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하는 법
두 사람의 통화를 귀담아 듣고 있던 송훈석 회장은 돌발 변수가 무엇인지 이제야 정확하게 깨달았다.
다름 아니라 바로 자신의 조급함이 문제였다.
만약에 자기가 CNOOC가 보유한 지분 매입을 서두르지 않았다면, 뿌요네 회장은 결코 무리해서 행동으로 나서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도 협상을 서둘러 봐야 이득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뿌요네 회장은 자기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다행히 협상 개시 사실을 뒤늦게 인지한 겨울이 기막힌 묘수를 동원해서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켜 주었지만.
겨울에게 마음속으로 감사함을 표현하는 동안에도 뿌요네 회장과 겨울의 통화는 계속됐다.
[송유관 건설공사를 H&J 컨설팅하고 체결하려면 우리나라를 방문해야 할 겁니다.]
“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한 부사장님, 말이 나온 김에 하나만 더 물어봅시다.]
“네, 말씀하십시오.”
[잉가 3댐 건설 공사는 어느 건설사에 맡길 예정입니까?]
뿌요네 회장의 질문에 얼마든지 대답할 수 있는 겨울이었지만, 그러지 않기로 결정했다.
H&J 컨설팅의 대표이사는 정명훈 사장이었기 때문에.
“회장님, 제 옆에 정명훈 사장님이 계십니다. 바꿔 드릴까요?”
[그렇게 해 주십시오.]
겨울에게 핸드폰을 건네받은 정명훈 사장은 뿌요네 회장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본격적인 대화를 이어 갔다.
“대한건설에 맡길 예정입니다만, 왜 그러십니까?”
[사실은 우리나라의 VINCH라는 건설사가 있는데, H&J 컨설팅 경영진을 만나보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정명훈 사장도 VINCH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작년 10월에 잉가 3댐 건설 공사 입찰에 대한건설과 컨소시엄을 구성한 회사였으니까.
“다음 달에 프랑스를 방문할 때 회장님께서 미팅을 주선해 주십시오.”
[하하, 알았어요.]
“CNOOC와 협상을 잘 마무리하십시오.”
[염려 마세요.]
“송훈석 회장님이 제 옆에 계시는데, 통화 한 번 하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정명훈 사장은 송훈석 회장에게 핸드폰을 건네주었고, 두 사람은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 통화를 끝냈다.
송훈석 회장이 핸드폰을 겨울에게 건네주는 것과 동시에 서동호 실장이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정 사장, 회 좋아합니까?”
“그럼요.”
“요즘 도다리가 제철인데, 우리 회나 먹으러 갑시다.”
“실장님, 아직 5시밖에 안됐습니다.”
“인천에 유명한 도다리 횟집이 있는데, 지금 출발하면 6시 넘어서 도착할 겁니다.”
천만 인구가 살고 있는 서울에 도다리 횟집이 없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동호 실장이 인천까지 가서 회를 먹자고 제안한 것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정명훈 사장은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하며 서동호 실장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굳이 인천까지 가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하하, 그곳에 맛집이 있어서 그럽니다.”
“그렇다면 가 봐야죠.”
* * *
“한 부사장, 장 부사장이 저녁 식사에 참석하지 않겠다는 이유를 물어봤나?”
정명훈 사장이 옆자리에 앉아 있는 겨울에게 물었다.
“오늘 투자분석 검증팀의 단체 회식이 예정되어 있답니다.”
“그렇군.”
“사장님, 조강희 대리의 대한전자 퇴사 사건과 관련해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얘기해 봐.”
“지난주 금요일 저녁때…….”
겨울은 당시의 일을 상세하게 보고했다.
“음… 그런 사연이 있었군.”
“송 회장님께서 진상을 정확하게 파악해서 관련자들을 엄중 처벌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 회사도 성희롱과 관련한 처벌 규정을 만들어 놓아야겠네.”
“제가 남우영 팀장께 얘기해 놓겠습니다.”
“그렇게 하라고. 그나저나 서 실장님이 인천까지 가자고 하는 이유가 뭘까?”
겨울은 다른 것은 몰라도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이 하나 있었다.
도다리 회를 먹자고 인천을 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왜냐하면 서울에도 도다리 회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횟집들은 많으니까.
“누구를 만나게 해 주려고 하는 게 아닐까요?”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얘기군. 그 사람이 누구일까?”
“글쎄요.”
인천 송도에 위치한 횟집.
겨울 일행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40대로 보이는 남자가 얼른 다가와 송훈석 회장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회장님, 어서 오십시오.”
