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그 남자의 수난기 (1)
설영석 이사와 간단하게 술 한잔하러 바에 올라온 최준하는 발걸음을 옮기려다 멈칫했다.
자기에게는 그 어떠한 눈길도 주지 않는 송지유가 하필이면 제일 싫어하는 두 인간들과 어울려 활짝 웃으며 술자리를 즐기고 있다니.
그들을 그냥 내버려 뒀다가는 화병에 걸려 몸져누울 것처럼 화가 치밀었다.
간신히 이성의 끈을 붙들고 그들을 노려보고 있자, 설영석 이사가 말을 걸어왔다.
“준하 씨, 저 인간들과 마주쳐 봐야 좋을 것 없으니까, 그냥 돌아가자고.”
“…싫습니다.”
“굳이 이곳에서 술을 마실 필요는 없잖아.”
“아니요. 저는 이곳에서 반드시 술을 마셔야겠습니다.”
설영석 이사는 최준하의 의도가 무엇인지 금방 알아차렸다.
겨울과 일행들이 술 마시는 테이블로 달려가서 깽판을 부릴 생각인 것이라고.
그 이후에 어떤 상황이 발생할지 빤히 예상되었기 때문에 그대로 넘어갈 수는 없었다.
“만약에 준하 씨가 저 인간들한테 시비 걸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 것 같은가?”
당연히 송지유는 이곳에서 벌어진 일을 송훈석 회장에게 쪼르르 일러바칠 것이다.
자기는 이미 송훈석 회장에게 찍힌 상태였기 때문에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할 것이 확실했다.
혹여 이를 핑계로 징계 위원회에 회부하기라도 한다면 최악의 경우 대한 그룹에서 쫓겨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대한 그룹을 장악하려는 아버지의 계획에 심각한 차질이 발생할 것만은 분명했다.
아무리 이리저리 따져 봐도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후우, 알겠습니다. 방으로 내려가겠습니다.”
설영석 이사는 다행이라 생각하고 최준하와 대화를 이어 나갔다.
“잘 생각했어. 술은 내일 마시는 것으로 하자고.”
“네, 이사님.”
딸깍!
숙소로 돌아온 최준하는 끌어 오르는 화를 삭이기 위해서 냉장고에서 캔 맥주를 꺼내서 단숨에 입안에 털어 넣었다.
“한겨울, 내가 네놈을 가만히 둘 것 같아!”
최준하는 맥주 캔을 겨울이라고 여기고 강한 힘을 줘서 찌그러트린 후, 휴지통에 던져 넣었다.
딸깍!
그리고 또다시 냉장고에서 캔 맥주 하나를 꺼내서 입속에 들이부었다.
알코올이 몸에 흡수되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데 취기가 오를수록 화는 가라앉지 않고, 오히려 그만큼 머리를 잠식해 갔다.
이 상태로는 잠을 잘 수 없을 것만 같아서 미니바에 있는 작은 양주를 단숨에 비워 버렸다.
침대에 몸을 던졌으나, 바에서 본 광경이 머릿속에 아른거려서 쉽사리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에이, 씨발.”
욕설과 함께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최준하는 숙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 * *
한편, 바에서는 흥겨운 분위기 속에서 여전히 술자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한 부사장님, 인도가 생산한 의약품을 우리나라에 공급해 줄 생각을 하다니, 아이디어 끝내주는데요?”
“부통령님, 그 아이디어는 정호영 씨가 생각해 낸 겁니다.”
“정호영 씨, 정말 대단하십니다.”
마사카 부통령의 칭찬을 받은 호영은 양심의 가책을 심하게 받았다.
사실 그 아이디어는 정상호 사장이 처음으로 언급한 것이었으니까.
사실대로 밝히는 것이 타당하다 생각하고 입을 열려는 순간, 돌발 상황이 발생했다.
바의 출입문이 열리더니 최준하가 자신들에게 곧장 다가왔기 때문이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고 판단 내리고 그는 재빨리 겨울에게 말을 걸었다.
“한 부사장, 최준하가 이곳으로 오고 있어.”
“어디?”
겨울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테이블 가까이로 다가온 최준하와 겨울의 두 눈이 마주쳤다.
“뭘 봐! 씨발 놈아!”
욕설을 내뱉는 최준하의 목소리가 얼마나 크던지, 바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몰렸다.
최준하는 술에 완전히 취해서 이성이 마비되고 수치심도 없어진 상태인 듯했다.
난처한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최준하를 달래서 방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최준하 씨, 취했으면 방으로 돌아가서 쉬세요.”
“싫다, 개새끼야!”
“하아, 이곳에는 당신만 있는 게 아닙니다.”
“그게 무슨 상관인데?”
