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먹지 않아도 배부를 때
정명훈 사장과 면접을 끝낸 김윤중 전무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자신의 회사로 돌아갈 수 없었다.
겨울과 집 매매 건에 대해서 대화를 마무리 지어야 하고, 다른 문제에 대한 답변도 들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얘기를 꺼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때마침 겨울이 말을 걸어왔다.
“김 전무님, 특별한 약속이 없으시면 제 사무실로 이동해서 대화를 나눌까요?”
“네, 좋습니다.”
겨울의 사무실.
비서가 서빙한 음료수를 한 모금 마시고 겨울이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전무님, 집은 35억에 매입하겠습니다.”
“네? 30억에 매입하기로 한 게 아니었습니까?”
사실 겨울은 김윤중 전무가 애초에 제안한 대로 30억에 집을 매입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어제 아침 출근길에 가을의 말을 듣고 생각을 바꿔먹었다.
가을이 부동산 어플을 통해서 서래마을의 부동산 시세를 조사했는데, 평당 2,000만 원이 넘어간다고 했다.
대지가 150평이기 때문에 땅값만 30억이 넘어가는 상태.
건물까지 포함하면 적어도 40억은 훌쩍 넘어갈 것이 분명했다.
양심에 털이 나지 않은 이상 시세보다 엄청나게 저렴한 가격으로 주택을 매입할 수는 없었다.
“전무님, 진짜로 제가 30억에 매입하기를 바랍니까?”
“…….”
“하하, 그것 보세요. 제 말대로 35억에 계약하시죠?”
“어쩔 수 없네요.”
“집 매매 계약서는 언제 작성하는 게 좋을까요?”
“부사장님께서 날짜를 정해 주십시오.”
“다음 주 월요일이나 화요일에 제 사무실에서 계약을 체결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네, 알겠습니다.”
겨울은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집 매매에 따른 대화가 마무리되었기 때문에 김윤중 전무와는 더 이상 의논할 거리가 없었다.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그는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전무님, 저한테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지금 김윤중 전무의 머릿속에는 온통 오늘 오전 회사에서의 일로 가득 차 있었다.
직원들에게 H&J 컨설팅이라는 회사로 이직할 예정이라고 언급하면서, 가능하면 모두 데리고 가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때 직원 중 한 명이 H&J 컨설팅의 급여 조건에 대해서 물었다.
당연히 정명훈 사장과의 면접 장소에서 급여 조건에 대해 물어봤어야 하지만, 워낙 중요한 안건이 오고 갔기 때문에 미처 그것까지는 물어보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냥 돌아갈 수도 없는 일이고.
그는 짧게 생각을 끝내고, 조심스럽게 그 얘기를 꺼냈다.
“아차, 저희가 그 점을 깜빡하고 있었네요.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겨울은 내선 전화로 남우영 인사팀장을 호출해 달라고 지시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남우영 팀장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겨울의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남 팀장님, 불이라도 났습니까?”
“하하, 아닙니다. 운동 삼아 계단으로 올라왔더니만, 숨이 차서 그럽니다.”
“인사하세요. 이분은 다음 주 월요일부터…….”
상견례를 끝내고 본격적인 안건을 꺼내 든 겨울이었다.
“남 팀장님, 김 전무님께 우리 회사의 연봉과 복리후생 제도를 설명해 주세요.”
“네, 부사장님.”
짧게 대답한 남우영 팀장은 김윤중 전무에게 자세하게 브리핑을 시작했다.
“전무님께 책정된 기본 연봉은…….”
남우영 팀장의 브리핑을 귀담아듣고 있던 김윤중 전무는 다른 것보다도 성과급 제도에 대해서 묘한 호기심이 일었다.
“남 팀장, 성과급 제도를 자세하게 설명해 줄 수 있습니까?”
“저희 회사가 수주한 프로젝트에 대해서 모든 직원들에게 0.1%를 성과급으로 지급할 예정입니다. 여기에는 H&J Investment 직원들도 포함됩니다.”
김윤중 전무는 은근히 기분이 좋아졌다.
자원 계약은 한번 체결하면 최소 3년은 기본이고,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계속 연장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아프리카 대륙의 다섯 개 나라가 인도에 수출 예정인 자원의 금액은 매월 50억 달러 정도.
이대로라면 매월 적지 않은 성과급을 받게 된다는 말이었다.
이참에 자기가 얼마의 성과급을 받게 될 예정인지 계산해 보기 위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남 팀장님, 두 회사의 직원들 숫자는 모두 몇 명입니까?”
