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거짓말의 대가
“지유야, 내가 보고 싶어서 찾아온 거야?”
최준하의 능글거리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 송지유는 솜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최준하 씨, 입사 선배한테도 반말을 사용하나요?”
“에이, 아는 사람끼리 왜 그래?”
“그래서 아는 사람한테는 반말을 사용해도 된다는 것인가요?”
“너무 그러지 마. 내가 너보다 나이가 많잖아.”
“최준하 씨, 나이를 따지려거든 회사를 그만두세요.”
“여전히 까칠하네.”
“10분 뒤에 공항 2층에 위치한 회의실에서 회의가 있으니까, 그곳으로 오세요.”
“알았어.”
송지유가 매몰찬 표정을 지으며 돌아가자, 최준하는 씨익 웃으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송지유, 아무리 버텨 봐야 결국에는 내 품에 안기게 될 거다.”
그가 중얼거리는 사이, 설영석 이사가 다가와 말을 건넸다.
“준하 씨, 송지유가 뭐라고 했는데?”
“조금 있다가 회의가 있답니다.”
“에이, 여기까지 와서 꼭 회의를 해야 하나?”
“어휴, 저도 마침 이사님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저런 것도 매력 아니겠습니까?”
* * *
회의실 출입구에 도착한 두 사람은 잔뜩 굳은 표정으로 서 있는 조병석 실장과 맞닥뜨렸다.
두 사람은 그를 피해 조용히 회의실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세상사가 마음먹은 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뿐이다.
“설영석 이사, 최준하 씨, 잠시 나 좀 봅시다.”
“네, 실장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판단한 두 사람은 재빨리 조병석 실장 앞에 부동자세로 섰다.
“설 이사, 당신의 임무가 뭐야?”
“회장님의 수행원입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지금 나타나는 이유가 뭔가?”
“죄송합니다.”
“지금 당신은 프랑스에 놀러 간다고 생각하나?”
“아닙니다.”
‘이 인간이 오늘따라 까칠한 이유가 뭘까? 혹시… 송지유가 고자질했나?’
최준하가 혼자만의 상상에 빠져 있는 사이에도 조병석 실장의 질책은 계속됐다.
“당신의 복장은 또 뭐야? 수행원들은 정장을 입으라는 출장 안내문을 읽어 보지 않았어?”
당연히 읽어 봤다.
다만, 수행원의 복장 규정은 프랑스에서부터 적용되는 것으로 착각했을 뿐.
변명하면 할수록 일이 커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설영석 이사는 쿨하게 사과했다.
“실장님, 제가 깜빡했습니다.”
“설 이사, 하나만 물어보자고. 최준하 씨와 도대체 어떤 관계야?”
“직장 상사와 부하 직원 사이일 뿐입니다.”
“그런데 최준하 씨를 데리고 다니는 이유가 뭐야? 당신이 멘토야?”
순간, 설영석 이사는 놀라서 까무러칠 뻔했다.
얼마 전에 생태탕 집에서 자신과 언쟁을 벌인 놈이 혀를 끌끌 차며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하도진이라는 이름을 출장 명단에서 본 기억은 없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아보고 싶었지만, 분위기가 너무 엄중해서 차마 실행으로 옮기지 못했다.
일단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끄고, 영문을 파악해 보기로 결정했다.
“절대 아닙니다.”
“당신은 잠시 대기하고 있어.”
조병석 실장은 냉랭한 시선을 최준하에게 돌렸다.
“최준하 씨, 대한 그룹에 입사한 지 얼마나 됐나?”
“5개월 조금 넘었습니다.”
“신입사원이면 신입사원답게 행동해야 하는 거 아니야?”
“저는 지금까지 신입사원이라는 본분을 망각한 적이 없습니다.”
“신입사원들 중에서 임원들과 스스럼없이 노닥거릴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된다고 생각하나?”
최준하는 가슴 저 밑에서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자기가 대한 그룹 3대 주주인 최성진 부회장의 외아들이라는 사실을 조병석 실장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일반 신입사원처럼 취급하고 있었으니.
이번에 대차게 받아 보기로 마음먹었다.
“실장님, 저는 임원들과 충분히 어울릴 수 있을 만한 자격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근거로?”
“실장님께서도 제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고 계시잖습니까.”
“최 부회장님이 당신의 비서로 설 이사를 붙여 줬다고 판단하면 되나?”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부회장님이 그렇게 결정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저에게 경영 수업을 시켜 주기 위함입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설영석 이사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사실 자기가 최준하와 어울리고 있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출세의 도구.