“당신 때문에 대한 그룹의 이미지가 실추될 거라고 생각해 보지 않았나요?”
“뭐라고 씨불이는 거야? 저 사람들이 나를 알아볼 것 같아?”
최준하의 욕설을 참아 주기에는 겨울의 인내가 이성의 한계까지 도달해 있었다.
어차피 말로 타일러서는 들어 먹을 것 같지도 않고.
겨울은 행동으로 옮기기로 결정 내렸다.
창피함을 무릅쓰고 자리에서 일어나 싸늘한 목소로 맞대응했다.
“최준하, 지금 나한테 욕했냐?”
“그래, 이 씨발 놈아. 억울하면 니도 욕 하든가.”
그 말을 끝으로 갑자기 최준하가 주먹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그때, 놀랄 만한 상황이 발생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건장한 체구의 사람들이 순식간에 최준하를 제압해서 바닥에 넘어뜨린 것이다.
피부색으로 보아 그들은 마사카 부통령의 경호원들이 분명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상황이 발생하면 겁을 집어먹기 마련이지만, 예외의 경우도 있었다.
술에 잔뜩 취한 최준하는 이미 이성을 잃었는지, 온 동네가 떠나가듯 고래고래 소리를 내질렀다.
“야, 이 새끼들아! 내가 누군지 알아!”
겨울이 마사카 부통령에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부통령님, 저 사람의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저 사람이 한 부사장님께 강한 적의를 보이는 이유가 뭡니까?”
“작년에 저 사람과 그다지 좋지 않은 일로 엮인 적이 있었는데, 그때의 앙금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얘기해 줄 수 있습니까?”
“그러기 전에 저 사람을 숙소로 돌려보내야 할 것 같습니다.”
“저 사람이 술이 깰 때까지 저희가 데리고 있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경호원들에 의해서 최준하가 끌려 나가자, 한바탕 회오리가 휩쓸고 간 바에는 다시 평온이 찾아왔다.
겨울은 최준하와 얽힌 인연을 간단하게 풀어놓고, 피식 웃으며 한마디 덧붙였다.
“…저는 마음 한구석에 최준하에 대해서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 그런지 알고 싶네요.”
“최준하 덕분에 아프리카 법인으로 발령 났고, 부통령님까지 만났잖아요.”
“하하하, 그게 그렇게 되는 건가요?”
“이제 최준하의 무례를 용서해 주시는 거죠?”
“그럼요. 물론입니다.”
* * *
“어우, 속 쓰려…….”
최준하는 냉장고에서 찬물을 꺼내 마실 생각으로 천천히 눈을 떴다.
날이 밝지 않았는지 주위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깜깜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자기가 묵고 있는 스위트룸에서는 결코 맡을 수 없는 이질적인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어젯밤의 기억이 문득 떠오른 최준하는 겁이 덜컥 났다.
바에서 자기를 제압한 놈들의 몸놀림이 예사롭지 않던 기억이 언뜻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곳이 자기 룸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큰일 났다는 생각에 분신과도 같은 핸드폰을 찾았지만, 어디에 있는지 만져지지 않았다.
“에이, 씨발 놈들. 핸드폰도 빼앗아 가다니.”
투덜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와 손으로 더듬거려가며 벽에 부착되어 있는 스위치를 찾아 전원을 켰다.
예상한 대로 싸구려 가구로 인테리어 되어 있는 낡은 룸이 눈에 들어왔다.
쓰린 속을 달래는 것이 먼저였기 때문에 일단 냉장고에서 생수병을 꺼내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이곳에서 마냥 넋 놓고 있을 수는 없어서 재빨리 바닥에 널브려져 있는 옷들을 챙겨 입고 방문 손잡이를 돌렸다.
문이 열리지 않았다.
이제는 살아야겠다는 원초적인 본능만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쾅쾅!
손으로 문을 두드리며 큰 소리로 외쳤다.
“살려 주세요!”
덜컥.
그다지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난 후, 객실 문이 열리며 건장한 체구의 흑인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겁을 잔뜩 집어먹은 최준하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잔뜩 움츠렸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람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봐, 영어 구사할 수 있나?”
“…네.”
“네놈의 목숨은 한겨울 부사장님이 살려 줬다는 것만 알고 있어.”
최준하는 그의 얘기가 이해되지 않았지만,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였다.
“네? 네… 알겠습니다.”
“한 부사장님을 만나면 고맙다는 인사를 꼭 하고.”
“그,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제 가 봐.”
하지만 최준하는 객실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저… 핸드폰을 되돌려 받았으면 좋겠습니다만…….”
“네놈이 입고 있는 외투의 주머니를 확인해 봐.”
최준하는 재빨리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서 핸드폰이 있는지 확인했다.
