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받은 만큼 돌려줄 생각입니다
대형 빌딩들이 운집한 여의도에서 주중에 여유로운 점심 식사를 즐기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겨울 등은 대한 그룹과의 회의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서 어쩔 도리 없이 여의도 식당가를 찾았다.
겨울은 간단하게 점심을 때우고 싶었으나, 하도진 실장은 몇 년 전까지 단골로 다니던 생태탕 집을 가 보고 싶다면서 겨울과 홍석훈 기사를 막무가내 이끌었다.
한국에 귀국하자마자 휴가도 가지지 못하고 업무에 매진하고 있는 그의 부탁을 외면할 수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생태탕 집의 문을 열고 들어갔지만, 역시나 식당 내부는 많은 손님들로 꽉 들어차 있었다.
때마침 점심 식사를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손님들이 있어서 기다리지 않고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겨울은 자리에 앉다가 우연찮게 옆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불과 1년 전이었다면 똥이라 생각하고 시선을 돌렸겠지만,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180도 바뀌었다.
겨울은 피하지 않고 그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최준하 씨, 오랜만입니다.”
사실 최준하는 겨울이 말을 걸어오기 전까지 그가 누구인지 한눈에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겨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가 누구인지 알아챘다.
그와 동시에 신입사원 연수 당시 겨울과 장대산에게 뒤통수를 맞고 연수원에서 쫓겨난, 쓰라린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대한 그룹에서 해고당한 이후, 재입사하기 위해서 얼마나 절치부심했단 말인가.
그런데 쓰레기 같은 놈이 입가에 미소까지 보이며 자기에게 말을 걸어온 것이다.
갑자기 울화가 벌컥 치밀었다.
“네놈이 여기는 웬일이냐? 그 실력에 본사로 발령받았을 가능성은 절대로 없고.”
겨울은 최준하의 말에서 커다란 힌트를 하나 얻었다.
그는 아직도 자기가 대한 그룹에 몸을 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는 사실을.
그의 반응이 진심으로 궁금하던 겨울은 한마디 툭 내뱉었다.
“입사 선배한테 반말이나 찍찍 내뱉는 것을 보니, 멀어도 아직 한참 멀었군.”
“이 개새끼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오른 최준하가 소리를 버럭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겨울은 씨익 웃으며 최준하에게 응수했다.
“최준하, 여기는 너희 집이 아니다. 앉아라.”
그때, 최준하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중년 남자가 다짜고짜 목소리를 높였다.
“어이! 젊은 친구가 너무 무례한 것 아니야!”
“네? 제가 어떤 무례를 저질렀습니까?”
“당신은 이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나 보네?”
그때, 돌발 상황이 발생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하도진 실장이 언쟁에 참전한 것이다.
“역시 개 버릇 남 못준다는 말이 맞는 것 같네요.”
“네놈은 또 뭐야!”
“겨우 5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얼굴도 몰라보다니. 정말 섭섭한데요?”
겨울은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하도진 실장의 눈을 보는 순간, 중년 남자가 누구인지 단숨에 알아챘다.
설영석 이사.
하도진 실장이 5년 전에 전략기획실 기획1팀에서 차장으로 근무하고 있을 당시의 직속상사.
그가 팀원들을 위해서 당시의 설영석 팀장에게 바른 소리 한마디 했다가, 온갖 좋지 않은 소문을 퍼트려서 결국 아프리카 법인까지 쫓기듯 떠나게 만들어 버린 사람.
철전지 원수를 눈앞에서 만났는데, 하도진 실장이 가만히 앉아 있기를 바라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겨울이 짧은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두 사람의 설전은 계속 이어졌다.
“아, 기억나네. 나한테 하극상을 저지른 놈 아니야?”
“그 당시에 당신이 처신을 똑바로 했으면, 내가 덤비진 않았겠죠.”
“당신?”
“나한테 놈이라고 하는데, 내가 왜 당신이라고 하면 안 됩니까?”
“너, 내가 누군지 몰라서 하는 소리야!”
“대한 그룹 이사가 무슨 벼슬이라도 됩니까?”
“뭐? 이런 또라이 같은 게 있나.”
설영석 이사가 소리를 버럭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도진 실장은 천천히 일어나서 그의 앞에 마주섰다.
“여기는 자리가 비좁으니까, 밖으로 나가서 한판 붙어 보실까요?
“뭐? 무슨 개소리를… 어휴, 내가 더러워서 피하고 말지. 두고 봐. 내가 네놈을 가만히 두면 사람이 아니다.”
더럭 겁을 집어 먹었는지, 설영석 이사가 의자에 걸어 놓은 외투를 집어 들고 식당 밖으로 쌩하니 나가 버렸다.
