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떠나는 사람, 만나는 사람
“이른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언제나 그렇듯 겨울은 심드렁한 목소리로 호영의 전화를 받았다.
[은센기 사장이 오전 11시 30분 비행기로 출국한단다.]
“오후 4시 30분 비행기 아니었어?”
[VIP들이 은센기 사장을 최대한 빨리 만나자고 했다더라. 컵라면과 즉석 밥의 품목도 결정해야 하고, 의약품 샘플도 직접 보기를 원했대.]
“알았어.”
[우리는 9시쯤에 공항에 도착할 예정이니까, 늦지 말고 와라.]
“그렇게 할게.”
겨울이 전화를 끊자, 궁금함을 이기지 못한 가을이 말을 걸어 왔다.
“오빠, 호영이 오빠가 뭐래?”
“은센기 사장이 11시 30분 비행기로 돌아간단다.”
“오늘 오전 약속은 어떻게 하지?”
겨울과 가을은 오늘 오전 10시에 서래마을에 위치한 주택을 살펴보기 위해 약속을 잡은 상태였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은센기 사장의 배웅을 등한시할 수는 없었다.
“연기해야지, 별수 있냐?”
“홍 기사님한테 빨리 전화해 줘.”
“알았다.”
겨울은 홍석훈 기사에게 전화를 걸어서 이 사실을 전달했다.
[부사장님, 그런데 공항까지 어떻게 가실 생각입니까?]
“제가 운전해서 갈 수 있으니까, 홍 기사님은 댁에서 편히 쉬고 계세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30분만 기다려 주십시오.]
뚝.
대답도 듣지도 않고 홍석훈 기사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
“홍 기사님이 지금 우리 집으로 오신다고 하더라.”
“오빠, 집에 있기 심심한데, 나도 공항에 따라갈까?”
“그러든지.”
“그런데, 강희 언니도 우리 회사에 입사했다며?”
“이재성 대리가 그러든?”
“어.”
“강희가 대한전자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고 하니까, 네가 곁에서 잘 보살펴 줘.”
“알겠어.”
* * *
“홍 기사님, 집주인이 뭐라고 했습니까?”
“가급적이면 오늘 중에 만나 봤으면 하셨습니다.”
‘은센기 사장이 9시 30분에 출국 수속을 밟는다고 가정하고, 10시 30분에 서울로 출발하면…….’
계산을 끝낸 겨울은 홍석훈 기사와 대화를 이어 나갔다.
“홍 기사님, 집주인께 11시 30분쯤에 가겠다고 말씀을 전해 주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겨울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가을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홍 기사님, 집주인은 뭐하시는 분이세요?”
“중개인입니다.”
“설마… 부동산 중개인이요?”
“하하, 아닙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자원 거래를 중개해 주고 커미션을 받는 브로커입니다.”
겨울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홍 기사님, 어떤 자원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주로 중개하는 품목은 석유, 석탄, 철광석입니다.”
“그분이 근무하고 있는 회사와 성함은 어떻게 됩니까?”
“그분은 C&B 코리아라는 회사를 운영하고 계시고, 성함은 김윤중이라고 합니다.”
“홍 기사님은 김 사장님과 인연을 맺은 지 오래되었습니까?”
“군대를 제대하고 처음 만났으니까, 25년 가까이 됩니다.”
“C&B 코리아의 자원 중개 능력은 어떻습니까?”
겨울은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다.
사실 홍석훈 기사가 김윤중 사장의 집을 겨울에게 소개시켜 주려 한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자원 중개.
자원을 중개해 주기 위해서는 별도의 노하우가 필요하다.
사촌 매형인 정명훈 사장은 무역 분야에는 해박한 지식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자원 분야의 전문가는 아니었다.
그런 이유로 정명훈 사장에게 김윤중 사장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 말씀드렸고, 겨울에게 최종 컨펌을 받으라는 지시를 받아 놓은 상태였다.
겨울과 김윤중 사장을 연결해 해 주기 위해 통화하던 중에 우연찮게 집 매각 얘기가 흘러나왔다.
하여 그의 집을 구경하러 가는 척하면서 자연스런 만남을 추진하고 있는 중이었다.
짧게 생각을 끝낸 홍석훈 기사는 겨울의 질문에 대답했다.
“자원 거래 분야에서 나름대로 명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김 사장님에 대해서 묻는 이유를 알려 주실 수 있습니까?”
“기회가 되면 자원 중개 업무를 의뢰해 볼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김 사장님께 얘기를 꺼내 볼까요?”
“그렇게 해 주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 * *
인천국제공항.
호영, 은센기 사장, 가쿠타 부장이 힘겹게 카트를 밀고 겨울 쪽으로 다가왔다.