손에 잡히는 핸드폰.
이제 이들과 같이 있어야 할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에 후다닥 객실 문을 열고 뛰어나갔다.
이리저리 헤맨 끝에 룸 문 앞에 도착한 최준하는 또다시 난감한 상황에 처했다.
아무리 주머니를 뒤져봐도 카드 키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금 전, 일반 객실에 떨어뜨리고 온 것이리라.
카드 키를 찾으러 되돌아가는 것이 맞았지만, 그 룸을 다시 찾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에이, 씨발…….”
프론트로 내려간 최준하는 또다시 난감한 상황에 빠졌다.
카드 키를 재발급 받기 위해서는 여권 또는 신분증이 있어야 하는데, 숙소 안에 두고 나왔기 때문이다.
호텔 직원에게 본인이 맞다고 몇 번이나 얘기를 꺼냈지만, 규정상 어쩔 수 없다는 말만 되돌아올 뿐이었다.
아침이 오려면 아직도 다섯 시간 가까이 남아 있는 상황.
이곳에서 직원과 실랑이를 벌이며 마냥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기에 설영석 이사를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딩동.
10분 넘게 설영석 이사의 숙소 앞에 서 있던 최준하는 짜증이 물밀 듯이 몰려왔다.
수십 번이 넘도록 초인종을 눌렀지만, 출입문이 열리지 않았다.
핸드폰의 배터리가 모두 닳은 상태였기 때문에 전화를 걸 수도 없었다.
“에이, 씨발… 왜 이리 재수가 없어.”
또다시 프론트로 내려온 최준하는 직원에게 충전기를 빌려서 핸드폰에 연결한 후, 설영석 이사한테 전화를 걸었다.
[…이 시간에 웬일이야?]
깊은 잠에 빠져 있다가 전화를 받았는지, 그의 목소리가 심하게 잠겨 있었다.
“이사님, 조금 있다가 갈 테니까, 문 좀 열어 주세요.”
[왜?]
사실대로 얘기하면, 싫은 소리를 들을 것이 빤하기 때문에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카드 키를 숙소에 두고 나왔어요.”
[이 시간에 숙소 밖으로 나온 이유가 뭐야?]
“잠이 안 와서 잠깐 산책 나왔어요.”
[하아, 알았어. 빨리 올라와.]
객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최준하의 모습을 지켜본 설영석 이사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음을 알아챘다.
그가 입고 있는 옷이 어젯밤에 입고 있던 옷과 똑같았기 때문에.
“준하 씨, 도대체 무슨 일이야?”
“이사님, 지금 피곤해서 그러니까, 한숨 자고 일어나서 아침에 말씀드리면 안 될까요?”
“알았어. 저 방에 들어가서 자라고.”
꾸벅 인사한 최준하가 재빨리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설영석 이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중얼거렸다.
“이거… 썩은 동아줄을 잡은 건 아니겠지……?”
* * *
설영석 이사는 은근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침 8시가 되도록 불청객 최준하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전 9시에 전체 회의가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지금 일어나지 않으면, 늦을 가능성이 있었다.
“아이고, 내 팔자야…….”
그는 탄식을 내뱉고 방문을 열고 들어가서 최준하를 흔들어 깨웠다.
“준하 씨, 이제 일어나야 할 시간이야.”
“이사님, 지금이 몇 시입니까?”
“8시가 조금 넘었어.”
“네?! 벌써요?”
최준하가 화들짝 놀라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빨리 씻고 아침 먹으러 가자고.”
준비를 끝내고 객실 문을 열고 나가던 두 사람은 복도에서 우연찮게 조병석 실장과 마주쳤다.
“설 이사, 지금 어떤 상황인지 얘기해 보세요.”
설영석 이사는 거리낄 것이 없었기 때문에 사실 그대로 얘기했다.
“…할 수 없이 제 숙소에서 재운 겁니다.”
“최준하 씨, 설 이사의 말이 맞나?”
“네, 그렇습니다.”
조병석 실장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최준하가 거짓말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최준하 씨, 그런데 밤에 그 옷을 입고 잤나 봐?”
최준하는 자신의 거짓말이 발각됐다는 생각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난 상태였다.
재빨리 변명거리를 생각해 내고, 그의 질문에 대답했다.
“어젯밤에 피곤해서 갈아입지 못하고 그대로 잠들었습니다.”
“믿어 줄게. 이제 하나만 더 물어보자고.”
“네, 말씀하십시오.”
“직원들은 2인 1실을 사용하기로 되어 있는 사실은 알고 있겠지?”
“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으로 가지 않고, 왜 설 이사의 숙소를 찾아갔는지 이유를 설명해 봐.”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