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비즈니스맨에게 휴일은 없다
월요일 아침.
겨울은 출근하자마자 아침 일찍 출근한 김윤중 전무의 방문을 받았다.
“전무님, 아침부터 어쩐 일이십니까?”
“부사장님께 업무 보고 할 것이 있어서 올라왔습니다.”
“일단 앉으세요.”
겨울은 내선 전화로 비서에게 커피를 부탁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김윤중 전무와 집 계약 문제부터 상의하기로 결정했다.
“전무님, 알고 계신 법무사가 있습니까?”
“알고 있기는 합니다만,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십니까?”
“소유권 이전등기를 맡기려고 합니다.”
“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계약서를 작성할 때 같이 데리고 오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이목이 있으니까, 법무사 사무실에서 만나서 계약서를 작성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부사장님께서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계약서는 언제 작성할까요?”
“오늘 오후가 적당할 것 같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제가 조금 있다가 법무사의 이름과 사무실 주소를 문자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잠시 후, 비서가 커피를 가져왔고, 두 사람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중단되었다.
향이 짙게 배어 나오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겨울이 김윤중 전무에게 찾아온 용건을 물었다.
겨울의 질문을 받은 김윤중 전무는 대신 가지고 온 두툼한 클리어 파일을 손에 쥐며 입을 열었다.
“부사장님, 이 서류들을 검토해 보십시오.”
겨울이 건네받은 클리어 파일에는 두 종류의 서류가 들어 있었다.
콩고민주공화국을 비롯한 다섯 개 나라에서 인도에 추가로 공급 가능한 석유, 구리, 코발트, 금의 양이 기록된 리스트와 자원 거래와 관련한 표준 계약서였다.
서류들을 꼼꼼하게 읽어 본 겨울은 문득 궁금한 것이 하나 생겼다.
“전무님, 리스트는 언제 받으셨습니까?”
“어제 오후에 모두 받았습니다.”
“네? 어제는 일요일이었잖아요.”
김윤중 전무는 어제 오후에 신기한 경험을 했다.
지난주 금요일 저녁, 부투야 실장 등과 통화하는 도중에 겨울에게 보고해야 하니까 가급적 리스트를 빨리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주말이 끼어 있기 때문에 넉넉잡고 이번 주에 받아 볼 생각을 가지고 한 부탁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일요일 오후에 동시 다발적으로 다섯 개 나라에서 리스트를 보내왔다.
업무 처리가 느리기로 소문난 아프리카 대륙의 나라들이 불과 이틀 만에 리스트를 보내온 것이 얼마나 신기하던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즉시 부투야 실장 등에게 전화 걸어서 그 이유를 물어봤다.
그에게 답변을 듣는 순간, 겨울이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지, 그 위상을 확실하게 깨달았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들은 얘기를 이 자리에서 언급할 수는 없었다.
“비즈니스맨에게 휴일은 없습니다.”
“하하, 알았어요. 그나저나 자원 거래 표준 계약서는 언제 만들었습니까?”
“토요일에 직원들보고 만들라고 했습니다.”
“직원들이 싫어하지 않던가요?”
“연봉과 성과급을 그렇게 많이 받는데, 휴일 하루 정도는 반납해도 된다고 했습니다.”
“하여간 알겠습니다. 리스트는 샤르마 장관께 보내 주시고, 표준 계약서는 바이어와 셀러에게 보내서 컨펌 받도록 하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 * *
같은 시각.
말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신지훈 팀장이 정명훈 사장을 만나기 위해서 DH빌딩 로비에 들어섰다.
H&J 컨설팅이 몇 층에 위치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안내 데스크로 이동하던 도중에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고개를 뒤로 돌려 쳐다보니, 놀랍게도 정명훈 사장이었다.
“사장님, 안녕하십니까?”
“신 팀장, 우리 회사 방문을 환영합니다.”
“설마… 저를 기다리고 계셨던 것은 아니시겠죠?”
신지훈 팀장이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하하, 아닙니다. 아침 일찍 다른 일정이 있어서 일찍 나온 겁니다. 내 사무실로 올라가시죠.”
“네, 사장님.”
사장실.
정명훈 사장은 비서에게 겨울을 포함한 임원들을 모두 부르라고 지시 내렸다.
잠시 후, 겨울을 비롯해서 하도진 이사까지 급하게 사장실로 달려왔다.
