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위기에 처할수록 빛을 발하는 사람
월요일 아침.
오늘도 역시 겨울은 장대산 부사장과 함께 정명훈 사장의 집무실에서 모닝커피를 마시며 일과를 시작했다.
정명훈 사장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겨울에게 말을 걸었다.
“한 부사장, 은센기 사장은 콩고민주공화국에 무사히 도착했나?”
“네. 우리나라 시간 기준으로 아침 6시 30분에 무사히 도착했다고 연락 받았습니다.”
“하도진 이사한테 연락해 줬나?”
“오늘이나 내일쯤 만날 예정이라고 합니다.”
겨울과 얘기를 마무리 지은 정명훈 사장은 시선을 옮겨 장대산 부사장한테 말을 건넸다.
“대한 그룹에서 이직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검증 작업은 완료했나?”
“네. 오늘 새벽에 모두 종료됐습니다.”
“검증해 보니 어때?”
“팀장 지원자 여덟 명, 과장과 차장급 스물두 명이 최성진 부회장 측의 사람들로 확인됐습니다.”
“명단은 가지고 있어?”
“네, 여기 있습니다.”
장대산 부사장한테 건네받은 보고서를 꼼꼼하게 읽어 본 정명훈 사장은 지체하지 않고 정재엽 대한그룹 인사담당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 사장님께서 이 시간에 어쩐 일이십니까?]
“이직 희망자들에 대한 검증 결과 때문에 연락드렸습니다.”
[검증 결과 어떻습니까?]
묻는 정재엽 사장의 목소리가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팀장급 후보자 스물네 명 중에서 여덟 명이 의심스럽습니다. 그리고…….”
정명훈 사장은 보고서에 적혀 있는 내용을 상세하게 알려 주었다.
[음, 생각보다 많네요.]
“저도 사장님과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오전 중으로 합격자를 발표하고, 내일부터 H&J 컨설팅에 근무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 주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딸깍.
통화를 끝낸 정명훈 사장은 장대산 부사장한테 검증 결과를 보내 주라고 지시 내렸다.
모든 준비를 끝내고 있던 장대산 부사장이 노트북을 열어서 이메일 전송 버튼을 눌렀다.
일련의 과정을 지켜본 뒤, 겨울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장님, 제가 어제 이사할 집을 구경하다가…….”
겨울은 김윤중 사장을 만나서 나눈 대화 내용을 간략하게 전했다.
“나도 지난주에 홍 기사한테 김윤중 사장과 관련한 얘기를 들었어.”
“어쩐지…….”
“뭐가 말인가?”
“사장님께서 자원 중개와 관련해서 자신감을 보인 이유가 있었네요.”
“미안한 얘기지만, 나는 아직 김 사장님은 만나 보지 못했어.”
즉, 다른 믿는 구석이 있다는 뜻이었다.
겨울은 자신의 추측이 맞는지 정명훈 사장한테 물었다.
“맞아. 김종학 지점장을 빨리 데리고 올 생각이었어. 그런데 김 사장님을 만나 본 소감은 어땠어?”
“저는 좋게 봤습니다만, 최종 결정은 사장님께서 해 주십시오.”
겨울의 얘기를 들은 정명훈 사장은 장대산 부사장에게 말을 걸었다.
“장 부사장이 C&B 코리아에 대한 검증을 해 줬으면 좋겠어.”
“아무리 늦어도 모레까지 검증을 완료하도록 하겠습니다.”
“부탁할게.”
윙윙―
그때, 겨울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발신자를 확인하니, 우간다의 마사카 부통령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액정에 우간다 국가번호인 ‘256’이 아닌 ‘33’이 표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장 부사장님, 국가번호 33은 어느 나라입니까?”
“프랑스입니다만, 왜 그러십니까?”
“마사카 부통령이 프랑스에 가신 것 같습니다.”
“빨리 받아 보세요.”
겨울은 재빨리 통화 버튼을 눌렀다.
“마사카 부통령님, 프랑스는 무슨 일 때문에 가셨습니까?”
[송유관 건설 공사와 관련해서 토탈과 CNOOC의 협상을 참관하러 급하게 넘어왔습니다.]
송유관 건설 공사 프로젝트는 토탈과 CNOOC가 공동으로 수행하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하지만 CNOOC 측에서 핸드폰에 백도어를 설치해서 탄자니아와 우간다의 고위 공직자들에게 선물한 사실이 발각되는 바람에 두 나라에서 쫓겨나는 것이 확정된 상태.
따라서 토탈은 우간다 유전 개발과 관련해서 CNOOC가 보유하고 있는 지분을 인수한 후, 대한 그룹에 매각하기로 약속한 상태였다.
