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엉뚱한 추측
그날 밤.
강남의 고급 주점에서는 최성진 부회장이 설영석 이사 등과 양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설 이사, 송 회장이 우리 준하를 수행원 명단에 포함시킨 이유를 알아봤나?”
설영석 이사는 오늘 오전에 발표된 송훈석 회장의 프랑스 출장 수행원 명단을 확인하는 순간, 진심으로 깜짝 놀랐다.
자기는 그렇다 하더라도 신입사원에 불과한 최준하가 떡하니 수행원 명단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하던 도중에 최성진 부회장에게 전화를 받았고, 결국 이렇게 술자리까지 불려 온 것이다.
그에게 질문 받을 것을 대비해서 이유를 하나 생각해 놓고 있었지만, 정답이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회장님의 수행원 명단에 송지유가 포함되어 있는 것과 상관있는 것 같습니다.”
“뭐야? 송지유도 포함되어 있다고?”
“네, 그렇습니다. 회장님이 송지유의 남편감으로 준하 씨가 어울리는지 확인해 보려고 포함시킨 것 같습니다.”
“하하하, 그렇다는 말이지?”
만족한다는 듯 최성진 부회장이 큰 웃음을 터트렸다.
설영석 이사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대한 그룹에서 해고된 후 최성진 부회장이 개인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회사를 경영하고 있는 박철헌 사장이 입을 열었다.
“설 이사, 준하 군이 송 회장의 눈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프랑스어는 고사하고 문서 작성 능력은 개판이지, 감정 조절하는 능력까지 형편없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다고 대답하면 100%의 확률로 술판이 깨질 것이 분명했다.
설영석 이사는 두뇌를 풀가동해서 그럴듯한 아이디어를 하나 생각해 냈다.
“준하 씨가 프랑스를 여러 번 다녀왔다고 하니까, 가이드 역할을 맡기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 방법도 나쁘지 않겠군. 그나저나 송 회장의 프랑스 출장 목적을 확인해 봤나?”
“우간다와 탄자니아를 연결하는 송유관 건설공사를 수주하기 위해서 토탈의 뿌요네 회장을 만날 예정입니다.”
“송유관 건설공사는 국제 입찰을 통해서 낙찰자를 결정하는 게 아니었나?”
“우간다 유전을 토탈과 공동으로 개발할 CNOOC 측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해서 무기한 연기 된 상태입니다.”
“어떤 문제인지는 모르고?”
“네.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최성진 부회장은 CNOOC가 우간다 유전의 지분을 취득한 경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지분을 소유하고 있던 영국의 석유 회사를 CNOOC 측에 소개시켜 준 사람이 바로 자기였으니까.
어떤 문제가 있는지 파악해 보기 위해서 평소에 알고 지내던 사람에게 전화 걸었다.
[최 부회장님, 오랜만입니다.]
“장징궈 사장님, 늦은 시간에 연락드린 건 아니겠죠?”
[그럼요. 우리 중국은 이제 겨우 8시가 조금 넘었을 뿐입니다.]
“사실은 조금 전에 이상한 소문을 들어서 연락드렸습니다.”
[어떤 소문인지 말씀해 보십시오.]
“우간다와 탄자니아를 연결하는 송유관 건설공사 입찰이 무기한 연기됐다고 들었습니다.”
[아, 그것은 우리 회사가 보유하고 있던 우간다 유전의 지분을 토탈에 매각했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지분을 매각한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우리가 자체적으로 조사해 본 결과, 우간다 유전의 경제성이 엄청나게 떨어지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최성진 부회장은 100% 거짓말이라고 판단했다.
세계 5대 메이저 석유 회사의 한자리를 당당하게 차지하고 있는 토탈이 어떤 회사인가.
그 회사가 경제성이 떨어지는 유전에 투자한다는 얘기는 해가 서쪽에서 뜬다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무언가 사연이 있는 것이 분명했지만, 물어봐야 제대로 대답하지 않을 것이 빤하기 때문에 더 이상 파고들지 않기로 결정했다.
“장 사장님, 친절하게 답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다음에 통화하십시다.”
딸깍.
장징궈 사장과 통화를 끝낸 최성진 부회장은 설영석 이사한테 말을 걸었다.
“CNOOC가 우간다 유전 지분을 토탈에 얼마에 매각했는지 비밀리에 파악해 봐.”
‘혹시… 부회장님이 우간다 지분을 인수하려는 게 아닐까?’
재빨리 결론을 내린 설영석 이사는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잠시 대화가 중단된 틈을 타서 박철헌 사장이 발언권을 요청했다.