“지금은 300명이 조금 넘었지만, 연말에는 500명 정도로 예상하시면 됩니다.”
직원들 숫자가 500명이라고 가정하면, 매월 1만 달러를 성과급으로 받는 셈이었다.
전무인 자기에게는 그다지 많지 않은 금액이지만, C&B 코리아의 직원들에게는 꽤나 많은 금액이었다.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할 직원들을 생각하니 입가에 미소가 저절로 지어졌다.
그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겨울이 호기심을 품고 질문을 던졌다.
“전무님, 좋은 일이 있습니까?”
“자원 중개로 인해서 성과급으로 매월 1만 달러씩 받게 되는데, 기분이 좋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네?! 매월이라뇨?”
겨울보다 먼저 남우영 팀장이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자원은 한 번 계약을 체결하면…….”
그의 얘기를 들은 남우영 팀장은 기대감에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월급을 제외하고 매월 1,100만 원이 넘는 돈이 통장에 꼬박꼬박 입금된다는데, 흥분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H&J 컨설팅이 수주할 예정인 일감은 좀 많은가.
먹지 않아도 배부를 때가 있다고 하는데, 그때가 바로 지금이었다.
“전무님, 인도와의 자원 거래가 꼭 성사됐으면 좋겠습니다.”
“하하,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그때, 할 말이 있다는 듯 겨울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전무님, 성과급을 주기 위한 재원은 어떻게 마련하실 생각입니까?”
“셀러한테 받는 커미션으로 충당하면 될 것 같습니다.”
“이해하지 못한 남 팀장님을 위해서 자세하게 설명해 주십시오.”
겨울의 지시를 받은 김윤중 전무는 짧게 생각을 정리하고,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원 거래를 중개해 주면, 셀러로부터 거래 금액의 1.5%를 커미션으로 받습니다. 다섯 나라가 인도에 수출 예정인 자원 금액이 약 50억 달러 정도 됩니다. 그렇게 되면, 저희 회사는 매월 7,500만 달러를 커미션으로 받습니다. 이 돈의 일부를 직원들에게 성과급으로 나눠 주면 됩니다.”
“아, 무슨 말씀인지 이해했습니다.”
사실 겨울은 김윤중 전무가 이렇게만 알고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자신의 추측이 맞는지 확인해 보려고 남우영 팀장에게 설명해 주라고 지시를 내려놓은 것이다.
“전무님께서 잘못 알고 계신 게 있습니다.”
“네? 제가요?”
김윤중 전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전문님께서는 우리 회사가 셀러 맨데이트(Mandate, 중개인)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알고 계시는데, 바이어 맨데이트 역할도 수행하셔야 할 겁니다. 그리고 인도 정부는 석유, 구리, 코발트, 금을 더 수입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때문에 거래 금액은 50억 달러가 넘을 것이 확실합니다.”
“아차, 제가 그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네요.”
“이제부터 전무님께 업무를 부여할 테니까, 참고하십시오.”
“네, 말씀하십시오.”
김윤중 전무의 목소리가 딱딱하게 굳어졌다.
잔뜩 긴장했다는 뜻이었다.
“부투야 실장의 전화번호를 알려 드릴 테니까, 다섯 개의 나라들로부터 추가로 공급 가능한 석유, 구리, 코발트, 금의 양을 최대한 빨리 파악하십시오. 그 후, 리스트를 샤르마 장관에게 보내 주고 컨펌 받으세요.”
김윤중 사장은 겨울의 의도가 무엇인지 단숨에 이해했다.
샤르마 장관이 부족하다고 할 경우, 자신의 팀에서 자원들을 수배해서 적극적으로 공급해 주라는 뜻임을.
하지만 말미에 이어진 겨울의 말은 자기의 예상과 180도 달랐다.
“저한테 SOS를 치세요.”
“부사장님, 알고 있는 셀러가 있습니까?”
“인도는 정상적인 가격으로 자원을 수입할 생각이 없습니다. 때문에 자원을 국제가격보다 저렴하게 공급할 수 있는 나라들을 더 물색해야 합니다.”
“부사장님께서는 그런 나라들을 알고 계십니까?”
“아직은 없지만, 부투야 실장께 부탁하면 충분히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겨울이 알아서 하겠다고 하는 데 꼬치꼬치 묻는 것은 실례였다.
“네, 알겠습니다.”
김윤중 전무의 대답을 들은 겨울은 고개를 돌려 남우영 팀장에게 말을 걸었다.
“다음 주 월요일부터 김 전무님과 팀원들이 근무할 예정이니까, 불편함을 겪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전무님과 상의해서 팀원들의 직위를 결정해 주시고요.”
