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그 남자의 수난기 (2)
최준하는 숨이 컥 막혔다.
사실대로 얘기하면, 개인적으로 스위트룸을 얻은 것을 언급해야 한다.
만약에 자신이 그 말을 언급하는 순간, 조병석 실장은 또다시 꼬투리를 잡으려 들 것이다.
잽싸게 다른 변명거리를 생각해 봤지만, 딱히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렇다고 묵비권을 행사할 수도 없는 노릇.
이리저리 생각해 봐도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정면 돌파.
“제가 따로 룸을 얻었습니다.”
“룸을 따로 얻은 이유가 뭔가?”
아주 중요한 순간이었다.
일반 룸도 내키지 않고 룸메이트도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정답이었지만, 전자는 차마 언급할 수 없었다.
후자를 살짝 각색해서 대답하기로 마음먹었다.
“저와 같은 방을 사용하는 룸메이트가 직급이 높다는 이유로 저를 하인 부려먹듯 부리는 것이 내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조병석 실장은 최준하가 또다시 거짓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단숨에 알아챘다.
최준하는 전략기획실에 배치되자마자 자기가 최성진 부회장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여기저기에 떠벌이고 다녔다.
때문에 간이 배 밖으로 나오지 않은 이상, 직원들은 그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준하 씨를 부려먹은 룸메이트가 누구였나?”
“양경운 과장입니다.”
조병석 실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한 그룹 내에 양경운 과장의 숨겨진 신분을 알고 있는 사람은 불과 열 명이 되지 않는다.
때문에 그는 절대로 다른 직원들과 쓸데없는 트러블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런데 양경운 과장이 최준하를 하인 부리듯 부려먹었다니.
거짓말일 가능성이 농후했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어젯밤에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파헤쳐 볼 필요가 있었다.
“설 이사, 회의 시작 20분 전까지 양 과장, 준하 씨와 함께 회의실 옆에 있는 부속실로 나를 찾아오세요.”
“네, 실장님.”
조병석 실장은 무언가 고심하는 얼굴로 두 사람에게서 멀어졌다.
그의 뒷모습을 힐끗 쳐다보면서 설영석 이사가 재빨리 질문을 던졌다.
“준하 씨, 조 실장님한테 거짓말을 한 이유가 뭐야?”
“아시면서 왜 그러십니까? 아침은 이사님 혼자서 드세요.”
설영석 이사에게 날카롭게 쏘아붙인 최준하는 등을 돌려 조병석 실장의 반대편으로 향했다.
“저런 놈을 출세의 발판으로 삼은 내가 바보 멍청이지.”
설영석 이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
* * *
부속실.
모닝커피를 한 모금 마신 송훈석 회장이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조 실장, 나를 이곳으로 빨리 오라고 한 이유가 뭐야?”
“30분 전쯤에 설영석 이사의 방에서 나오는 최준하를…….”
조병석 실장의 보고를 받은 송훈석 회장은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하다고 판단했다.
왜냐하면 양경운 과장이 개입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가 사적으로 최준하를 부린 것이 사실이라면, 최성진 부회장이 어떻게든 시비를 걸고 넘어갈 것이 분명했다.
그는 급히 서동호 실장에게 지시 내렸다.
“회의를 한 시간 정도 연기하도록 하라고.”
“네, 회장님.”
짧게 대답한 서동호 실장이 밖으로 나가자, 지금까지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던 장대산 부사장이 입을 열었다.
“조 실장님, 최준하 씨가 거짓말하고 있는 겁니다.”
“최준하가 어떤 거짓말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얘기해 줄 수 있나요?”
“최준하 씨는 잠이 오지 않아서 산책 나간 것이 아닙니다.”
“장 부사장, 우리가 모르고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뜻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최준하는 어젯밤에 한 부사장님께 상당히 심한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아이고…….”
송훈석 회장이 낙담한 듯 탄식을 내뱉었다.
재빨리 조병석 실장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회장님, 장 부사장한테 어젯밤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들어 보는 게 어떨까요?”
“장 부사장, 얘기해 줄 수 있나요?”
겨울은 최준하가 술에 심하게 취했다는 이유로 조용히 덮고 넘어가기를 원했다.
하지만 장대산 부사장은 그럴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어제의 최준하의 행동은 아무리 술에 취했다고 해도 도를 한참 넘어섰으니까.
더구나 마사카 부통령도 관련되게 되었고.
