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선수는 선수를 알아본다
김윤중 사장은 지금까지 힘차게 일어나던 의욕이 갑자기 뚝 떨어졌다.
정명훈 사장이 언급한 나라들의 상황을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섯 나라들은 절반 가까이에 해당하는 자원들을 유럽과 미국 쪽에 수출하고, 잔여 물량은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에 수출하고 있었다.
물론, 아시아 국가에 수출하고 있는 자원들은 거의 대부분을 중국이 수입하고 있는 상황이고.
때문에 H&J 컨설팅이 인도와 대한 그룹에 중개해 줄 수 있는 자원의 물량은 보나마나 빤했다.
“사장님, 생각보다 물량이 많지 않겠네요?”
“어떤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저희 회사가 자원을 중개하면서…….”
김윤중 사장은 기존에 파악해 놓고 있는 정보를 가감 없이 설명했다.
그의 얘기를 끝까지 들은 정명훈 사장이 잠깐 생각을 정리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사장님께서 잘못 알고 있는 게 하나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먼저 제가 드리는 자료를 보고 대화를 나누시죠.”
정명훈 사장에게 건네받은 자료를 살펴보던 김윤중 사장은 진심으로 깜짝 놀랐다.
물량이 생각보다 엄청나게 많았기 때문이다.
‘이 많은 자원을 수입할 수 있는 나라는 중국밖에 없는데… 그나저나 수출 가격은 왜 이렇게 싼 거야? 가만… 혹시……?’
마음속에 가득 들어찬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김윤중 사장이 정명훈 사장에게 물었다.
“사장님, 자료에 기재되어 있는 자원들이 중국과 관련이 있습니까?”
“김 사장님께서는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아내셨습니까?”
정명훈 사장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이렇게 많은 자원을 수입하면서 가격을 후려칠 수 있는 나라는 중국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김 사장님은 중국이 가격을 후려친 이유를 알고 계십니까?”
“중국이 저개발 국가들에 자금을 지원해 주며 일대일로 프로젝트에 참여시키고,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자원을 싼값에 수탈해 가고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선수는 선수를 알아보는 법.
정명훈 사장은 김윤중 사장이 일대일로 프로젝트에 숨어 있는 내막을 언급하는 순간,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서 일대일로 프로젝트의 내막까지 알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설령 알고 있다 해도 중국 정부가 대외 홍보용으로 배포한 내용에 대해서만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호기심이 치솟아 오른 정명훈 사장은 그가 어떤 방법으로 정보를 취득했는지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봤다.
“사실은 제가 라오스 정부의 고위 관리를 알고 있습니다. 그분께 일대일로 프로젝트가 어떤 목적으로 추진되고 있는지 자세하게 들었습니다.”
“아, 그렇군요.”
잠깐 대화가 끊어진 틈을 타서 장대산 부사장이 발언권을 요청했다.
“김 사장님, 라오스가 디폴트를 선언할 예정이라고 들었는데, 사실입니까?”
“그럴 생각이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은 것 같습니다.”
“이유를 알고 계십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중국과 국경선이 맞닿아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얘기를 듣고 장대산 부사장은 라오스가 처해 있는 상황을 정확하게 캐치했다.
라오스는 중국의 식민지가 되어 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중이리라.
중국이 부채를 상환받기 위한 명분을 내세워서 군대를 라오스에 진주시킨다고 하더라도, 명분이 없는 미국은 두 나라 문제에 개입할 여지가 없다.
이 기회를 틈타 중국은 라오스를 친중 정권으로 만들어 놓고 야금야금 식민지로 만들어 나가려는 것이다.
라오스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이 갑자기 중요한 안건으로 떠올랐으나, 지금 당장 논의할 수는 없었다.
일단 그 문제에 대해서는 나중으로 미루고, 김윤중 사장과의 대화를 마무리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이제 사장님과 말씀 나누십시오.”
궁금증을 해소한 장대산 부사장이 뒤로 물러나자, 김윤중 사장이 입을 열었다.
“사장님, 궁금한 게 있습니다.”
“네, 말씀해 보세요.”
“인도가 이렇게 많은 자원들을 모두 수입할 수 있을까요?”
