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그 남자의 수난기 (3)
[뭘 봐! 씨발 놈아!]
[최준하 씨, 취했으면 방으로 돌아가서 쉬세요.]
[싫다. 개새끼야!]
장대산 부사장의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듣고 있던 송훈석 회장은 부끄러운 마음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겨울이 차분한 목소리로 대응하고 있지만, 어떤 심정인지 충분히 알 수 있었으니까.
더 이상 음성 파일을 듣는 것은 시간 낭비였다.
“장 부사장, 이제 그만 들읍시다.”
장대산 부사장이 재빨리 정지 버튼을 눌렀다.
송훈석 회장은 최준하에게 싸늘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어젯밤에 한겨울 부사장한테 행패를 부린 이유가 뭔가?”
최준하는 어젯밤에 만취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대로 얘기하면 초대형 사고가 발생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지금은 사건을 축소하는 것에 전념할 때였다.
맹렬하게 짱구를 굴린 끝에 기발한 답변거리를 하나 생각해 냈다.
“어젯밤에 술에 너무 만취했기 때문에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준하 씨, 취중진담이라는 말을 알고 있나?”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모른다고 시치미를 뗄 때였다.
“모릅니다.”
“우리가 이곳으로 출발하기 직전에 조병석 실장이 공지 사항을 전달한 것은 기억하겠지.”
“네. 기억하고 있습니다.”
“조 실장이 뭐라고 했는지 얘기해 봐.”
“우리 회사의 전략적 파트너인 H&J 컨설팅의 임직원들을 대할 때 항상 예의를 갖추라고 하셨습니다.”
쾅!
송훈석 회장이 화난 얼굴로 소탁을 강하게 내려쳤다.
이와 동시에 부속실에는 살을 에는 듯한 북극한파가 몰아닥쳤다.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한 부사장한테 행패를 부린단 말이야!”
최준하는 잘못을 시인했을 경우에 어떤 상황이 발생할지에 대해서 짧게 생각했다.
송훈석 회장은 옳다구나 하면서 눈엣가시인 자기를 처벌하려 들 것이고, 징계 수위 또한 한층 높아질 것임은 안 봐도 비디오였다.
자칫 자기와 최성진 부회장의 원대한 계획이 일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었다.
하늘이 두 쪽 나는 한이 있더라도 순순히 잘못을 인정할 수는 없었다.
“회장님, 죄송합니다만, 저는 기억이 전혀 없습니다.”
사실 송훈석 회장은 겨울의 부탁을 받은 것이 있어서 최준하가 정식으로 사과하면 용서해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최준하의 뻔뻔한 행동에 그런 마음이 쏙 들어갔다.
“장대산 부사장, 최준하 씨의 변명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필름이 끊길 정도로 술을 마셨다면 제대로 걷지 못했어야 하는데, 걸음걸이는 비교적 멀쩡했습니다.”
“본인은 술에 만취했다고 하는데, 누구 말이 맞는 것일까요?”
“이런 상황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하고, CCTV에 촬영된 최준하 씨의 모습을 호텔 측에 요청해서 확보해 놓은 상태입니다.”
“동영상을 지금 볼 수 있습니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장대산 부사장은 가지고 온 노트북과 벽에 걸려 있는 TV를 연결해서 동영상을 재생시켰다.
최준하가 호텔 객실에서 나와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바에 도착하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장대산 부사장의 말대로 최준하는 술을 마시지 않은 사람처럼 걸음걸이가 온전했다.
동영상에 CCTV 촬영시간이 표시되어 있기 때문에 조작했다고 우길 수도 없었다.
잠시 후, 바 내부로 들어온 최준하가 겨울에게 시비를 거는 장면과 마사카 부통령의 경호원들에게 제압당해서 밖으로 끌려가는 장면이 이어졌다.
동영상 재생이 끝나자, 송훈석 회장은 궁금한 것이 남아 있다는 듯 장대산 부사장한테 질문을 던졌다.
“최준하 씨가 마사카 부통령님의 경호원에게 끌려간 이후에 어떻게 됐습니까?”
“술이 완전하게 깰 때까지 일반 객실로 데리고 가서 잠을 재운 후, 되돌려 보냈습니다.”
송훈석 회장은 그 얘기에서 작은 빈틈 하나를 발견했다.
최준하 쪽에서 마사카 부통령의 경호원들에게 제압당한 것을 문제 삼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는 혹시나 있을 지도 모를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이 점을 콕 짚어 물었다.
