 주면 될까요?”
“루군다 대통령님이 H&J 컨설팅에 영향력을 행사해 주기를 바란다면, 최대한 빨리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리 늦어도 내일 오전까지 작성해서 건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문두야 부통령이 마사카 부통령에게 고맙다는 뜻으로 비밀리에 신호를 보내고 대화에 동참했다.
“최 부회장님, 우리 탄자니아도 같이 기부 증서를 작성해 주십시오.”
“문두야 부통령님, 정말 고맙습니다.”
“통화하면서 제가 언급한 빚은 기부 증서를 받는 것으로 퉁칩시다.”
“네? 그래도 되겠습니까?”
“저는 최 부회장님이 우리나라에 기부해 주신 3억 달러가 얼마나 많은 금액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때, 박철헌 사장이 커피숍 문을 열고 들어와 보고했다.
“부투야 실장님 일행이 내려오셨습니다.”
* * *
저녁 식사 장소로 이동하는 차안에서 최성진 부회장 임지태 회장, 박철헌 사장은 긴급 대화에 들어갔다.
“임 회장, 기부 증서는 성 실장한테 작성하라고 지시하라고.”
“네, 매형.”
“박 사장은 무세비니 실장과 칼리마니 실장에게 기부 증서 작성에 참여해 달라고 부탁하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나저나 H&J 컨설팅과 대한건설의 협상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을까?”
“제가 설영석 이사한테 전화해 볼까요?”
“스피커폰으로 통화하라고.”
“네, 알겠습니다.”
짧게 대답한 박철헌 사장이 설영석 이사한테 전화 걸었다.
[네, 사장님.]
“설 이사, H&J 컨설팅과 대한건설의 협상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제가 협상에 직접참여하지 않아서 확실히 모르지만, 난항을 겪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이유가 뭐라고 하는데?”
[공사비밖에 더 있겠습니까?]
“양측이 주장하는 공사비는 얼마인데?”
[H&J 컨설팅은 33억 달러를, 대한건설은 34억 달러를 주장하고 있답니다.]
박철헌 사장은 H&J 컨설팅이 너무한다고 생각했다.
컨설팅 회사의 손익구조는 빤하다.
손익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재료비가 거의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인건비를 포함한 판매 관리비가 비용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
모르긴 몰라도 매출 이익이 적어도 70% 이상 될 것이다.
그에 반해, 건설 회사의 매출 이익은 10% 수준.
만약에 대한건설이 H&J 컨설팅의 주장을 들어주면, 매출 이익은 4% 수준으로 떨어진다.
송유관 건설공사 기간을 대폭 줄이지 않으면, 매우 높은 확률로 적자가 발생할 수 있는 구조였다.
적자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대한건설은 34억 달러를 주장하고 있는 중일 것이다.
생각보다 긴 생각을 끝낸 박철헌 사장은 설영석 이사와 통화를 이어 나갔다.
“H&J 컨설팅이 33억 달러를 주장하고 있는 이유가 뭐라고 하는데?”
[우간다와 탄자니아 정부에 적지 않은 액수를 기부해야 하기 때문이랍니다.]
“얼마인지 알고 있나?”
[들리는 소문에는 1억 달러가 넘는다고 합니다.]
“설마… 각각 1억 달러는 아니겠지?”
[저는 설마가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겠지?”
[욕심 많은 놈들이 H&J 컨설팅에 고작 5,000만 달러를 요구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H&J 컨설팅은 적자라는 소리네?”
두 사람의 통화를 듣고 있던 최성진 부회장은 마음이 답답했다.
송유관 건설공사보다 규모가 훨씬 큰 잉가 3댐 건설 프로젝트가 머릿속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잉가 3댐 건설 프로젝트에 송유관 건설공사와 같은 논리를 적용한다면, H&J 컨설팅은 콩고민주공화국에 8억 달러가 넘는 돈을 기부해야 한다는 뜻.
만약에 공사비가 증액되지 않고 140억 달러로 고정된다면, YCM건설과 완커건설은 적자를 볼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뭔가 특단의 대책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최성진 부회장이 고민에 빠져 있는 사이, 두 사람의 통화는 끝이 났다.
“새로운 소식이 있으면 연락해 줘.”
[그렇게 하겠습니다.]
딸깍.
박철헌 사장이 전화를 끊자, 임지태 회장이 근심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매형, 송유관 건설공사에 우리가 괜히 끼어든 게 아닐까요?”
“왜 그렇게 생각해?”
“YCM건설이 송유관 건설공사를 수주하기 위해서는 H&J 컨설팅이 제시한 33억보다 적은 최소 32억 5,000만 달러 정도를 제시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적자가 발생하잖아요.”
“적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방법을 찾아봐야지.”
“좋은 방법이라도 있습니까?”
“아직은 없어.”
최성진 부회장도 답답한지 시선을 차창 밖으로 옮겼다.
* * *
“최 부회장님, 표정이 좋지 않아 보이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부투야 실장의 질문을 받은 최성진 부회장은 순간적으로 아차 했다.
부투야 실장은 저녁 식사를 시작해서 지금까지 잉가 3댐 건설 프로젝트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그에 반해 자기는 잉가 3댐 건설 프로젝트의 공사 금액을 증액할 방안을 찾고 있었으니.
재빨리 변명거리를 생각해 내고 그의 질문에 대답했다.