이를 지켜보던 겨울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문이 막혔다.
가을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겨울에게 말을 걸어왔다.
“오빠, 은센기 사장님이 저 많은 짐들을 가지고 가는 거야?”
“아마도…….”
“그런데 항공사에서 받아 주기는 할까?”
“추가비용을 부담하면 가능해.”
겨울과 가을이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짐이 가득 담긴 카트가 멈췄다.
겨울은 산더미 같은 짐을 가리키며 은센기 사장에게 물었다.
“짐이 너무 많은 거 아닙니까?”
“하하, 어떻게 하다 보니 이렇게 됐습니다.”
은센기 사장이 겸연쩍은 웃음을 흘렸다.
“도대체 박스 안에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컵라면, 즉석 밥, 의약품, 옷, 건강식품 등 샘플이 들어 있습니다.”
“건강식품은 또 뭡니까?”
은센기 사장보다 호영의 입이 먼저 열렸다.
“홍삼이 함유된 건강식품인데, 우리가 VIP들에게 주는 선물이야.”
“VIP들은 기본적으로 갖출 것은 다 갖춘 분들이야. 알고 있지?”
즉, 싸구려 선물은 주지 말라는 뜻이었다.
“한 박스에 1,000달러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그 정도면 충분하지.”
“일단 수하물이나 처리하고 얘기하자.”
겨울은 수하물을 보내고 남는 시간을 이용해서 은센기 사장과 함께 커피 전문점에 자리를 잡았다.
“가쿠타 부장님, 은센기 사장님께 TV와 컴퓨터에 대한 제안서와 견적서를 전달했습니까?”
“네. 어제 이메일로 전송해 줬고, 혹시 몰라서 USB에 저장해서 건네 드렸습니다.”
“컵라면과 즉석 밥은 어떻게 할 예정입니까?”
“은센기 사장님이 VIP들과 협의해서 품목을 결정하면, 제안서와 견적서를 보낼 예정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가쿠타 부장과 대화를 끝낸 겨울은 은센기 사장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을 걸었다.
“의약품 수입하는 데 차질이 발생하지 않도록 만전을 기해 주십시오.”
무려 50억 달러어치였다.
은센기 사장은 의약품 수입건만 생각하면 가슴이 벌렁거렸다.
엄청나게 많은 의약품을 수입해서 다섯 개 나라에 공급하려면, 해결해야 할 업무도 많을뿐더러 그 내용 또한 까다롭고 복잡할 것이다.
하지만 불안하지는 않았다.
자신들이 의약품 수입 허가를 쉽게 받을 수 있도록 VIP들이 전폭적으로 지원해 줄 것이기 때문에.
혹시나 업무 처리가 힘들다고 판단되면, 자신의 손에 떨어질 이익의 일부를 덜어 내서 전문가들을 고용할 생각이었다.
짧게 생각을 끝낸 은센기 사장은 겨울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 점에 대해서는 제가 책임질 테니까, 걱정 붙들어 매십시오.”
“잠비아에 ZAHA라는 유통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네이선 싱칼라 회장이라고 있습니다. 이분이 의약품 수입 허가 및 유통 분야에는 전문가니까, 힘들면 도움을 요청하십시오.”
“싱칼라 회장께 한 부사장님의 이름을 얘기하면 됩니까?”
“물론입니다. 싱칼라 회장의 전화번호는 문자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싱칼라 회장에게 도움을 받으면, 가뜩이나 미숙한 H&E 트레이딩 직원들의 업무 숙련도가 늘지 않을 것만은 분명한 사실.
“한 사장님, 싱칼라 회장은 플랜 B로 가동했으면 좋겠습니다.”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그나저나 우리나라에 언제쯤 오실 겁니까?”
“이달은 아니더라도 늦어도 상반기 안에는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 잉가 3댐 건설 공사 계약이 있었죠?”
“그때 정호영 씨도 데리고 갈 생각입니다.”
“하하, 알겠습니다.”
출국 시간이 되자 은센기 사장은 겨울 등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고, 출국장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밀린 숙제를 끝내서 후련하다는 듯 호영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겨울에게 말을 걸었다.
“한 부사장, 여기까지 왔는데 을왕리 해수욕장에서 조개구이나 먹고 돌아갈래?”
“나도 그러고 싶은데, 오늘은 선약이 있어서.”
“무슨 일요일에도 일하냐?”
“그게 아니라, 이사할 집을 보러 가는 거야.”
“오, 그럼 나도 따라가서 구경해도 되냐?”
“안 될 건 없지만, 가쿠타 부장님은 어떻게 하고?”