그런데 최준하는 거꾸로 자기를 개인비서쯤으로 여기고 있다니.
이참에 그와 선을 분명하게 긋지 않으면, 회사 생활이 고달파질 것이 분명했다.
“실장님, 저는 최 부회장님께 그런 지시를 받은 적이 없습니다.”
“설 이사, 그럼 최준하 씨가 거짓말하고 있다는 건가?”
“네, 그렇습니다.”
“최준하 씨, 누구 말이 맞는 거야?”
이제는 도저히 방법이 없었다.
최준하는 사과하려고 입을 열려는 순간, 놀랄 만한 상황을 목격했다.
원수 놈이 웃는 얼굴로 송지유와 대화를 나누며 자신들 곁으로 걸어오는 게 아닌가.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이성을 잃어버렸다.
“이 개새끼가!”
“최준하 씨, 지금 나한테 욕한 건가?”
갑자기 주위에 살얼음이 쫙 깔리기 시작했다.
최준하는 정신이 퍼뜩 들었다.
한겨울한테 내뱉은 욕설이었다고 변명해야 하지만, 심각한 문제가 하나 있었다.
한겨울이 송지유와 함께 회의실 안으로 사라진 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구구절절 변명을 늘어놓는 것도 우스웠지만, 설사 그렇다고 해도 조병석 실장이 믿어 줄 가능성은 없었다.
일단 무섭게 내리는 소나기부터 피하기로 결정 내렸다.
“…실장님께 욕한 것이 아닙니다.”
“그럼 설 이사한테 욕한 것인가?”
“뭐, 이놈이!”
조병석 실장보다 설영석 이사의 반응이 먼저 나왔다.
설영석 이사가 얼마나 크게 소리를 질렀는지 회의실 안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문을 열고 나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회의실 안으로 입장하기 위해서 다가오던 송훈석 회장이 그 광경을 고스란히 목격했다.
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조병석 실장에게 지시 내렸다.
“조 실장, 어떤 상황인지 보고해 봐.”
“이곳에서는 말씀드리기 곤란합니다.”
“비어 있는 회의실이 있나?”
“혹시 몰라서 하나를 더 빌렸습니다.”
“그곳에서 얘기하는 것으로 하고, 회의는 조금만 연기해.”
“네, 회장님.”
회의실로 들어가 상석에 앉은 송훈석 회장이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조 실장,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거야?”
“설 이사와 최준하 씨가 수행원의 자세를 망각한 것 같아서…….”
조병석 실장은 조금 전에 벌어진 상황에 대해서 자세하게 보고했다.
“조 실장, 최준하 씨가 누구한테 욕설을 내뱉은 것 같은가?”
“정황상 저한테 욕한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최준하 씨, 조 실장의 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최준하는 미치고 팔짝 뛰고 싶은 심정이었다.
겨울에게 내뱉은 욕설이라고 대답하고 싶었으나, 믿어 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조병석 실장을 끌고 들어갈 수도 없었고.
제일 만만한 사람이 설영석 이사였지만, 조금 전처럼 강하게 반발할 것은 빤한 사실.
눈앞에는 바닥을 알 수 없는 낭떠러지가 펼쳐져 있고, 뒤에는 며칠 동안 굶은 호랑이가 입을 쩍 벌리고 있는 형국이었다.
아무리 짱구를 굴려 봐도 묵비권이 최선이었다.
“…….”
“최준하 씨, 내 말이 말 같지 않나?”
“…죄송합니다.”
최준하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조 실장,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으면 좋겠나?”
“최준하 씨가 저한테 욕설을 내뱉은 것에 대해서는 그냥 묵과할 수 없습니다.”
“징계 위원회에 회부해서 징계를 내릴 생각인가?”
“네, 그렇습니다.”
조병석 실장과 대화를 종료한 송훈석 회장은 서동호 실장에게 말을 걸었다.
“서 실장, 직장 상사에 욕설을 내뱉은 경우 징계 수위가 어떻게 되나?”
“정직 이상 처분이 가능합니다.”
“너무 가혹한 것 아니야?”
“몇 년 전에 이와 유사한 사례가 있었고, 그 회사는 직원에게 정직 2개월의 징계 처분을 내렸습니다. 그 직원은 징계가 부당하다며 소송을 걸었지만, 법원은 회사 측 손을 들어 줬습니다.”
“법원이 그렇게 판결 내린 근거가 무엇인가?”
“직장 내의 위계질서를 해치는 것과 취업 규칙에 어긋난다는 점을 들었습니다.”
“만약에 우리 회사에서 최준하 씨한테 징계를 내린다면, 어떤 처분을 받게 될 것 같은가?”