“부회장님, 만약에 대비하기 위해서 제가 미리 프랑스에 들어가 있을까요?”
“음, 그것도 나쁘지 않겠군.”
“제가 이번에 CNOOC의 지분을 어떻게든 인수해 보겠습니다.”
“알았어. 이제 술이나 마시자고.”
* * *
프랑스 출장 당일.
겨울은 호영과 함께 김포공항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정호영, 나중에 딴소리하기 없기다.”
사실 호영이 무보수 통역이라는 이유를 대면서 프랑스에 쫓아가려는 목적은 따로 있었다.
그 얘기를 지금 꺼내면 겨울에게 한 소리 들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숨기기로 결정했다.
“염려 마라.”
“이제 업무 얘기 좀 해 보자. 우리 회사와 의약품 공급 계약은 끝냈니?”
호영은 그 문제만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SH무역이 다섯 개 나라에 공급해야 할 의약품 물량은 모두 35억 달러.
제약 회사들은 납기가 촉박하다는 이유로 이미 생산에 돌입한 상태였다.
그들은 계약금 명목으로 10% 정도를 지급받기를 원하고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자신들에게는 3억 5,000만 달러라는 거금이 없다는 것에 문제가 있었다.
현재 계약 절차를 진행하고 있기 때문에 선급금을 받지 못한 결과였다.
가쿠타 부장에게 계약을 서두르자고 요청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 같았다.
― 아직 H&E 트레이딩이 최종 바이어와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다.
은센기 사장의 반응도 마찬가지.
가쿠타 부장과 같은 답변을 늘어놓을 뿐이었다.
호영은 두 사람의 얘기를 겨울에게 전하고 겨울이 나서서 해결해 줄 것을 요청했다.
“우리 회사의 신뢰성에 금이 가고 있는 중이니까, 네가 어떻게든 해결책을 마련해 주라.”
“잠깐만 기다려 봐.”
호영과 대화를 중단한 겨울은 즉시 은센기 사장한테 전화를 걸었다.
[네, 한 부사장님.]
“은센기 사장님, 의약품 물량 확정이 지연되는 이유가 뭡니까?”
[저도 그 문제 때문에 VIP분들과 통화해 봤는데, 이삼 일만 기다려 달라는 얘기밖에 들은 게 없습니다.]
겨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콩고민주공화국, 탄자니아, 우간다는 중국의 CTG, CNOOC로부터 피해 보상금 명목으로 5억 달러가 넘는 돈을 받았기 때문에, 의약품 발주량을 늘리기 위해 계약 지연은 어느 정도 예상된 일이었다.
하지만 해당 사항이 없는 나이지리아와 알제리는 일찌감치 의약품 발주를 확정해 줘도 상관이 없었다.
어찌된 일인지 두 나라도 똑같이 2∼3일만 기다려 달라고 요청하고 있었지만.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문득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설마… 협상 내용 유출 건과 관련해서 중국과 딜을 벌이고 있는 거 아니야? 에이, 아니겠지?’
자문자답을 끝낸 겨울은 은센기 사장과 통화를 이어 나갔다.
“SH무역이 제약 회사에 지급할 계약금이 필요하다고 하니까, 방법을 연구해 보세요.”
[안 그래도 최종 바이어들께 부탁해 놓은 상태입니다.]
“그럼 나중에 또 전화하겠습니다.”
은센기 사장과 통화를 끝낸 겨울은 찜찜한 생각을 털어 내지 못하고, 오코사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 부사장님, 아직 프랑스로 출발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나라 시간으로 오후 3시에 출발할 예정입니다.”
[저한테 어쩐 일로 전화하셨습니까?]
“실장님, 혹시 중국과 딜을 벌이고 있습니까?”
[어! 알고 계셨네요?]
“네?! 정말입니까?”
겨울이 진심으로 놀랐다는 듯 큰 목소리로 되물었다.
[중국에 정신적인 피해 보상금을 청구하라고 하신 분이 누구신데요?]
“그것은 엄포용이었잖아요.”
[저는 부투야 실장에게 그런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그나저나 중국과 어떤 내용의 딜을 벌이고 있습니까?”
[협상 내용을 유출한 범인이 우리나라로 밝혀지면, 200억 달러를 페널티로 지급해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와 반대로 범인이 제3자로 밝혀지면, 정신적인 피해 보상금으로 10억 달러를 지급해 달라고 요구했고요.]
겨울은 오코사 실장의 비범함에 혀를 내둘렀다.
