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무섭고 두려운 사람
같은 시각.
호영이 예약을 위해서 들어갔다 나온 레스토랑에서는 최준하, 박철헌 사장, 설영석 이사가 대화를 나누며 식사 중에 있었다.
“설 이사, 내가 뿌요네 회장을 언제쯤 만나 볼 수 있을까?”
박철헌 사장이 프랑스에 방문한 목적은 CNOOC가 토해 낸 우간다 유전의 지분을 매입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분 매입은 물 건너가 버렸다.
오늘 오후에 송훈석 회장이 토탈 측으로부터 우간다 유전의 지분을 매입했기 때문에.
설영석 이사는 짧은 시간 동안에 지분 거래를 종료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판단하고 안테나를 높게 세워 봤지만, 틀림없는 사실로 확인됐다.
다행히 우간다 유전 지분 매입 건과 관련해서 자기가 관여되어 있는 것은 없었기 때문에 굳이 숨길 필요가 없었다.
“사장님, 우간다 유전 지분 매입은 없던 일로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왜?”
“뿌요네 회장이 송 회장에게 지분을 매각했다고 합니다.”
박철헌 사장은 설영석 이사의 말을 믿지 않았다.
송훈석 회장은 어젯밤에 프랑스에 도착했고, 오늘 점심때 뿌요네 회장과 처음 만났다.
두 사람이 만나서 인사를 나누고, 이제 겨우 일곱 시간이 조금 지났을 뿐이다.
이렇게 짧은 시간에 15억 달러가 넘어가는 지분의 거래를 끝낸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일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박철헌 사장은 이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뿌요네 회장과 송 회장이 예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다고 합니다. CNOOC가 지분을 토탈에 매각하는 순간부터 조병석 실장이 뿌요네 회장과 비밀리에 접촉하고 있었답니다.”
“그게 사실이야?”
“저도 미심쩍어서 수소문해 봤지만, 사실이었습니다.”
박철헌 사장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이 소식이 최성진 부회장의 귀에 들어가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빤히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숨길 수는 없는 노릇.
“설 이사, 부회장님의 노여움을 최대한 줄일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설영석 이사도 그 방법을 찾기 위해 집중하다 기발한 아이디어를 하나 찾아 놓은 상태였다.
“사장님, 송유관 건설공사를 대한건설이 수주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은 어떨까요?”
“그 방법이 상식적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해?”
설영석 이사는 박철헌 사장이 어떤 이유로 이 말을 꺼냈는지 알고 있었다.
우간다 유전 개발에 대한 지분은 토탈과 대한 그룹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송유관 건설공사 수주를 방해할 수 있는 방법은 현재로서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아이디어를 꺼낸 이유는 한 가닥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었다.
“사장님, 송유관 건설공사를 발주할 수 있는 권리는 비록 토탈 컨소시엄이 가지고 있지만, 우간다와 탄자니아가 반대하면 대한건설은 죽었다 깨어나도 송유관 건설 공사를 가지고 올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방법으로 방해할지 얘기해 봐.”
“이곳에 우간다의 마사카 부통령이 와있습니다. 그를 만나서…….”
박철헌 사장은 충분히 가능성 있는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
돈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하지만 최성진 부회장은 의미 없이 돈을 사용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즉, 반드시 뛰어난 성과를 창출해 내야 한다는 뜻.
‘뇌물을 사용해서 성과를 낼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가만… 그 방법이 있었잖아!’
만약에 자신의 아이디어가 실현된다면, 대한건설은 빅엿을 먹을 것이 확실하다.
박철헌 사장은 속으로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면서 설영석 이사와 대화를 이어 나갔다.
“설 이사, 우리가 송유관 건설 공사를 수주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네? 저희라니요?”
“준하 씨의 외삼촌이 어떤 회사를 경영하고 있는지 몰라서 하는 소리야?”
최준하의 외삼촌은 재계 순위 6위인 YCM 그룹을 경영하고 있다.
박철헌 사장은 송유관 건설 공사를 YCM 건설이 수주하도록 만들어 줄 생각인 것이다.
하지만 설영석 이사는 박철헌 사장의 아이디어가 실현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왜냐하면 송훈석 회장이 제일 싫어하는 회사가 YCM 그룹이었으니까.