서동호 실장은 송훈석 회장의 의도를 단숨에 이해했다.
이참에 최근에 노골적으로 야욕을 드러내고 있는 최성진 부회장을 코너로 몰아 버릴 의도인 것이다.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하고, 그의 질문에 대답했다.
“해고를 예상하고 있습니다.”
“너무 심한 거 아니야?”
“만약에 최준하 씨가 즉각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했으면, 아무 일도 없이 넘어갔을 겁니다. 하지만 최준하 씨는 정반대로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고, 회장님의 물음에도 묵비권을 행사했습니다.”
최준하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신입사원 연수 시절에 해고당하고, 대한 그룹에 재입사하기 위해서 얼마나 절치부심했단 말인가.
그런데 1년 만에 또다시 해고당하게 생겨 버렸다.
어떻게든 해고를 막기 위해서 아버지가 힘을 쓰겠지만, 송훈석 회장의 결정을 되돌릴 수 있을 정도의 힘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만약에 자기가 해고당하면, 아버지와 자신의 꿈은 영원히 이루지 못한 꿈으로 남게 될 것이다.
게다가 아버지의 노골적인 냉대는 또 어떻게 견딜지.
무릎 꿇고 비는 방법이 최선이었지만, 지금 당장 실행으로 옮길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이 워낙 심각한 내용으로 대화를 주고받고 있기 때문에.
“서 실장, 최준하 씨를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겠는가?”
“일단 회사로 돌려보내고, 프랑스 출장이 끝난 후에 징계위원회를 열겠습니다.”
“최 부회장한테 오늘 일어난 사건을 통보해 줘.”
“네, 회장님.”
짧게 대답한 서동호 실장은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스피커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서 실장이 웬일입니까?]
“최 부회장님,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무슨 일이 발생했습니까?]
“최준하 씨가 조병석 실장한테 하극상을 저질렀습니다.”
서동호 실장은 조병석 실장에게 들은 얘기와 송훈석 회장과 나눈 대화를 가감 없이 전달했다.
“…문제는 최준하 씨가 아직까지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아…….]
최성진 부회장의 낙담하는 소리가 수화기를 통해서 들려왔다.
“부회장님,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면 좋겠습니까?”
[서 실장, 제가 대신 사과하면 안 됩니까?]
“저보다는 조 실장한테 사과하는 것이 어떨까요?”
[…옆에 있으면 바꿔 주세요.]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서동호 실장한테 핸드폰을 건네받은 조병석 실장은 쓴소리부터 꺼내 들었다.
“부회장님, 최준하 씨를 너무 오냐오냐하며 키운 것 같습니다?”
[조 실장, 모든 것이 제 부덕의 소치입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 주십시오.]
사실 조병석 실장은 최준하를 반드시 프랑스로 데리고 가야 할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적당한 시점에 용서해 줄 생각이었다.
당연히 지금 당장은 아니었지만.
“부회장님께서 최준하 씨의 경영 수업을 위해서 설영석 이사를 비서로 붙여 줬습니까?”
[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최준하 씨는 부회장님께서 그렇게 지시했다고 저한테 얘기했습니다. 회장님도 송지유 씨한테 비서를 붙여 주지 않았는데, 너무 앞서가시는 거 아닙니까?”
[조 실장, 나는 내 아들놈한테 비서를 붙여 준 적이 없습니다.]
“그럼 최준하 씨가 저한테 거짓말한 거겠네요?”
[크흠, 조 실장의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이번 한 번만 부회장님을 생각해서 최준하 씨를 용서해 주겠습니다. 다음에 이와 같은 일이 또 발생하면, 그때는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조 실장.]
“그럼 나중에 전화하겠습니다.”
* * *
조병석 실장과 통화를 끝낸 최성진 부회장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벽에다 집어 던졌다.
퍽!
핸드폰 파편이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아악!”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았다.
그는 고성을 내지르며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퍽!
퍽, 퍽!
쨍그랑!
우지끈!
집무실 한쪽 구석에 세워져 있는 골프채를 손에 쥐고 눈에 보이는 것들을 산산조각 내기 시작했다.
그나마 온전하게 남아 있는 것은 책상과 소파밖에 없었다.
댕그랑!
기력이 다한 최성진 부회장이 골프채를 집어 던지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손수건을 꺼내서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 내며 비서에게 시원한 물을 가지고 오라고 지시 내렸다.
시원한 물을 벌컥벌컥 마신 최성진 부회장은 손에 들고 있던 물잔마저 벽에 집어 던졌다.
“하아, 아들이 하나만 더 있었어도…….”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