“최준하 씨가 행패부린 곳에 마사카 부통령님이 앉아 계셨습니다. 때문에 정신 나가지 않는 한 경호원들의 행동을 가지고 시비 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최준하 씨가 일반 객실에서 머물러 있을 당시의 동영상도 확보하고 있습니까?”
“만약에 발생할 수 있는 불상사를 대비하기 위해서 카메라로 촬영해 놓고 있었습니다. 원하신다면, 지금 보여 드릴 수 있습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요. 그건 그렇고, 최준하 씨가 잠이 오지 않아서 산책 나갔다는 말은 거짓말이겠네요?”
“물론입니다.”
장대산 부사장과 대화를 끝낸 송훈석 회장은 반쯤 넋이 나가 있는 듯 멍하니 앉아 있는 최준하에게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준하 씨, 변명해 봐.”
“…….”
“묵비권 행사하겠다는 거야!”
“…죄송합니다.”
최준하에게 백기 투항을 받아 냈으나, 송훈석 회장은 이쯤에서 멈출 생각이 없었다.
“서 실장, 최 부회장한테 전화해서 나를 연결해 줘.”
“네, 회장님.”
짧게 대답한 서동호 실장은 최성진 부회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은 후, 핸드폰을 송훈석 회장에게 건네주었다.
“최 부회장님, 내가 프랑스에 어떤 목적으로 출장 왔는지 알고 계십니까?”
[우간다와 탄자니아를 연결하는 송유관 건설공사를 수주하러 가셨잖아요.]
“역시 잘 알고 계시는군요. 그런데 최 부회장의 고귀한 아드님께서 어젯밤에 거하게 사고를 치는 바람에 송유관 건설공사를 수주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제 아들놈이 어떤 사고를 쳤습니까?]
묻는 최성진 부회장의 목소리가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어젯밤에 우간다의 마사카 부통령 앞에서 난동을 부린 것도 모자라서, 나한테 뻔뻔한 표정으로 거짓 변명을 일삼고 있는 중입니다.”
[그럴 리가요. 제 아들놈은 그렇게 막돼먹지 않았습니다.]
송훈석 회장은 최성진 부회장이 이런 반응을 보일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혀 개의치 않고 통화를 이어 나갔다.
“최 부회장님이 원하신다면 증거 자료들을 보내 줄 수도 있습니다.”
[아닙니다. 됐습니다.]
“나는 최준하 씨를 용서해 줄 생각이 없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회장님, 저를 봐서라도 한 번만 용서해 주시면 안 됩니까?]
“어제도 조 실장한테 용서를 청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좋습니다. 최 부회장님을 봐서라도 이번에는 특별히 용서해 주겠습니다. 만약에 이런 일이 또다시 발생하면, 그때는 인정사정 봐주지 않겠습니다.”
[회장님, 제 아들놈을 선처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나중에 통화합시다.”
딸깍.
송훈석 회장은 핸드폰을 서동호 실장에게 돌려주며 지시를 내렸다.
“한 부사장을 이곳으로 부르도록 하라고.”
“네, 회장님.”
* * *
빡!
송훈석 회장과 통화를 끝낸 최성진 부회장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핸드폰을 벽에 힘껏 집어 던졌다.
벽에 부딪힌 핸드폰 파편이 사방팔방 흩어졌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구석에 세워져 있는 골프채를 손에 쥐었다가 바닥에 내던졌다.
어제 오후에 집무실에 남아 있던 모든 집기들을 모두 부숴 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아…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최성진 부회장이 내뱉는 한숨 소리가 집무실 공기를 짓눌렀다.
* * *
부속실 문을 열고 들어가다 말고 겨울은 흠칫 했다.
소파 한쪽 구석에 최준하가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바닥으로 쳐 박은 채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장대산 부사장의 옆자리에 앉자, 송훈석 회장이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붙여왔다.
“한 부사장, 어젯밤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장 부사장한테 얘기 들었습니다. 최준하 씨의 불미스런 행동에 대해서 대한 그룹을 대표해서 정식으로 사과합니다.”
“회장님, 만약에 최준하 씨가 술에 취하지 않았다면,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했을 겁니다. 하지만 어젯밤에 최준하 씨는 술에 많이 취해 있었습니다. 해서 저는 이미 잊어버렸으니까, 크게 신경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최준하 씨를 용서해 준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될까요?”