연합군과 중국과의 협상이 지난주 목요일에 타결되었기 때문에 토탈이 본격적으로 행동을 개시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일주일 이상은 뜸을 들여야 정상이다.
그런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토탈은 이틀 만에 전격적으로 행동으로 옮겼다.
겨울은 그 이유가 무엇인지 마사카 부통령에게 물었다.
[대한 그룹의 송훈석 회장님이 CNOOC의 지분을 이달 말까지 인수해 달라고 뿌요네 회장님께 요청했기 때문이랍니다.]
결국 시간이 문제였다.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는 시간은 우리 편이라는 느긋한 마음가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를 뒤집어 말하면, 협상에서 조급함을 보이는 쪽이 불리하다는 뜻.
이 논리를 CNOOC의 지분 매입 협상에 대입하면, 조급함을 보인 토탈이 불리하다는 의미였다.
이대로라면 토탈은 CNOOC가 보유한 지분을 예정 가격보다 비싸게 매입할 가능성이 컸다.
겨울은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
짧은 궁리 끝에 기발한 아이디어를 하나 생각해 낸 겨울이었지만, 전제 조건이 하나 필요했다.
“마사카 부통령님, CNOOC 측에서는 협상 대표로 누가 참석한다고 했습니까?”
[텐궈리 회장이 직접 참석한답니다.]
천만다행이었다.
결정권자인 텐궈리 회장이 협상에 참여하지 않으면, 자신의 아이디어는 50점짜리밖에 되지 않을 테니까.
“제가 부통령님하고 뿌요네 회장님과 동시에 통화하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뿌요네 회장님과 아침을 같이 먹기로 했으니까, 일곱 시간 정도만 기다려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딸깍.
통화를 끝내자, 정명훈 사장이 급하게 물어 왔다.
“한 부사장, 지금 어떤 상황이야?”
“뿌요네 회장이 CNOOC의 지분을 인수하기 위해서 텐궈리 회장을 프랑스로 불렀답니다.”
“너무 서두르는 거 아니야?”
사람의 생각은 거기서 거기라는 듯 정명훈 사장도 우려를 나타냈다.
“그러게 말입니다.”
“한 부사장, 뿌요네 회장이 적정가격으로 CNOOC의 지분을 인수할 수 있는 방안은 있나?”
“완벽하지 않은 아이디어가 하나 있기는 합니다.”
“나한테 얘기해 봐.”
“제가 생각한 아이디어는…….”
장대산 부사장은 어릴 때부터 천재라는 소리를 들어오며 자라 왔다.
하지만 며칠 전에 겨울이 China와 Chinese Government의 차이점을 발견하고, 이를 활용해서 중국을 물 먹이는 모습을 지켜본 순간, 천재는 따로 있다고 생각했다.
방금 전에 겨울이 꺼내 든 아이디어도 마찬가지.
자기는 죽었다 깨어나도 생각해 내지 못하는 것이었다.
위기에 처할수록 빛을 발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데, 겨울을 두고 하는 말 같았다.
겨울을 적이 아닌 아군으로 만난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사이, 겨울의 긴 설명이 끝이 났다.
“…이렇게 하면 될 것 같습니다.”
“탄자니아도 송유관 건설 공사와 관련해서 당사자니까 협상에 참여시키는 게 낫겠지?”
“그렇기는 하지만, 탄자니아는 새벽 4시가 갓 넘었을 뿐입니다.”
정명훈 사장은 겨울이 어떤 의도로 이 말을 꺼냈는지 단숨에 알아챘다.
탄자니아에서 프랑스 파리까지 가는 직항이 없다는 뜻.
때문에 에티오피아를 경유해서 가야 하는데, 이는 적어도 열다섯 시간 이상은 소요된다.
물론, 협상 테이블에 나중에 앉는 방법도 있지만, 이는 모양새가 빠진다.
현 시점에서 문두야 부통령이 협상 시작 전에 프랑스로 날아갈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한 부사장, 잠깐만 기다려.”
겨울과 대화를 중단한 정명훈 사장은 장대산 부사장한테 말을 걸었다.
“장 부사장, 아버님께 부탁해 보는 게 어떨까?”
“무엇을… 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장대산 부사장은 급하게 해리슨 상원의원에게 전화를 걸어서 제법 길게 대화를 나눈 후, 전화를 끊었다.
“아버님이 뭐라고 하셨나?”
“당신께서 알아서 조치를 취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한 부사장, 들었지?”
“네, 물론입니다.”
짧게 대답한 겨울은 급하게 문두야 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한 부사장님.]
잔뜩 잠에 취한 목소리.
“문두야 부통령님, 단잠을 깨워서 정말 죄송합니다.”
[돌발 상황이라도 생겼습니까?]
“돌발 상황까지는 아니고, 용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연락 드렸습니다.”