눈치를 보고 있던 최준하도 슬금슬금 뒷걸음치다가 자리를 떴다.
“설영석 이사,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그들이 나간 현관을 죽일 듯 노려보며 하도진 실장이 자리에 다시 앉았다.
그 모습을 보고 겨울이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실장님, 이제 속이 후련하십니까?”
“후련하다니요. 제가 저 인간한테 당한 수모를 되갚아 주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까,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천천히 제대로 복수하세요.”
“그건 그렇고, 부사장님과 설전을 벌인 그 최준하라는 녀석은 누구입니까?”
겨울은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고, 하도진 실장의 질문에 대답했다.
“최성진 부회장의 외아들입니다.”
“음, 부사장님은 저 인간과 어떤 악연이 있습니까?”
“저 인간이 입사 동기들과 작당해서 저한테 해코지를 가하려다가, 장대산 부사장한테 되치기 당해서 회사에서 해고당했어요.”
“아, 그 유명한 신입사원 집단 해고 사건의 주범이 저놈이었습니까?”
“네. 저놈이 최 부회장을 동원하는 바람에 저는 아프리카 법인으로 발령받아 간 거고요.”
“저놈을 그냥 내버려 둘 생각은 아니시죠?”
“당연히 아니죠. 제가 받은 만큼 돌려줄 생각입니다.”
조용히 앉아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홍석훈 기사가 은근슬쩍 대화에 끼어들었다.
“하 실장님, 아까 하신 말씀 중에서 개 버릇 남 못준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설영석 이사는 전형적인 기회주의자거든요.”
“그럼… 설 이사가 출세를 위해서 최준하와 한패가 됐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신입사원이 임원과 같이 점심을 먹을 이유가 있겠습니까?”
“하긴… 실장님의 말씀이 맞는 것 같네요.”
한편, 생태탕 집에서 허겁지겁 도망쳐 나온 설영석 이사와 최준하는 대한 그룹 사옥 근처에 위치한 커피 전문점으로 들어갔다.
“설 이사님, 아까 그 사람은 누굽니까?”
“5년 전에 내가 데리고 있던 놈이야.”
“그런 놈이 이사님한테 덤볐는데, 가만히 계실 겁니까?”
“그럴 리가 있나. 그놈이 나한테 무릎 꿇고 싹싹 빌 때까지 철저하게 짓밟아 줘야지.”
“아버지께 말씀드려 볼까요?”
“고작 모기 한 마리를 잡는데, 대포를 쏘는 것은 낭비 아닐까?”
“하하, 그것도 맞는 말입니다.”
“그나저나… 그 젊은 놈은 누구야?”
설영석 이사의 질문을 받은 최준하는 겨울과의 악연을 철저하게 자기 관점에서 얘기해 주었다.
“…해서 아버지가 녀석을 아프리카로 쫓아 보냈는데, 이번에 본사로 발령받은 것 같아요.”
“이번 기회에 내가 그놈도 같이 손봐 줄 테니까, 준하 씨는 뒤로 멀찍이 물러나 있어.”
“저는 이사님만 믿고 있겠습니다.”
“알았어. 이제 회사로 복귀하자고.”
* * *
임원 회의실.
송훈석 회장은 회의실의 분위기가 묘하게 흐르고 있는 것이 무척이나 신경 쓰였다.
이대로 내버려 두었다가는 오늘 회의를 망칠 것 같아서, 표정이 잔뜩 굳어 있는 하도진 실장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
“하 실장, 컨디션이 안 좋아 보이는데, 무슨 일 있습니까?”
사실 하도진 실장은 뜻한 바가 있어서, 회의 시작 전부터 일부러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자신의 예상대로 송훈석 회장이 호기심을 품고 질문을 던져 왔다.
드디어 때가 왔다 생각하고,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점심시간에 재수 없는 사람들을 만나서 그렇습니다.”
“흐음, 그 사람들이 누구인지 얘기해 줄 수 있습니까?”
“그 사람들의 프라이버시를 위해서 이름은 밝히지 않겠습니다. 다만, 저하고 한 부사장님의 철전지 원수들이라는 점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송훈석 회장은 겨울의 원수가 누구인지 단숨에 알아챘다.
최성진 부회장의 외아들인 최준하.
하지만 하도진 실장의 원수는 누구인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때, 서동호 실장이 귓속말로 말을 건네 왔다.
“회장님, 요즘 최준하와 가깝게 지내는 사람은 설영석 이사입니다.”
“임원이 그렇게 할 일이 없어서 신입사원하고 어울린답니까?”
“설 이사는 최 부회장 사람입니다.”
“하아, 알았어요.”