그때,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투자분석 검증팀의 이승훈 상무가 신지훈 팀장을 알고 있는지, 친근한 목소리로 말을 건 것이다.
“신 팀장도 우리 회사에 취업할 예정인가?”
“이 팀장님도 이직하셨어요?”
“하하, 사장님이 반강제로 협박하는 바람에…….”
“이 상무, 내가 언제 협박했다는 거야?”
상석에 앉아 있던 정명훈 사장이 이승훈 상무의 말을 끊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에이,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임원진들을 신 팀장한테 소개시켜 줘.”
“네, 사장님. 이분은 H&J 컨설팅의 실질적인 경영을 책임지고 계시는 한겨울 부사장님이십니다.”
이승훈 상무는 겨울부터 하도진 이사까지 H&J 컨설팅과 H&J Investment의 임원들을 차례로 소개시켜 주었다.
신지훈 팀장은 소개시켜 주기를 기다리지 않고 눈치껏 셀프 소개하는 센스를 발휘했다.
제법 길던 상견례가 끝나자, 정명훈 사장이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난주 월요일에 저하고 한겨울 부사장이 신지훈 팀장을 먼저 만났습니다. 그 자리에서 대한 그룹의 서동호 실장님께서는 신지훈 팀장을 제 비서실장이나 총무팀장을 맡기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하셨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발의해 주십시오.”
제일 먼저 이승훈 상무가 발언권을 요청하고 입을 열었다.
“저는 우리 회사의 가장 시급한 일은 한 부사장님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할 조직을 갖추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장님께는 정말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신 팀장을 한 부사장님의 비서실장으로 임명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사실 정명훈 사장도 이승훈 상무와 생각이 같았다.
뭐니 뭐니 해도 H&J 컨설팅에서 제일 바쁘고 중요한 일을 수행하는 사람은 겨울이었으니까.
그런 이유로 임원들을 불러서 의견을 물어보고 있는 중이었고.
“한 부사장은 이 상무의 제안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겨울도 자신의 비서 역할을 수행해 줄 사람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느끼고 적당한 사람을 물색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나마 편안한 이재성 대리가 제일 적당하다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에게는 결정적인 핸디캡이 있었다.
경험 부족.
자기도 사회에 대한 경험이 부족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를 비서실장으로 발탁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차선책을 강구하고 있었고, 뒤늦게 본사로 합류한 하도진 이사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그는 아프리카 사정에 대해서 누구보다 많이 알고 있었고, 무엇보다 자기와도 호흡이 잘 맞았다.
하지만 그에게도 핸디캡은 있었다.
그가 맡고 있는 업무를 대체해 줄 사람이 없다는 점이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고민하고 있던 중에 때마침 정명훈 사장이 질문을 던져 온 것이다.
“아직 당사자한테 의견을 물어보지 않았지만,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얘기해 보세요.”
“하도진 이사입니다.”
“네?! 저를요?”
당사자인 하도진 이사가 깜짝 놀라 물어 왔다.
“저하고 사장님을 제외하고, 하 이사님만큼 아프리카 대륙의 상황을 많이 알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없기는 합니다만, 저는 맡고 있는 일이 있잖습니까?”
“저도 사실 그 점이 고민스럽기는 합니다.”
그때, 이승훈 상무가 발언권을 요청하고 입을 열었다.
“한 부사장님, 김종학 지점장을 빨리 불러들이면 해결될 것 같습니다.”
“김 지점장이 아프리카 대륙을 모두 담당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사장님께서 어떻게든 해법을 찾아 주실 겁니다.”
이승훈 상무의 얘기를 들은 정명훈 사장은 문득 기억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자기 밑에서 3년 동안 호흡을 맞추고, 현재 대한 그룹 본사에 근무하고 있는 석진호 차장.
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하도진 이사한테 물었다.
“석 차장은 김 지점장님과도 같이 근무했기 때문에 호흡이 잘 맞을 겁니다.”
“석 차장 영입 문제는 나한테 맡기도록 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하 이사는 한 부사장의 비서실장직을 맡을 생각이 있습니까?”
“맡겨만 주시면, 분골쇄신하도록 하겠습니다.”
겨울의 예상대로 다른 이견은 없었다.
정명훈 사장은 자신도 결정을 내릴 시간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럼 신 팀장은 제 비서실장 역할을 맡도록 하세요.”