[얼른 얘기해 보세요.]
“송유관 건설 프로젝트와 관련해서 토탈의 뿌요네 회장이 CNOOC가 보유한 지분을 인수…….”
겨울은 마사카 부통령과 통화한 내용, 자신의 아이디어, 해리슨 상원의원의 전언까지 상세하게 전달해 주었다.
문두야 부통령의 목소리에서 잠이 달아난 지는 오래였다.
[프랑스에 도착해서 전화 드리겠습니다.]
“하하,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 *
“서 실장, H&J 컨설팅과 H&J Investment를 아예 우리 회사 빌딩으로 입주시키는 것은 어떨까?”
창밖을 내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송훈석 회장이 입을 열었다.
“뜬금없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하루건너 한 번씩 H&J 컨설팅에 넘어가기에 하는 말이잖아.”
농담은 농담으로 받아야 하는 법.
“회장님, 제가 적극적으로 추진해 볼까요?”
“농담을 진담으로 받으면 어떻게 해.”
“저도 농담이었습니다.”
“정 사장이 우리를 왜 보자고 하는데?”
“오늘부터 토탈이 CNOOC의 지분을 인수하기 위한 본격적인 협상을 진행할 예정인데, 돌발 변수가 발생한 것 같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물어봤나?”
바로 송훈석 회장의 조급함 때문이라고, 정명훈 사장이 조금 전에 알려 주었다.
그러나 그 얘기를 꺼내면 송훈석 회장은 백발백중으로 불쾌한 심기를 드러낼 것이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모른 척 하기로 결론 내렸다.
“H&J 컨설팅에 도착하시면 알려 주겠답니다.”
* * *
윙윙―
드디어 겨울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기다리고 있던 전화였기 때문에 겨울은 얼른 통화 버튼을 눌렀다.
사전에 약속된 대로 스피커폰으로.
“네, 마사카 부통령님.”
[한 부사장님, 뿌요네 회장님을 바꿔 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잠시 후, 뿌요네 회장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서 들려왔다.
[한 부사장님, 오랜만입니다.]
“뿌요네 회장님,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나하고 통화하고 싶어 하셨다는데,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얘기해 보세요.]
“마사카 부통령님을 위해서 아예 스피커폰으로 전환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할게요.]
잡음이 섞여서 들려오는 것으로 봐서 스피커폰으로 전환한 것 같았다.
“뿌요네 회장님, 오늘부터 CNOOC가 보유한 지분을 인수하기 위한 협상을 시작한다고 들었습니다.”
[대한 그룹의 송 회장님께 3월말까지 CNOOC의 지분을 넘겨주기로 약속한 상태입니다.]
“제가 CNOOC의 지분을 저렴하게 인수할 수 방법을 알려 드릴까요?”
[빨리 말씀해 보세요.]
“CNOOC와 지분 인수 협상은 나중에 진행하는 것으로 미루고, 우간다와 탄자니아가 제기한 손해 보상 협상부터 먼저 시작하십시오.”
[네? 손해 보상 협상이라뇨?]
뿌요네 회장이 궁금해 하는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서 들려왔다.
“회장님도 아시다시피 CNOOC가 송유관 건설 프로젝트에서 퇴출됨으로 인해서 공사는 자연스럽게 지연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저도 동의합니다.]
“송유관 건설공사가 지연됨으로 인해서 우간다와 탄자니아에 피해가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점을 이용해서 두 나라는 토탈과 CNOOC 측에 공사 지연에 따른 피해를 보상해 달라고 요구할 겁니다. 이때 회장님은 공사 지연에 대한 책임을 CNOOC에 떠넘기십시오.”
[CNOOC의 텐궈리 회장이 과연 두 나라의 요구를 들어 줄까요?]
예상한 대로 뿌요네 회장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여 주었다.
“당연히 배 째라고 드러누울 겁니다.”
[그럼 협상을 벌일 이유가 없잖아요.]
“두 나라가 요구한 피해 보상 금액을 회장님께서 대신 부담해 주고, 텐궈리 회장한테 CNOOC가 보유한 지분을 넘겨받는 건 어떨까요?”
[아… 무슨 말인지 감 잡았습니다.]
“텐궈리 회장이 강하게 저항하면, 벤자민 파바르 전 부회장의 토탈 지분 매입 사건을 협상 테이블에 올려놓도록 하십시오.”
[하하하, 무슨 말인지 알았어요.]
뿌요네 회장의 만족한 심기가 목소리에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문두야 부통령님이 미군 수송기를 타고 프랑스로 날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CNOOC와의 협상개시 시간을 늦추도록 할게요.]
“그래 주시면 더욱 감사하겠습니다.”
[다음 달에 우리나라에서 봅시다.]
“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