그렇지 않아도 장대산 부사장은 그를 따끔하게 혼내 주기 위해서 송훈석 회장을 찾은 것이다.
그에게 말을 꺼내려는 순간, 조병석 실장이 서동호 실장에게 전화를 걸어왔고, 어찌어찌하다가 이곳까지 같이 오게 된 것이다.
짧게 생각을 끝낸 장대산 부사장은 송훈석 회장의 질문에 대답했다.
“회장님, 제가 얼마든지 말씀드릴 수 있지만, 최준하 씨가 어떤 변명을 늘어놓는지 들어 보는 게 먼저일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합시다.”
잠시 후, 부랴부랴 회의를 연기해 놓고 들어온 서동호 실장의 뒤를 따라 설영석 이사, 양경운 과장, 최준하가 부속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세 사람은 상석에 앉아 있는 송훈석 회장에게 정중한 자세로 인사하고, 비어 있는 자리에 앉았다.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모두의 예상을 깨고 송훈석 회장이 제일 먼저 양경운 과장에게 따뜻한 목소리로 말을 건넨 것이다.
“양 과장, 내가 싫은가?”
“저는 회장님을 싫어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럼, 요즘 내방에 발걸음하지 않는 이유가 뭐야?”
“회장님, 저는 대한 그룹의 일개 과장일 뿐입니다.”
“에이, 고약한 놈. 그나저나 유선이는 잘 살고 있어?”
“네. 무탈하게 잘 계십니다.”
“그 녀석은 우리나라에 안 들어온대?”
“이곳저곳에 벌여놓은 일들이 많아서 당분간 들어오시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요즘 어머니가 유선이 얘기를 자주하시니까, 아무리 바빠도 어버이날에는 꼭 들어오라고 해.”
“그렇게 말씀 드려 놓겠습니다.”
최준하는 양경운 과장이 자기한테 당당하게 군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로 보아, 그는 송훈석 회장의 조카인 것 같았다.
만약에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자기보다 훨씬 더 빵빵한 배경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자기는 대한 그룹 3대 주주의 아들일 뿐이지만, 그는 최대주주의 조카였다.
송지유가 대한 그룹의 경영권을 물려받으면, 그가 그룹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것은 자명한 사실.
그것도 모르고 그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으니.
자신의 멍청함에 머리를 쥐어박고 싶었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최준하가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두 사람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양 과장, 어젯밤에 준하 씨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얘기해 줄 수 있나?”
“제가 배정된 룸에 먼저 도착해서 짐을 풀고 있었습니다. 조금 후에 도착한 준하 씨가 불만 가득한 눈으로 저를 노려봤습니다.”
“왜?”
“제가 창가 쪽 침대를 차지해서 그런 거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하면서 캐리어를 끌고 밖으로 나가 버렸습니다.”
“그게 다야?”
“네, 그렇습니다.”
양경운 과장의 대답을 들은 송훈석 회장은 시선을 옮기며 최준하에게 물었다.
“준하 씨, 그럼 양 과장이 하인 부리듯 부렸다는 얘기는 뭐야?”
최준하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양경운 과장이 보통 신분의 소유자였다면, 자기가 내뱉은 말을 강력하게 밀고 나갔을 것이다.
어차피 증거가 없으니까.
하지만 그는 송훈석 회장의 조카였다.
피가 섞이지 않은 자기보다 양경운 과장의 말을 믿어 줄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난감한 상황을 돌파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짧게 생각을 정리하고 송훈석 회장의 질문에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사실은 일반 룸을 같이 사용하는 것이 불편해서 룸을 따로 얻은 겁니다.”
최준하의 대답을 들은 송훈석 회장은 조병석 실장에게 질문을 던졌다.
“조 실장, 준하 씨한테 일반 룸을 배정해 줬나?”
“아닙니다. 제가 룸을 배정한 실무자한테 확인해 본 결과, 두 사람에게는 일반 룸이 아닌 디럭스 룸이 배정됐다고 들었습니다.”
“준하 씨, 디럭스 룸이 불편하면, 도대체 어떤 룸을 얻었다는 거야?”
“스위트룸을 얻었습니다.”
전혀 기죽지 않고 따박따박 대답하는 최준하의 태도에 송훈석 회장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하더라도 업무 차 이곳에 왔으면 회사의 방침을 따르는 것이 원칙 아닌가.
“준하 씨가 개인적으로 프랑스에 여행 왔다면, 스위트룸을 얻든 호텔 전체를 얻든 상관하지 않았겠지. 하지만 준하 씨는 내 수행원 자격으로 이곳에 출장 온 거야. 내 말 맞지?”