“신지훈 팀장, 그동안 잘 있었나?”
“회장님께서 염려해 주신 덕분에 잘 있었습니다.”
“장사는 잘되고?”
“꾸준한 편입니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러자고.”
룸에 들어가자 송훈석 회장은 반듯한 자세로 서 있는 신지훈 팀장에게 말을 건넸다.
“신 팀장, 이분은 H&J 컨설팅이라는 회사의 대표이사인 정명훈 사장…….”
송훈석 회장의 소개로 상견례가 끝나자, 서동호 실장이 입을 열었다.
“신 팀장, 우리가 주문한 도다리 회를 가져다 줘.”
“네, 실장님.”
신지훈 팀장이 룸 밖으로 나가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정명훈 사장이 질문을 던졌다.
“서 실장님, 신지훈 팀장을 알고 있었습니까?”
“대충 눈치챘겠지만, 신 팀장은 우리 회사에 근무하던 사람입니다.”
정명훈 사장은 서동호 실장이 자신들을 이곳까지 데리고 온 이유를 이제야 확실하게 깨달았다.
그는 신지훈 팀장을 자신의 회사에 취업시키려는 것이다.
송훈석 회장과 서동호 실장이 인정한 사람이라면, 가지고 있는 능력은 안 봐도 비디오였다.
“신 팀장의 전 직장이 어디였습니까?”
“대한 그룹 비서실의 2팀장이었습니다.”
“신 팀장이 퇴사한 이유를 알 수 있습니까?”
“1년 전에 비서실 2팀에서 성추행 사건이 발생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직원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책임이 있다면서 자진 퇴사했습니다.”
“신 팀장을 저희에게 소개시켜 준 목적을 말씀해 주십시오.”
정명훈 사장의 말에 서동호 실장은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고, 물음에 대답했다.
“H&J 컨설팅은 유능한 인재들이 많이 필요한 상황이라는 사실은 정 사장님도 부인하지 못할 겁니다.”
“당연합니다.”
“신지훈 팀장은 나하고 15년 넘게 호흡을 맞춰 왔기 때문에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모든 면에서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결정적으로 입이 무겁고 의리가 있습니다. H&J 컨설팅이 신 팀장을 채용하면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과연 신 팀장이 이 횟집을 정리하고, 저희 회사로 이직하려고 할까요?”
“이 횟집은 큰누나 부부가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이직에는 문제가 없을 겁니다.”
“제가 만약에 신 팀장을 채용한다면, 어느 부서에 배치시키는 게 좋겠습니까?”
“비서실이 제일 적당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총무팀장을 맡겨도 문제없을 것 같습니다.”
똑똑.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모자와 요리사 가운을 단정하게 자려 입은 주방장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문 주방장, 오랜만입니다.”
“회장님, 아까 인사를 드렸어야 하는데, 바빠서 지금에야 찾아왔습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지금 도다리 회를 서빙했으면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물론입니다.”
강원도 영월의 시골 출신인 겨울은 민물 회를 접할 기회는 많았으나, 바다 회를 먹을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다.
겨울은 도다리 회도 민물 회와 마찬가지로 초장에 듬뿍 찍어 먹으려 했다.
그런데 문정복 주방장은 초장 맛에 도다리의 고소함이 묻혀서 참맛을 느낄 수 없다면서, 쌈장에 초장과 와사비를 조금 풀어서 도다리 회를 찍어 먹으라고 권했다.
그가 가르쳐준 방법대로 도다리 회 한 점을 쌈장에 찍어서 입에 넣고 천천히 맛을 음미했다.
도다리의 고소함과 쫀득한 식감이 입 안 가득 들어찼다.
“주방장님, 맛이 끝내주는데요?”
“손님께서 맛있다고 하시니까, 저도 기분이 좋네요.”
두 사람의 대화를 흐뭇한 모습으로 지켜보고 있던 송훈석 회장이 말문을 열었다.
“문 주방장님, 신 팀장과 저녁 식사를 같이해도 될까요?”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잠시 후, 부름을 받은 신지훈 팀장이 문을 열고 들어와서 비어 있는 자리에 앉았다.
“신 팀장, 오늘이 월요일이라서 손님이 별로 없지?”
“그렇기는 합니다.”
“우리와 같이 저녁 먹자고 불렀네.”
“네, 알겠습니다.”
“신 팀장, 언제까지 이곳에서 일할 거야?”
작년 5월에 퇴사한 신지훈 팀장은 당시만 해도 다른 회사에 얼마든지 취업할 수 있다고 장담했다.