사실 겨울은 최준하를 용서해 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막판에 결정을 바꾼 이유는 아직도 그에게 갚아 줄 빚이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입니다.”
“최준하 씨, 어젯밤에 저지른 무례에 대해서 정식으로 사과해.”
송훈석 회장의 지시를 받은 최준하는 겨울에게 사과하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으나, 지금은 무섭게 내리는 소나기를 피하고 볼 때였다.
“한 부사장님, 어젯밤에는 제가 술에 만취해서 이성을 잃었습니다.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절대로 없도록 주의하겠습니다.”
겨울은 최준하의 어젯밤의 행동에 대해서 아직 풀지 못한 의문점을 가지고 있었다.
신입사원 연수 당시에도 최준하는 자기를 물 먹이기 위해서 직접 나서지 않고 추종 세력들을 동원했다.
자기를 아프리카 법인으로 쫓아 보낼 때도 마찬가지였고.
따라서 이번에도 설영석 이사를 내세워 자기를 물 먹이려 시도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본인이 직접 행동에 나섰다.
이로 미루어 봐서 시비를 걸 상대가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일 가능성도 있었다.
자기가 아니라면 남아 있는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
추측이 맞는지 확인해 보기 위해 말문을 열었다.
“제가 묻는 말에 솔직하게 대답해 준다면, 사과를 받아 줄 용의가 있습니다.”
“얘기해 보세요.”
“어젯밤에 시비를 걸려고 한 상대가 누구였습니까?”
겨울의 질문을 받은 최준하는 아주 중요한 순간이라고 판단했다.
사실 자기는 한겨울보다 송지유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곳으로 간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울에게 시비를 걸은 이유는 먼저 그의 두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송훈석 회장이 송지유를 끔찍이 여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얘기는 목에 칼이 들어오는 한이 있더라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이런저런 궁리 끝에 옹색한 변명거리를 하나 생각해냈다.
“사실은 장대산 부사장한테 시비를 걸 생각이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작년 신입사원 연수당시에 저를 해고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입니다.”
송훈석 회장은 최준하가 거짓말하고 있음을 단숨에 알아챘다.
그의 말이 맞다면, 최성진 부회장이 장대산 부사장을 그냥 놔두었을 리 없었다.
그는 겨울에게만 관심을 두었지, 1년이 넘도록 장대산 부사장한테는 일말의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저놈이 시비를 걸 대상이 한 부사장이 아니라면, 지유밖에 없는데. 저놈이 지유한테 시비를 걸려는 이유가 뭐였을까? 설마… 그것 때문인가?’
송훈석 회장이 혼자만의 상상에 빠져 있는 사이에도 두 사람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최준하 씨가 이토록 뒤끝이 긴 사람이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네요.”
“미안하게 됐습니다.”
“약속대로 용서해 주겠습니다. 앞으로 불미스러운 일로 부딪히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한겨울, 내가 네놈을 가만히 내버려 두면 최준하가 아니다.’
이 말이 식도를 타고 목구멍 끝까지 올라왔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네, 알겠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송훈석 회장이 입을 열었다.
“한 부사장, 최준하 씨를 용서해 줘서 정말 고마워요.”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어젯밤의 사건은 여기에서 끝내고 다시 언급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저는 상관없습니다만, 마사카 부통령님은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아차, 내가 그 생각을 못했네요.”
“회장님이 어젯밤의 사건에 대해서 마사카 부통령님께 사과하시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겨울의 제안을 받은 송훈석 회장은 이후의 스케줄을 떠올렸다.
잠시 후에 있을 회의를 끝마치고 나면, 점심 식사는 뿌요네 회장과 예정되어 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지금밖에 시간이 없었다.
“한 부사장, 생각난 김에 지금 행동으로 옮기는 게 어떨까요?”
“저는 회장님의 말씀에 찬성합니다.”
겨울과 대화를 중단한 송훈석 회장은 조병석 실장에게 지시 내렸다.
“조 실장이 내 대신 회의를 주관하도록 해.”
“네, 알겠습니다.”
“최준하 씨는 나하고 한 부사장이 용서해 줬다고 하더라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어. 오전 중으로 조 실장한테 시말서를 제출하도록.”
“네, 회장님.”
일단락이 되었다고 생각했는지 최준하가 힘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한 부사장, 이제 마사카 부통령님을 만나러 갑시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