YCM 건설이 우간다와 탄자니아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대한 그룹이 결사적으로 반대하면 송유관 건설 공사를 수주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박철헌 사장은 YCM 건설이 수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데에 있었다.
설영석 이사는 자신의 생각을 상세하게 밝혔다.
“설 이사, 토탈과 우간다, 탄자니아가 YCM 건설에 송유관 건설 공사를 넘겨주자고 강력하게 주장하면, 어떻게 될까?”
“토탈은 어떻게 우군으로 포섭하실 생각입니까?”
“일단 뿌요네 회장을 만나 봐야지. 내가 뿌요네 회장을 만날 수 있도록 설 이사는 자리를 마련해 봐.”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말없이 듣고 있던 최준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장님, 잉가 3댐 건설 공사도 YCM 그룹이 수주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은 어떨까요?”
“잉가 3댐이라니?”
최준하는 말로만 들었지 잉가 3댐 건설 공사에 얽힌 사연에 대해서 아는 것은 쥐뿔도 없었다.
따라서 설영석 이사의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시선을 보냈다.
설영석 이사는 그의 의도를 단숨에 알아채고 서둘러 대화에 끼어들었다.
“사장님, 작년 10월에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시면 쉽게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아, 그 잉가 3댐을 말하는 거야?”
“네, 그렇습니다.”
“잉가 3댐 건설공사는 중국의 CTG와 스페인의 ACS 컨소시엄이 수주한 것이 아니었나?”
“저도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얼마 전에 계약이 파기됐다고 합니다.”
박철헌 사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계약을 파기하기 위해서는 정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잉가 3댐 건설공사를 서두르던 콩고민주공화국 측이 계약 파기에 대한 원인을 제공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렇다면 CTG, 또는 ACS가 원인을 제공했을 가능성이 높다.
박철헌 사장은 자신의 추측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저는 CTG가 원인을 제공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겠지?”
“사장님은 CNOOC가 우간다 유전의 지분을 토해 낸 이유를 믿습니까?”
박철헌 사장도 당연히 믿지 않았다.
CNOOC 측에서는 우간다 유전의 경제성이 떨어져서 지분을 토탈에 매각했다고 변명했지만, 거짓말이라고 판단했다.
세계 5대 메이저 석유 회사인 토탈이 경제성이 떨어지는 유전에 투자한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CNOOC는 경제성이 문제가 아니라 다른 문제 때문에 지분을 매각했다 판단하고 안테나를 높게 세워 봤지만, 아직까지 특별하게 알아낸 것은 없었다.
“설 이사는 CNOOC가 우간다 유전의 지분을 토탈에 매각한 진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CNOOC가 우간다와 탄자니아에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CTG도 콩고민주공화국에 실수를 저질렀다는 말인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음, 충분히 일리 있는 얘기군.”
“그리고 다음 주에 콩고민주공화국에서 부투야 실장을 포함한 협상대표단이 이곳에 온다고 합니다.”
“그럼… 송 회장이 잉가 3댐 건설 공사도 수주하기 위해서 이곳에 왔다는 말이야?”
“네, 그렇습니다.”
“콩고민주공화국이 대한건설에 잉가 3댐 건설 공사를 준다는 보장이 있나?”
“H&J 컨설팅의 정명훈 사장은 콩고 지점에서 3년 동안 지점장을 맡고 있던 사람입니다.”
“정 사장이 브로커 역할을 수행한다는 건가?”
“그렇지 않으면, H&J 컨설팅 사람들이 이곳에 출장 올 이유가 없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았어. 잠깐만 기다려 봐.”
박철헌 사장은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핸드폰을 집어 들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박 사장, 우리나라가 지금 몇 시인지 모르나?]
최성진 부회장의 목소리에 짜증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부회장님, 긴급하게 보고 드릴 것이 있어서 연락드렸습니다.”
[얘기해 봐.]
“CNOOC가 토해 낸 우간다 유전의 지분은 송 회장이 가지고 간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어이, 박 사장. 그게 긴급하게 보고할 건이야!]
화가 치밀어 올랐는지 최성진 부회장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박철헌 사장은 그의 질책에 개의치 않고,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부회장님, 이제부터가 진짜입니다.”
[후우, 알았어. 빨리 얘기해 봐.]
“대한건설이 수주할 예정인 송유관 건설 공사를 우리가 빼앗아 오는 게 어떨까요?”