만약에 그가 중국과 딜을 벌이면서 정신적인 피해 보상금으로 100억 달러를 요구했으면, 딜 자체가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유는 중국 측도 정보를 유출한 범인을 확실하게 모르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하지만 피해 보상금이 10억 달러로 줄어들면 기꺼이 딜을 벌일 만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중국은 딜에서 이길 경우 100억 달러라는 엄청난 부수입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오코사 실장은 이 점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중국 정부에 딜을 건 것이다.
자신의 추측이 맞는지 물었다.
[네. 정확하게 맞습니다.]
“실장님, 미국은 어떤 방법으로 정보를 공개한다고 합니까?”
[그 문제와 관련해서 루퍼트 국무장관과 통화했는데, 언론사가 미국 정보기관으로부터 정보를 입수해서 특종을 터트리는 형식을 사용할 예정이랍니다.]
겨울은 특종 발표 이후에 벌어지는 상황을 짧게 예상해 보았다.
당연히 중국 정부는 미국 정부에 강력하게 항의할 것이다.
이에 대해 미국 정부는 특유의 NCND(Neither Confirm Nor Deny) 정책을 사용하면서 얼굴 두껍게 대응할 것이고.
종국에는 언제나 그래 온 것처럼 지루한 신경전을 벌이다가 흐지부지되고 말 것이다.
“실장님, 디데이가 언제입니까?”
[미국 시간으로 오전 9시에 CNN 뉴스 속보로 내보낸다고 합니다.]
“그래봐야 몇 시간 안 남았네요?”
[네, 그렇습니다.]
“만약에 중국 정부가 10억 달러를 지급하지 못하겠다고 버티면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지난 2월 말에 정명훈 사장님께서 바하리 대통령님께 뭐라고 조언했는지 기억하고 계십니까?]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
중국 건설사들이 나이지리아에서 진행하고 있던 공사 현장을 파손하면, 국교단절과 동시에 나이지리아에 산재하고 있는 중국인들의 자산을 모두 몰수하라고 조언한 것을.
“실제로 행동으로 옮길 생각입니까?”
[당연히 그럴 예정입니다.]
“다른 나라들도 같은 상황입니까?”
[물론입니다.]
“하여간 건투를 빕니다.”
[한 부사장님, 우리가 중국 정부로부터 피해 보상금을 받으면, 어디에 사용할 예정인지 알고 계시죠?]
“아이고.”
앞으로 닥칠 상황을 깨달은 겨울이 즐거운 탄식을 내뱉었다.
[하하하, 나중에 또 통화합시다.]
“네, 실장님.”
딸깍.
겨울이 전화를 끊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호영이 다급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져 왔다.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이야?”
“너희 회사의 일감이 더블로 늘어날 것 같다.”
“설마… 의약품은 아니겠지?”
“왜 아니겠냐?”
“납기는 어떻게 되는데?”
“아무리 길게 줘도 올해를 넘기지 않을 것 같다.”
“아이고… 진짜로 돌아 버리겠네.”
호영이 머리를 감싸 쥐며 탄식을 내뱉었다.
* * *
김포공항 라운지의 한쪽 구석자리에서는 설영석 이사와 최준하가 쑥덕공론을 벌이고 있었다.
“설 이사님, 제가 수행원 명단에 포함된 이유를 알고 계세요?”
“회장님이 준하 씨와 송지유가 어울리는지 확인해 보려는 게 아닐까?”
“에이, 설마요.”
“그 이유 말고 다른 이유가 있으면 얘기해 봐.”
최준하는 설영석 이사의 말이 일리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자기가 송훈석 회장의 수행원으로 발탁될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 가시처럼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전략기획실에 배치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송지유와 꾸준히 접촉을 시도해 봤지만, 말 한 번 제대로 섞어 본 적이 없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송훈석 회장이 밀어붙인다고 해도 송지유가 자기에게 마음을 열지 않으면 결혼으로 이어질 수 없다.
그야말로 특단의 대책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설 이사님, 송지유한테 호감을 살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준하 씨는 프랑스가 명품의 천국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나?”
“돈은 송지유도 많잖아요.”
“명품을 내 돈 주고 구입하는 것과 선물 받는 것 중에 어느 것이 감동이 더 클까?”
“그야…….”
하지만 최준하는 말을 이어 나갈 수 없었다.
당사자인 송지유가 라운지 문을 열고 들어왔기 때문에.
“준하 씨, 송지유는 질척대는 것을 싫어하니까, 신사적으로 대하도록 하라고.”
“걱정 마십시오.”
최준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송지유에게 다가갔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