정명훈 사장은 쉽지 않다고 생각했다
인도는 중국에 비해서 GDP가 약 5.7배 정도 적다.
아무리 인도 경제가 폭발적인 성장을 한다고 해도 GDP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서는 최소 100년, 아니, 영원히 불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따라서 플랜 B를 수립해 놓는 것은 필수불가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저는 상당히 어렵다고 봅니다.”
“인도가 수입하지 못하는 물량을 대한 그룹을 포함한 다른 바이어를 물색해서 연결시켜주면 됩니까?”
“그렇습니다만, 최대한 빨리 서둘러 주셔야 합니다.”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다섯 개 나라는 6월 말 일자로 중국과 거래를 중단하기로 예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보다 시간이 별로 없네요?”
윙윙―
그때, 두 사람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던 겨울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액정에 표시된 전화번호를 확인하니, 인도의 샤르마 장관이었다.
정명훈 사장이 바로 말을 걸어왔다.
“한 부사장, 샤르마 장관인가?”
“네, 그렇습니다.”
“우리는 쥐 죽은 듯이 앉아 있을 테니까, 스피커폰으로 통화했으면 좋겠어.”
“일단 샤르마 장관께 양해를 구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하라고.”
겨울은 고개를 끄덕이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샤르마 장관님.”
[한 부사장님, 보내 주신 리스트는 잘 받아 봤습니다. 궁금한 게 있는데, 대답해 줄 수 있습니까?]
“장관님, 저는 자원 거래 전문가가 아닙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저와 같이 있는 분들께 장관님과의 통화 내용을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원하는 대로 하세요.]
샤르마 장관의 동의를 받은 겨울은 스피커폰으로 전환하고, 통화를 이어 나갔다.
“장관님, 이제 말씀해 보십시오.”
[5개국이 수출할 수 있는 자원의 양은 제한적으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이 많은 물량을 우리나라에 수출할 수 있습니까?]
“저희가 장관님께 보내 드린 리스트는 다섯 개의 나라가 현재 중국에 수출하고 있는 물량입니다.”
[그럼 5개국이 중국에 자원 수출을 중단한다는 말씀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제가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겨울은 난감한 상황에 빠져들었다.
샤르마 장관에게 이유를 설명해 주려면, 연합군과 중국이 벌인 전쟁을 언급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어떻게 대답할까 고민하고 있는 사이에 장대산 부사장이 메모지에 짧은 문구를 적어서 건넸다.
― 인도와 중국은 국경분쟁 중입니다.
얘기해 줘도 된다는 뜻으로 해석한 겨울은 샤르마 장관과 통화를 이어 나갔다.
“최근에 그 다섯 나라와 중국 사이에 좋지 않은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나이지리아에서 5개국 대표와 중국의 천유런 외교부장이 비밀 협상을 벌였습니다. 결과만 말씀드리면, 중국은 알거지 상태로 쫓겨났습니다.”
[으하하하!]
샤르마 장관의 화통한 웃음소리가 사장실에 울려 퍼졌다.
“장관님, 이제 궁금증은 해소가 됐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다행이네요.”
[이제 보내 주신 리스트를 검토한 결과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경청하겠습니다.”
[리스트에 기재되어 있는 자원들은 우리나라가 모두 수입하겠습니다.]
“네?! 정말입니까?”
겨울은 진심으로 깜짝 놀랐다.
전량 수입을 이렇게 빠르게 결정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왜요? 우리나라가 모든 물량을 수입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역시 솔직해서 좋군요.]
“감사합니다, 장관님.”
[추가로 부탁할 게 있는데, 들어줄 수 있습니까?]
“말씀해 보십시오.”
[석유, 구리, 코발트, 금을 더 수입하고 싶은데, 공급 가능한 양을 파악해서 알려 주십시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연락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겨울은 긴급히 부투야 실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샤르마 장관과의 통화 내용을 전달했다.
“…추가로 공급할 수 있는 물량을 파악해서 알려 주십시오.”
[저는 걱정을 많이 했는데, 천만다행이네요.]
“저도 실장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인도 정부가 필요로 하는 물량은 최대한 빨리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해 주시고, 다른 나라들에는 실장님께서 소식을 전파해 주십시오.”