[어떤 방법으로?]
“우간다 유전 개발의 지분은…….”
박철헌 사장은 설영석 이사에게 들은 얘기와 자신의 아이디어를 첨가해서 그럴듯한 방법을 제시했다.
“…송유관 건설 공사는 YCM 그룹에 넘겨주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박 사장, 돈은 얼마든지 사용해도 좋으니까, 송유관 건설 공사를 YCM 그룹이 가지고 갈 수 있도록 도와줘.]
“네, 알겠습니다.”
[내일 통화하자고.]
“부회장님, 아직 메인 요리가 남아 있습니다.”
[뭐야? 또 있어?]
“네. 잉가 3댐 건설공사가 남아 있습니다.”
[잉가 3댐 건설공사라면…….]
최성진 부회장이 지난 기억을 헤집고 있는지 끝말을 흐렸다.
박철헌 사장은 그의 생각을 방해하지 않고 잠시 기다렸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살짝 상기된 최성진 부회장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서 들려왔다.
[잉가 3댐 건설공사도 계약이 파기됐나?]
“네, 그렇습니다.”
[어떤 방법으로 잉가 3댐 건설 공사를 수주할지 얘기해 봐.]
“다음 주에 콩고민주공화국의 부투야 실장이 협상단을 이곳에 올 예정입니다.”
[박 사장, 잠깐만.]
“네. 말씀하십시오.”
[잉가 3댐 건설공사건은 규모가 크니까, 나 혼자 들어서는 안 될 것 같아. 내가 오전 중에 처남하고 자리를 만들 테니까, 그때 통화하자고.]
“네, 알겠습니다.”
딸깍.
박철헌 사장이 전화를 끊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설영석 이사가 질문을 던져 왔다.
“부회장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알면서 왜 물어?”
“하하, 알겠습니다.”
“내가 마사카 부통령을 최대한 빨리 만날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어 봐.”
“그야 물론입니다.”
“저녁도 다 먹었으니까, 이제 2차 가자고.”
* * *
송훈석 회장의 스위트룸.
녹음 파일 재생이 끝나자, 장대산 부사장은 핸드폰을 집어 넣었고, 송훈석 회장은 말없이 소파에서 일어나 창가로 이동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석양이 붉게 물든 서쪽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다른 사람들은 음성 파일의 내용이 자못 심각하다고 생각했는지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을 뿐이었다.
이와는 반대로 겨울은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다.
송유관 건설 공사와 잉가 3댐 건설공사는 자기가 동의하지 않는 한 절대로 YCM 그룹이 가지고 갈 수 없다.
이윽고 생각을 끝낸 송훈석 회장이 자신의 자리에 돌아와 앉아 서동호 실장에게 말을 걸었다.
“서 실장, 최 부회장과 YCM 그룹에 본때를 보여 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저보다는 한 부사장에게 물어보는 편이 빠를 것 같습니다.”
서동호 실장의 말을 받아들인 송훈석 회장은 방금 전과 똑같이 겨울에게 물었다.
겨울은 덤덤한 표정과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는 두 가지 방법을 생각해 놓고 있습니다. 말씀드려 볼 테니까, 회장님께서 결정해 주십시오.”
“얼른 얘기해 보세요.”
“먼저 플랜 A는…….”
겨울의 아이디어를 끝까지 들은 송훈석 회장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플랜 B를 선택했다.
“회장님, 플랜 B를 선택하면, 최 부회장과 YCM 그룹이 데미지를 크게 입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습니다.”
“언젠가는 결착을 봐야 하기 때문에 이참에 그들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알겠습니다. 회장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해 드리겠습니다.”
“한 부사장, 정말 고마워요.”
“저는 이제 마사카 부통령님을 만나러 가겠습니다.”
겨울이 일행들과 함께 스위트룸에서 퇴장하자, 송훈석 회장이 송지유에게 말을 건넸다.
“지유야, 한 부사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니?”
“글쎄요. 능력이야 이미 검증되었고, 무섭고 두려운 사람이라고 할까요?”
“그렇게 생각한 이유가 있겠지?”
“만약에 저희가 한 부사장님을 적으로 만났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저희는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을 거예요.”
“하긴…….”
송훈석 회장이 말끝을 흐린 채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