“네, 맞습니다.”
“그렇다면 회사가 정한 룰에 따르는 게 맞겠지?”
“만약에 제가 회사 돈을 사용해서 스위트룸을 얻었다면, 회사가 정한 룰을 어긴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저는 개인 돈을 사용했을 뿐입니다.”
송훈석 회장은 뻔뻔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최준하 얼굴에 주먹을 선사하고 싶을 정도로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기에 차마 행동으로 나설 수 없었다.
“그래서 잘못한 것이 없다?”
“네. 불편한 곳에서 잠을 자서 다음 날 일정에 차질을 주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알았어. 잠깐 기다려.”
최준하와 대화를 중단한 송훈석 회장은 시선을 옮겨 양경운 과장에게 말을 건넸다.
“양 과장, 디럭스 룸이 불편했나?”
“아닙니다. 편안하고 좋았습니다.”
“준하 씨가 디럭스 룸이 불편하다고 생각한 이유가 뭘까?”
“호강에 겨워 요강에 똥 싼다는 말밖에 생각나는 이유가 없습니다.”
“으하하하!”
그의 거침없는 표현에 송훈석 회장이 급작스럽게 웃음을 터트렸다.
다른 사람들도 덩달아 웃음보를 터트렸고.
당사자인 최준하만큼은 똥 씹은 표정으로 양경운 과장을 노려보고 있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송훈석 회장은 싸늘한 목소리로 최준하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 회사의 2대 주주의 아들인 양 과장도 디럭스 룸이 편안했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설영석 이사는 진심으로 깜짝 놀랐다.
조금 전에 양경운 과장의 신분이 범상치 않다는 사실을 캐치했지만, 대한 그룹의 2대 주주의 아들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와 전략기획실에서 5년 넘게 같이 근무하고 있었지만, 엄청난 신분의 소유자라고 티를 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에 반해서 최준하는 전략기획실에 배치되자마자, 본인 입으로 특별한 신분인 양 떠들고 다녔고.
보석을 걷어차 버리고 돌덩이를 애지중지한 자기 자신이 어이없을 뿐이었다.
설영석 이사가 자책하는 동안에도 두 사람의 대화는 계속됐다.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제가 딱히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송훈석 회장은 최준하가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면 이대로 넘어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는 잘못한 것이 전혀 없다는 듯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고 불만이 담긴 눈초리를 보내오고 있었다.
아직 서른도 안 된 철부지라서 앞뒤 구분을 못한다고 해도, 도가 지나쳐도 한참 지나쳤다.
“준하 씨는 잠깐만 기다려.”
송훈석 회장은 조용히 앉아 있는 장대산 부사장에게 말을 걸었다.
“장 부사장, 어젯밤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얘기해 줄 수 있습니까?”
“어젯밤에 저하고, 한 부사장님, 송지유 씨, 정호영 씨와 함께 바에서 간단하게 술을 마시고 있는데, 우간다의 마사카 부통령님이 무세베니 비서실장과 함께 저희를 찾아왔습니다.”
최준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젯밤에 자기를 제압한 사람들이 마사카 부통령의 경호원들이라는 사실과 한겨울이 생각보다 거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런 사실도 모르고 한겨울에게 온갖 욕설을 내뱉었으니.
하지만 이미 물컵은 산산조각 났고, 물은 땅바닥에 스며든 상황이었다.
최준하가 자책의 한숨을 내뱉은 사이에도 둘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장 부사장, 계속 얘기해 보세요.”
“마사카 부통령님과 즐겁게 술자리를 가지고 있는 도중, 설영석 이사님과 최준하 씨가 바에 입장했습니다. 두 사람은 문 앞에 서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더니, 곧바로 가 버렸습니다.”
“설 이사, 어떻게 된 상황인지 얘기해 봐.”
송훈석 회장의 질문을 받은 설영석 이사는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는 최준하 씨가 유달리 한겨울 부사장한테 감정이 좋지 않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최준하 씨와 함께 가볍게 술을 마시러…….”
설영석 이사는 당시의 상황을 최대한 유리한 방향으로 설명해 나갔다.
“그 이후에 어떤 상황이 벌어졌는지 모르나?”
“네. 전혀 모릅니다.”
“알았어.”
설영석 이사와 대화를 종료한 송훈석 회장은 장대산 부사장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 이후에 사건이 벌어졌다는 말인가요?”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