“오늘 뿌요네 회장님의 저택에 초대받아서 점심 식사를 같이했는데, 그때보다 음식의 질이 떨어지는 것 같아서 그럽니다.”
“저는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하니까, 신경 쓰지 마십시오.”
“부투야 실장님, 최 부회장님이 미안하다면서 오늘 밤에 거하게 술을 사기로 했습니다.”
뿌요네 회장이 자연스럽게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부투야 실장은 드디어 작전이 시작됐다고 판단 내리고, 최성진 부회장에게 말을 걸었다.
“최 부회장님, 그렇다면 오늘 저녁 식사는 제가 사겠습니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희가 묵고 있는 숙소 비용도 최 부회장님이 부담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녁 식사와 술까지 모두 사시면 너무 부담이 크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저녁 식사는 제가 사는 것이 이치상 맞습니다.”
“하하, 그렇다면 할 수 없군요. 맛있게 먹겠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식사를 시작해 볼까요?”
잠시 후, 벤자민 파바르라는 이름을 가진 지배인이 부투야 실장의 부름을 받고 다가왔다.
“찾으셨습니까?”
“와인을 주문하고 싶은데, 적당한 것으로 추천해 주실 수 있습니까?”
파바르 지배인은 오늘 저녁때 있던 일이 불쑥 떠올랐다.
뿌요네 회장의 비서실장인 알퐁소 움티카가 자기를 찾아와서 비싸기로 소문난 1959년산 라타슈 와인을 열다섯 병을 건네주었다.
뿌요네 회장이 VIP들과 식사하러 올 예정이니 그들이 주문하면 서빙해 주라는 부탁과 함께.
그러면서 자기에게 자세한 행동 요령을 일러 주었다.
드디어 약속 시간 30분 전쯤에 뿌요네 회장이 VIP들과 레스토랑에 모습을 드러냈다.
적당한 시점에 그 와인을 추천하는 것이 자기가 맡은 역할이었다.
생각을 끝낸 파바르 지배인은 부투야 실장의 질문에 대답했다.
“손님들에 따라서 추천해 드릴 수 있는 와인이 다릅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조건을 세분화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 레스토랑에서 제일 비싼 와인이 무엇이고, 수량은 어떻게 됩니까?”
“1959년산 라타슈 와인을 가지고 있고, 20만 유로 정도합니다. 모두 열다섯 병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보다 조금 저렴한 와인은요?”
“1965년산 페트리쉬 와인을 가지고 있고, 10만 유로 정도합니다. 모두 스무 병을 가지고 있습니다.”
“라타슈 와인은 우리를 주시고, 페트리쉬 와인은 밖에 있는 수행원들한테 서빙해 주세요.”
“네?!”
움티카 비서실장에게 코치 받은 대로 파바르 지배인은 화들짝 놀라는 모습을 연출했다.
“지금 내가 저녁 식사 비용을 부담하지 못할 것 같아서 놀라시는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마시다 모자라면 추가로 주문할 수 있으니까, 참고하고 계세요.”
임지태 회장은 속으로 적잖이 놀랐다.
와인 스물다섯 병의 가격만 무려 500만 유로.
아무리 생산된 지 오래됐다 하더라도 비싸도 너무 비쌌다.
만약에 자기에게 이런 상황이 닥친다면, 죽었다 깨어나도 술값으로 그 금액을 지불하지 못할 것이다.
부투야 실장 측에서 저녁 식사를 계산하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다고 생각하면서 아무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사이에도 두 사람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손님, 더 필요한 것은 없습니까?”
“제가 여독이 풀리지 않아서 그러니까, 가급적이면 메인 요리를 빨리 서빙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부투야 실장은 나중을 위해서 밑밥을 깔았지만, 그것을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와인을 곁들여 한참 메인 스테이크를 먹는 도중에 뿌요네 회장이 부투야 실장에게 질문을 던졌다.
“부투야 실장님, 수행원들을 잔뜩 데리고 우리나라를 방문하신 이유가 있겠지요?”
“잉가 3댐 건설 프로젝트를 수행할 업체와 계약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잉가 3댐 건설공사는 작년 10월에 스페인의 ACS 컨소시엄이 수주한 것이 아니었습니까?”
“ACS 컨소시엄에 참여한 중국의 CTG에 결격사유가 발생하는 바람에 계약을 파기했습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ACS가 심하게 반발했겠네요?”
“CTG 측으로부터 계약 파기에 따른 피해 보상금을 받았기 때문에 큰 문제없습니다.”
“그런데 따로 염두에 두고 있는 회사가 있습니까?”
“당연히 있습니다.”
“혹시… H&J 컨설팅입니까?”
“네. 바통고 대통령님께서 그렇게 결정하셨습니다.”
최성진 부회장은 H&J 컨설팅이 잉가 3댐 건설 프로젝트를 수행할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으나, 막상 직접 귀로 들으니 기분이 상하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발주처가 그렇게 결정했는데, 자기인들 방법이 있겠는가.
그때, 뿌요네 회장이 아주 민감한 얘기를 꺼내 들었다.
“잉가 3댐 건설공사를 직접 실행할 업체의 결정권은 누가 가지고 있습니까?”
“H&J 컨설팅이 결정하겠지만, 저희의 의견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겁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뿌요네 회장은 빙긋 웃으며 최성진 부회장에게 말을 건넸다.
“최 부회장님, 오늘 술을 거하게 사셔야 하겠는데요?”
“하하하, 염려 마십시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