“네, 사장님.”
“이제부터 신 팀장에 대한 호칭은 실장으로 통일하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신 실장은 최대한 빨리 업무를 파악하도록 하세요.”
“사장님, 제가 업무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H&J 컨설팅과 H&J Investment가 어떤 회사인지 자세하게 파악하는 것이 먼저인 것 같습니다.”
겨울은 지난주 월요일에 신지훈 실장에게 H&J 컨설팅과 H&J Investment의 설립 배경과 비즈니스 영역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 당시에 정명훈 사장이 민감한 내용은 H&J 컨설팅에 정식으로 입사하면 얘기해 준다고 미뤄 놓았다.
겨울이 짧은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정명훈 사장의 입이 열렸다.
“한 부사장과 장 부사장은 신 실장에게 두 회사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해 주세요.”
“네, 사장님.”
짧게 대답한 겨울이 설명을 위해서 말문을 열었다.
“저하고 장 부사장이 설명하는 내용들은 우리 회사의 기업 비밀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비밀이 외부로 흘러 나가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해 주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먼저 H&J 컨설팅은…….”
겨울의 설명이 끝나고 이어서 장대산 부사장의 설명을 듣고 있던 김윤중 전무는 놀라서 까무러칠 지경이었다.
H&J Investment의 운용 자산이 무려 2,000억 달러가 넘는다고 하는데, 놀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와 동시에 H&J Investment에 그렇게 많은 직원들이 근무하고 있는 이유 또한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장대산 부사장의 말을 가만히 들어 보니 이제는 오히려 200명이 부족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김윤중 전무가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장대산 부사장의 설명이 끝이 났다.
“…운용 자산은 상황에 따라서 계속 증액될 예정입니다.”
뒤이어 정명훈 사장이 입을 열었다.
“신 실장, 궁금한 것이 있습니까?”
“H&J Investment에 한국인들을 채용할 계획이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남우영 인사팀장에게 지시 내려놓은 상태입니다.”
“아, 그렇군요.”
“신 실장은 최대한 빨리 나하고 두 부사장의 비서실 조직을 같이 갖출 수 있도록 하세요. 그리고 총무팀장 자리를 맡길 인재도 물색하도록 하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신 실장은 언제부터 우리 회사에 출근할 예정입니까?”
“내일부터 정식으로 근무하도록 하겠습니다.”
신지훈 실장과 대화를 종료한 정명훈 법인장은 장대산 부사장에게 말을 걸었다.
“장 부사장은 비서실장을 어떻게 할 생각인가요?”
“조만간에 해리슨 상원의원께서 적당한 사람을 보내 주기로 약속하셨습니다.”
“알았어요. 이제 일터로 돌아가서 업무를 보시기 바랍니다.”
축객령을 받은 사람들이 사장실에서 퇴장하자, 정명훈 사장은 핸드폰을 들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배님, 깊은 밤중에 웬일이십니까?]
자다가 전화를 받았는지 추성민 법인장의 목소리가 심하게 잠겨 있었다.
“추 법인장, 김 지점장을 우리 회사로 빨리 보내 주면 안 될까?”
[무슨 일이 있습니까?]
“하 이사를 한 부사장의 비서실장으로 임명하는 바람에 김 지점장이 급하게 필요한 상황이야.”
[선배님, 그렇게 되면 저희는 지금 아르바이트를 고용해야 할 정도입니다.]
추성민 법인장이 싫다는 뜻을 에둘러 표현했다.
정명훈 사장도 아프리카 법인의 상황을 빤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막무가내로 조를 수는 없었다.
“추 법인장, 우리 서로 한 달씩 양보하는 게 어떨까?”
[알았어요. 아무리 늦어도 5월까지는 보내 줄게요.]
“고마워.”
[선배님, 아프리카 대륙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보나 마나 빤했다.
미국이 아프리카 대륙의 나라들에게 디폴트를 선언하라고 부추기고 있는 중일 것이다.
그는 자신의 추측이 맞는지 물었다.
[선배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앞으로 아프리카 대륙이 시끄러워지겠군.”
[아무래도 그럴 것 같습니다.]
정명훈 사장은 추성민 법인장과 이런저런 대화를 주고받은 후 통화를 종료했다.
“이제 석진호 차장한테 전화해 볼까?”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