서동호 실장과 대화를 마무리한, 송훈석 회장은 하도진 실장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하 실장의 철전지 원수가 전략기획실의 설영석 이사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설 이사와 어떤 악연이 있었는지 얘기해 줄 수 있습니까?”
“얼마든지 말씀드릴 수 있지만, 제 주관이 섞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5년 전에 전략기획실 기획 1팀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조사해 보시는 것이 훨씬 객관적일 겁니다.”
“우리가 자체적으로 조사해서 설 이사의 비리를 발견했다고 가정할 경우에 어떻게 처벌해 줄까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제가 그 사람한테 당한 스트레스를 마음껏 해소할 때까지 그냥 내버려 두셨으면 합니다.”
“스트레스를 해소할 방법은 가지고 있고요?”
“당연히 있습니다만, 지금 말씀드리기는 조금 그렇습니다.”
“알았어요. 나중에 얘기해 주세요.”
“네, 회장님.”
송훈석 회장은 내침 김에 겨울에게 최준하의 처리 문제에 대해 물었다.
“저도 최준하한테 당한 만큼 몇 배로 되돌려 줄 생각입니다.”
“방법은 있고요?”
“회장님께서 프랑스에 출장 가실 때 수행원으로 데리고 가 주십시오.”
송훈석 회장은 겨울의 의도가 무엇인지 단숨에 눈치챘다.
1년 만에 달라진 그의 위상을 본격적으로 드러내며 최준하에게 심리적인 타격을 안겨 주겠다는 뜻이리라.
죽은 사람의 소원도 들어준다고 하는데, 그깟 사소한 부탁 하나 못 들어주겠는가.
“한 부사장이 원하는 대로 해 줄게요.”
“이왕이면 설영석 이사도 수행원으로 데리고 가는 건 어떨까요?”
“하하하, 무슨 말인지 알았어요.”
겨울은 두 사람의 처리 건과 관련해서는 이쯤이면 됐다고 판단 내리고, 화제 전환을 시도했다.
“회장님, 이제 잉가 3댐 건설공사와 관련해서 부투야 실장님과 통화한 내용을 말씀드려도 될까요?”
“얼른 얘기해 보세요.”
“지난주에 리위춘 CTG 회장이 잉가 3댐 계약 해지를 위해서 극비리에 콩고민주공화국을 방문했습니다. 이에 부투야 실장은…….”
겨울의 설명을 듣고 있던 송훈석 회장은 일말의 불안감을 날려 보냈다.
사실 그는 테베즈 회장이 CTG 측으로부터 계약 파기 위약금을 받지 못한 것을 핑계로 잉가 3댐 공사에 숟가락을 얹어 놓을 것이라 예상했다.
그런데 천만다행으로 테베즈 회장이 CTG의 리위춘 회장과의 담판을 통해서 위약금과 정신적인 피해 보상금까지, 모두 15억 달러를 받아 냈다고 한다.
테베즈 회장의 수완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겨울이 하는 얘기에 집중했다.
“…최대한 빨리 계약을 체결했으면 한답니다.”
겨울의 설명이 끝나자, 송훈석 회장이 문세형 대한건설 사장에게 질문을 던졌다.
“문 사장, 언제쯤 계약 체결이 가능할까요?”
“지금 막바지 타당성 검토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늦어도 4월 중순에는 계약서에 사인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 놓겠습니다.”
“우리가 가는 게 맞겠죠?”
“그게 타당할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정명훈 사장이 발언권을 요청했다.
“회장님, 잉가 3댐 공사 계약을 프랑스에서 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아이디어는 좋은데, 과연 부투야 실장이 동의할까요?”
“부투야 실장께 의사 타진을 해 보고 싫다고 하면 콩고민주공화국으로 가도 되잖습니까.”
“그렇게 추진해 봅시다.”
“한 부사장, 부투야 실장께 전화해 보세요.”
정명훈 사장의 요청을 받은 겨울은 부투야 실장을 프랑스로 부를 수 있는 방법을 짧게 궁리한 후,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네, 한 부사장님.]
“실장님께 급하게 상의드릴 것이 있어서 연락드렸습니다.”
[무엇인지 얘기해 보세요.]
“잉가 3댐 건설공사와 관련해서 대한 건설 측에서는 4월 중순까지 타당성 검토를 끝내기로 약속했습니다.”
[오오, 그거 잘됐네요.]
“저희가 콩고민주공화국을 방문하는 것이 당연히 맞습니다만, 콜레라 등의 예방주사를 맞아야 하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프랑스에서 만나서 계약을 체결하는 게 어떨까요?”
[비자 문제만 해결해 주면, 못 갈 것도 없지요.]
“그 문제는 제가 해결할 수 없으니까, 알아보고 나중에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기다리고 있을게요.]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