“네, 부사장님.”
“오늘 저녁 있을 조직 책임자들의 회식에 사장님도 참석하실 예정입니다. 이 점을 감안해서 회식 장소를 선정하십시오.”
“부사장님께서 생각해 놓은 곳이 있습니까?”
“어디든지 상관없지만, 가급적이면 고기집은 피했으면 좋겠습니다.”
남우영 팀장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직장인들이 제일 많이 회식하는 장소는 삼겹살, 돼지갈비 등 고기집이다.
겨울은 고기 집은 안 된다고 못을 박아 버렸지만.
그렇다고 젊은 직원들이 좋아하는 피자 전문점이나 스파게티 전문점에서 회식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런저런 생각 끝에 적당한 곳을 하나 생각해 냈다.
“부사장님, 호텔 레스토랑은 어떻습니까?”
“괜찮은 것 같네요. 가급적이면 대한 호텔 레스토랑을 이용하도록 하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자원 거래와 관련된 대화 내용은 혼자만 알고 있는 것으로 하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잠시 대화가 중단된 틈을 타서 김윤중 전무가 발언권을 요청했다.
“부사장님, 오늘 저녁 회식 때 저도 참석하는 겁니까?”
“네, 그렇습니다.”
* * *
하도진 이사는 아직 업무용 차가 배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겨울과 함께 회식 장소로 이동 중에 있었다.
창밖으로 한참 동안 서울의 거리를 내다보고 있던 그는 겨울에게 고개를 돌려 말을 걸었다.
“부사장님, 하필이면 왜 대한호텔 레스토랑에서 회식을 하는 겁니까?”
사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조직 책임자들과 조용한 장소에서 식사하며 대화를 나누고 싶었을 뿐.
이 얘기는 차마 꺼낼 수는 없어서 농담을 실어 대답했다.
“사장님께 바가지를 옴팍 씌워 보시라고, 하 이사님께 기회를 드린 겁니다.”
“흐흐흐, 알겠습니다.”
윙윙―
하도진 이사가 음흉한 웃음을 흘리고 있을 때, 겨울의 손에 들려 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부투야 실장이 걸어온 전화였다.
“네, 실장님.”
[방금 전에 김윤중 전무와 통화했는데,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해서 전화했습니다.]
“김 전무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인도가 필요로 하는 자원들을 제가 구해 주실 거라고 하셨다면서요?]
“네, 맞습니다.”
[어떤 방법으로요?]
“아프리카에 자원 부국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나라들이 인도에 국제가격보다 저렴하게 수출하려고 할까요?]
“저희는 H&J Investment라는 투자회사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 나라들에서 중국을 철수하게 만들면… 으하하하!]
부투야 실장이 이해했다는 듯 커다란 웃음을 터트렸다.
“저는 실장님만 믿고 있으면 되겠죠?”
[그럼요. 제가 확실하게 서포트해 드리겠습니다.]
대한호텔 레스토랑.
정명훈 사장이 임원들과 함께 VIP룸 문을 열고 들어왔다.
기다리고 있던 조직 책임자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들을 맞이했다.
정명훈 사장이 비어 있던 앉자, 남우영 팀장이 입을 열었다.
“본격적으로 회식을 시작하기 전에 상견례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가운데 앉아계신 분은…….”
제법 긴 상견례 시간이 끝나자, 정명훈 사장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여러분과 같이 일하게 돼서 정말 기쁘게 생각합니다. 오늘은 가급적이면 업무와 관련된 대화는 피하고, 친목 도모에 힘썼으면 좋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남 팀장, 음식을 주문하게 지배인을 부르세요.”
잠시 후, 부름을 받은 지배인이 들어왔다.
정명훈 사장은 거침없이 주문을 넣었다.
“지배인님, 이 레스토랑에서 제일 자신 있는 스테이크를 주시고, 와인도 적당하게 서빙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지배인이 인사를 하고 발걸음을 돌릴 때, 하도진 이사가 용감하게 한마디 했다.
“지배인님, 와인 적당량에 대한 기준이 애매하니까, 2인당 한 병을 기준으로 해 주세요.”
“네? 그래도 되겠습니까?”
“저희 회사 사장님은 손이 크신 걸로 유명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주문을 받은 지배인이 퇴장하자마자, 정명훈 사장이 하도진 이사를 쏘아보며 물었다.
“하 이사, 오늘따라 왜 그래요?”
“저는 한 부사장님께 지시받은 대로 행동했을 뿐입니다.”
범인이 겨울로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