대한 그룹에서의 경력은 꽤나 쓸모 있을 것이기에.
하지만 나이가 자신의 발목을 잡을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여러 군데 원서를 냈으나 거의 모든 회사들이 나이를 문제 삼아서 채용을 꺼려했다.
할 수 없이 취업을 포기하고, 장사를 시작하기 위해서 매형이 운영하고 있는 횟집에서 일을 배우고 있는 중이었다.
“올해까지 이곳에서 일을 배우고, 내년 초에 창업할 생각입니다.”
“어떤 사업을 시작할 생각인가?”
“배운 게 이것밖에 없으니 횟집이 제일 적당한 것 같습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는 속담 모르나?”
“저도 제 적성을 살려서 다른 회사에 취업하고 싶지만, 상황이 그다지 녹녹치 않네요.”
“잠깐 기다려.”
신지훈 팀장과 대화를 중단한 송훈석 회장은 고개를 돌려서 정명훈 사장에게 말을 걸었다.
“정 사장, 나하고 서 실장은 이곳에 없다고 생각하고, 신 팀장과 대화를 나눠 보세요.”
“네, 회장님.”
짧게 대답한 정명훈 사장은 신지훈 팀장에게 본격적인 안건을 꺼내 들기 전에 한마디부터 하고 시작했다.
“신 팀장님, 저도 지난 2월 말까지 대한 그룹에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이제부터 한겨울 부사장이 우리 회사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해 줄 겁니다. 듣는 도중에 궁금한 것이 있으면, 얼마든지 질문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흠흠.”
가벼운 헛기침을 통해서 입을 풀어 준 겨울은 차분한 목소리로 H&J 컨설팅과 H&J Investment의 설립 배경과 비즈니스 영역에 대해서 간단하게 언급했다.
민감한 내용은 철저하게 숨길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설명이 다소 부실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보다 못한 정명훈 사장이 보충 설명을 위해서 입을 열었다.
“신 팀장님이 우리 회사 식구가 되면, 자세하게 설명해 줄게요.”
“알겠습니다, 사장님. 만약 저를 채용하신다면, 어느 부서에 배치시킬 생각이십니까?”
“서 실장님은 비서실장을 맡기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창업한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았는데, 비서실을 운영하는 것은 낭비 아닐까요?”
“업무가 없을까 봐 걱정하는 겁니까?”
“솔직히 그런 점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윙윙―
아주 공교로운 순간에 겨울의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에 찍힌 전화번호를 확인한 겨울은 송훈석 회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부투야 실장님.”
[한 부사장님, 골치 아픈 문제가 하나 발생해서 연락 드렸습니다.]
“어떤 상황인지 말씀해 보십시오.”
[스페인의 ACS가 잉가 3댐 공사에 참여하기를 강력하게 원하고 있습니다.]
“ACS는 중국의 CTG로부터 공사 금액의 10%를 위약금으로 받기로 한 거 아니었습니까?”
[CTG 측에서 배 째라고 드러누웠답니다.]
“위약금을 받을 방법은 없습니까?”
[ACS 측의 말로는 소송을 걸면 된다고 하는데, 적어도 이삼 년은 걸릴 것 같다고 합니다.]
“ACS의 잉가 3댐 공사 참여 여부는 대한 그룹과 상의해서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연락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딸깍.
겨울이 전화 끊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송훈석 회장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한 부사장, 우리 대한 그룹은 ACS에 감정이 좋지 않습니다.”
즉, ACS의 잉가 3댐 공사 참여를 반대한다는 뜻이었다.
“최대한 참고하도록 하겠습니다.”
잠시 대화가 일단락 된 틈을 타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신지훈 팀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 부사장님, 잉가 3댐 공사는 ACS와 CTG의 컨소시엄이 이미 수주 받은 것 아닙니까?”
“이유는 말씀드릴 수 없지만, 이번에 저희한테 공사가 넘어왔습니다.”
“신 팀장님, 이래도 우리 회사에 업무가 없을까요?”
겨울의 뒤를 이어서 정명훈 사장이 의미심장한 물음을 던졌다.
“아닙니다. 제가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생각할 시간을 언제까지 주면 될까요?”
“아무리 늦어도 이번 주를 넘기지 않겠습니다.”
얼추 대화가 끝났다고 판단한 송훈석 회장이 매조지를 위해서 말문을 열었다.
“자자, 그만하고 이제 본격적으로 도다리 회를 먹어 봅시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