[한 부사장님, 저를 너무 부려먹는 거 아닙니까?]
말은 그렇게 했어도 목소리에는 따뜻한 애정이 실려 있었다.
“그만큼 저의 우선순위는 무조건 부투야 실장님이십니다.”
[하하하, 알았어요.]
화기애애하게 두 사람의 대화가 오가고 있을 때, 김윤중 사장이 메모지를 겨울에게 건네주었다.
내용을 확인한 겨울은 부투야 실장과 통화를 이어 나갔다.
“저희 회사에서 자원 거래 업무를 전담으로 수행하실 분께서 실장님께 인사를 드리고 싶다고 합니다.”
[바꿔 주세요.]
겨울에게 핸드폰을 받은 김윤중 사장은 부투야 실장과 전화로 상견례를 나누고, 하고 싶은 말을 꺼내 들었다.
“부투야 실장님, 콩고민주공화국을 비롯한 다섯 개의 나라에서 자원 수출을 총괄 관리하는 조직의 책임자를 알고 싶습니다.”
[이유를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저희가 인도에 자원 수출을 위해서 FCO(Full Corporate Offer, 셀러의 공식 오퍼)를 발송해야 하는데, 각 나라의 거래 조건을 파악하기 위함입니다.”
[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7월부터 인도에 자원 수출을 개시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입니다. 힘드시더라도 저희의 요구를 적극 수용해 주십시오.”
[그야 물론입니다.]
“감사합니다. 다시 한 부사장님에게로 전화 넘기겠습니다.”
김윤중 사장에게 핸드폰을 건네받은 겨울은 방금 전에 떠올린 아이디어를 언급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실장님,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서 인도에 수출하는 자원들의 거래 절차를 5개국이 통일하면 어떨까요?”
[오오! 아이디어 끝내주는데요?]
“저희가 표준 계약서를 만들어서 보내 드릴 테니까, 의견을 제시해 주십시오.”
[그렇게 할게요.]
겨울과 부투야 실장은 몇 마디 대화를 더 주고받은 후, 통화를 종료했다.
그와 동시에 정명훈 사장이 김윤중 사장에게 말을 걸었다.
“김 사장님, 한 부사장의 아이디어대로 표준 계약서를 만들 수 있습니까?”
“계약서의 내용은 거기서 거기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만들 수 있습니다.”
“시간을 얼마나 걸릴까요?”
“넉넉잡고 하루면 충분할 겁니다.”
“그럼 부탁합니다. 이제 업무와 다른 얘기를 잠깐 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네, 말씀하십시오.”
“한 부사장이 방금 전에 잠깐 언급한 것처럼, 우리 회사 내부에 자원 거래를 전담하는 팀을 만들 생각입니다. C&B 코리아의 직원들을 모두 데리고 와서 팀을 구성하도록 하십시오.”
사실 김윤중 사장이 C&B 코리아를 아직까지 폐업하지 못하고 있던 이유는 자신만 쳐다보고 있는 직원들 때문이었다.
그래서 창피함을 무릅쓰고 직원들을 H&J 컨설팅에 채용해 달라고 노골적으로 부탁한 것이고.
비록 정명훈 사장이 긍정적으로 생각해 본다고 했지만, 자신을 제외한 여덟 명 모두를 채용해 줄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사장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그리고 사장님의 직위는 전무로 했으면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직원들의 직위는 우리 회사와의 형평성을 고려해 주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사장님의 직속 상사는 제가 아니라 한겨울 부사장입니다. 한 부사장이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함부로 대하지 말아 주십시오.”
비즈니스를 진행하다 보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저절로 깨우치게 된다.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김윤중 사장에게 나이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야 물론입니다.”
“궁금한 게 있으면 질문해 보십시오.”
“장 부사장님은 제 직속 상사가 아닙니까?”
“장 부사장은 H&J 컨설팅의 계열사인 H&J Investment의 책임자입니다.”
김윤중 사장은 H&J Investment가 어떤 회사인지 호기심이 치솟아 올랐지만,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네, 알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의를 갖추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당연한 말씀 아닙니까?”
“시간이 긴박하게 흘러가고 있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다음 주 월요일부터 근무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