“가쿠타 부장님도 같이 가면 되잖아. 본인이 싫다고 하면 서울 시내에 내려놓고.”
“저도 부사장님이 이사하는 집이 정말 궁금합니다.”
가쿠타 부장이 어눌한 한국어를 사용해서 대화에 끼어들었다.
“어? 우리나라 말을 구사하실 수 있네요?”
호영이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듣는 것은 가능하지만, 말하는 것은 많이 부족합니다.”
“하하, 많이 부족하긴 하네요.”
그때, 겨울이 그들을 재촉했다.
“집주인이 기다리겠다. 빨리 출발하자.”
* * *
“부사장님, 이 집입니다.”
홍석훈 기사가 커다란 대문에 설치된 초인종을 누르자, 60대로 보이는 남자가 대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
“한겨울 부사장님, 어서 오십시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저는 C&B 코리아의 대표인 김윤중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H&J 컨설팅의 부사장인 한겨울입니다.”
겨울은 이어서 같이 따라온 가을, 호영, 가쿠타 부장을 일일이 소개시켜 주었다.
김윤중 사장에게서는 편안한 옷차림에도 불구하고 범상치 않은 분위기가 풍겨 나왔다.
“한 부사장님, 일단 안으로 들어가서 대화를 나누는 게 어떨까요?”
“네, 좋습니다.”
김윤중 사장은 들어가다 말고 잔디가 깔린 앞마당을 가로질러 텃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손으로 이것저것 가리키며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
“텃밭은 20평이 조금 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햇빛이 들어오기 때문에 과일과 채소들이 잘 자라는 편입니다. 그리고 벽을 따라서 감나무, 사과나무, 복숭아나무, 대추나무가 심어져 있습니다.”
자부심이 넘치는 그의 설명처럼 잘 가꿔진 정원과 텃밭은 겨울의 마음에 쏙 들었다.
주택은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되어 있었다.
지하실에는 조용히 영화를 감상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 있었고, 1층에는 거실, 부엌, 안방을 포함한 방이 세 개, 2층에는 방이 두 개가 있었다.
집안 내부의 인테리어 또한 고급스럽고 세련됐는데, 다시 수리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상태가 깔끔했다.
겨울이 여기저기 살펴보는 사이에도 김윤중 사장의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이 집은 제가 직접 지었기 때문에 살아 보시면 분명 그 장점이 느껴지실 겁니다.”
“사장님, 손때 뭍은 이 집을 매각하고 아파트로 이사하시려는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제가 자식이 하나 있는데, 결혼해서 분가했습니다. 와이프가 외롭다고 아들이 살고 있는 집 근처의 아파트로 이사 가자고 조르더군요.”
“아, 그렇군요.”
겨울은 그가 권하는 대로 소파에 앉았다.
그러고는 묻고 싶던 얘기를 꺼내 들었다.
“사장님, 저는 이 집이 마음에 듭니다. 제가 얼마면 매입할 수 있겠습니까?”
“제 부탁을 들어주신다면, 30억에 매각할 수 있습니다.”
순간, 옆에 앉아 있던 홍석훈 기사가 은밀하게 신호를 보내왔다.
겨울은 알았다는 의미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주고, 김윤중 사장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어떤 부탁인지 말씀해 보십시오.”
“제 회사의 직원들과 저를 H&J 컨설팅에 채용하는 것을 고려해 주십시오.”
“C&B 코리아는 어떻게 하시고요?”
“폐업할 예정입니다.”
사실 겨울은 C&B 코리아와 협업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C&B 코리아의 간판을 내리겠다는 김윤중 사장의 얘기에 몹시 당혹스러웠다.
그 이유가 궁금해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이제 개인이 가지고 있는 역량에 의한 자원 중개는 한계에 도달한 상황입니다. 망해 가는 회사를 지켜보느니, 깔끔하게 접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저희 회사에 입사하시면 수행해야 할 업무가 상당히 많을 텐데, 문제없겠습니까?”
“어떤 업무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아직 저희 회사에 입사가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길게 설명해 드릴 수 없습니다만, 석유, 구리 등의 자원을 인도와 대한 그룹에 중개해 주셔야 합니다.”
“자원 중개는 저희 회사의 전문 분야입니다.”
“사장님과 C&B 코리아의 직원들의 채용 여부는 지금 당장 제가 결정할 수 없습니다. 시간 날 때 저희 회사를 정식으로 방문해 주십시오.”
“직원들과 상의해서 최대한 빨리 연락드리고 찾아뵙겠습니다.”
“사장님이 저희 회사의 식구가 되면, 이 집을 매입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깔끔하게 결론 내린 겨울이었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