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일파만파 커지는 사건 (2)
이재성 대리의 질문을 받은 겨울은 아차 싶었다.
서동호 실장과 통화할 당시에 격앙된 감정을 제대로 추스르지 못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부릉부릉 멤버들에게까지 조강희와 관련된 사건을 얘기할 필요는 없었다.
그것이 조강희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겨울이 적당한 답변거리를 생각하느라 머리를 쥐어짜는 사이, 비교적 솔직한 성격을 가진 장대산 부사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는 도중에 한 부사장님이 누군가와 통화했는데, 그다지 기분 좋은 내용이 아니어서 그래요.”
“혹시… 우리 회사와 관련된 내용입니까?”
“음, 그건 아닙니다.”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네요.”
분위기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겨울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 대리님, 부릉부릉 팀원들에게 제가 대한 그룹을 퇴사했다고 말했나요?”
“아, 조금 전에 얘기해 주었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김헌기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이재성 대리에게 질문을 던졌다.
“재성 씨, H&J 컨설팅에 대리로 스카우트된 겁니까?”
“하하, 그렇습니다.”
“이야! 그럼 오늘 저녁은 이 대리님이 사야겠는데요?”
“하하, 저녁은 한 부사장님이 사셔야 할 것 같으니까, 2차를 제가 쏘겠습니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겨울이 입을 열었다.
“이거이거, 우리 대리님이 가난한 부사장 지갑을 털려고 하시네. 제가 근사한 곳에서 2차를 쏠 테니까, 1차는 이 대리님이 쏘세요.”
“아유, 이를 말씀이십니까?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윙윙―
그때, 송지유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그녀는 발신자를 확인하자마자 황급히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녀의 모습을 힐끗 쳐다보면서 이재성 대리가 장대산 부사장에게 말을 걸었다.
“장 부사장님, 부릉부릉 멤버들에게 H&J 컨설팅이 어떤 회사인지 간단하게 설명해 주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러죠. H&J 컨설팅은 지난 2월 말에 설립한 신설 회사입니다.”
장대산 부사장은 H&J 컨설팅의 설립 배경과 비즈니스 영역에 대해서 간단하게 언급했다.
당연히 민감한 내용과 H&J Investment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참고로 저는 그 회사에서 부사장직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장 부사장님, 직원들은 계속 충원해야겠네요?”
“당분간은 그래야 할 겁니다.”
장근호는 H&J 컨설팅으로 이직할 생각으로 이런 말을 꺼낸 것이 아니었다.
그동안 여동생처럼 친하게 지내던 조강희 때문이었다.
“큼큼, 제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 Y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사람이 있습니다. 작년 연말에 대한전자를 퇴사하고, 현재 백수 상태입니다.”
조강희는 부릉부릉 멤버들 중에서 제일 친한 사람은 겨울이었고, 그 다음이 장근호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그와는 소속은 다르지만 같은 빌딩에서 근무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속사정을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이런 말을 꺼낸 이유는 자기를 H&J 컨설팅에 취직시켜 주기 위해서였으리라.
마음속으로 그에게 감사인사를 전하며, 얼른 입을 열었다.
“근호 오빠, 저 취업했어요.”
“어? 진짜? 어느 회사에?”
“오빠가 생각하고 있는 그 회사에요.”
“어어? 아, 뭐야. 그렇게 됐으면 나한테 전화부터 했어야지.”
“오늘 취업이 확정됐거든요.”
“어쨌든 강희야, 진심으로 축하한다.”
조강희에게 축하 인사를 건넨 장근호는 겨울에게 말을 걸었다.
“한 부사장님, 강희가 대한전자에 근무할 당시에 마음고생이 심했어요.”
“근호 씨는 그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강희와 저는 소속은 다르지만, 같은 빌딩에 입주한 연구소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강희가 어떤 일을 당했는지 얘기해 줄 수 있습니까?”
겨울의 질문을 받은 장근호는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통화를 위해서 밖으로 나간 송지유가 다시 돌아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듣는 곳에서 대한전자 연구소와 관련한 얘기를 언급해 봐야 좋을 게 없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얘기해 줄게요.”
장근호가 발을 뺀 이유가 송지유 때문이라는 사실을 간파한 겨울이었다.
송지유가 자리에 착석하자, 호기심으로는 둘째가면 서러워할 이재성이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송지유 씨, 무슨 일 있습니까?”
“별일 아닙니다.”
“아, 네.”
이재성은 부릉부릉 멤버들 중에서 자기가 송지유를 제일 많이 알고 있다고 장담했다.
그녀와 같은 빌딩의 같은 층에 근무하고 있다는 이유로 오가며 자주 만났으니까.
지금 그녀의 표정으로 보아, 말과는 다르게 심각한 상황이 발생한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당사자가 얘기하기 싫어하는데, 꼬치꼬치 물어보는 것은 실례였다.
이재성은 뻘쭘한 분위기를 해소하기 위해서 화제를 전환했다.
“자, 자! 우리 부릉부릉 팀원들이 1년 만에 모두 모인 것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건배 한 번 하실까요? 건배!”
“건배!”
“건배!”
이재성 대리가 소주잔을 위로 들어 올리자, 여러 가지 상황으로 인해서 축 쳐져 있던 분위기가 확 달아올랐다.
노릇노릇 구워진 삼겹살을 입에 넣은 김헌기가 할 말이 있다는 듯 입을 열었다.
“한 부사장님, 지난 11개월 동안 아프리카 법인에 근무한 썰 좀 풀어주세요.”
김헌기의 요청을 받은 겨울은 곤혹스러웠다.
아프리카 법인에서 일어난 일들을 동기들에게 얘기해 봐야 도움 될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그렇다고 겨우 되살아난 분위기를 망칠 수는 없었다.
겨울은 적당한 에피소드 거리를 생각해 내고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우, 너무 많은 일들이 있어서 다 이야기해 줄 수가 없네요. 음, 9년 전에 우리나라에서 만난 사람을 콩고민주공화국에서 다시 만난 썰을 얘기해 줄게요.”
“네, 좋습니다.”
“여러분도 알고 계시다시피 저는 축구 선수 출신이잖아요. 9년 전에 콩고민주공화국의 청소년 축구 국가대표 선수들이 친선 경기를 위해서 우리나라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겨울은 은센기 사장을 다시 만나게 된 사연과 그 이후에 어떤 인연을 맺게 되었는지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해 주었다.
“…그 덕분에 제 약점 중 하나던 영어와 프랑스어를 완벽하게 습득했어요.”
“이야, 그러면 그분이 한 부사장님께는 은인이겠네요?”
“하하, 헌기 씨의 말이 맞아요.”
반면, 겨울의 독종 같은 근성을 잘 알고 있는 송지유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겨울은 분명 은센기 사장이 아니더라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외국어를 터득했을 것이다.
그녀가 짧은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에도 두 사람의 대화는 계속됐다.
“한 부사장님, 그분과 헤어질 때 많이 섭섭했겠네요?”
“그분과는 계속 비즈니스를 계속 진행할 예정이기 때문에 그렇게 섭섭하지는 않았어요. 참고로 그는 지금 비즈니스 때문에 우리나라에 입국해 있는 상황입니다.”
“오! 어떤 비즈니스인데요?”
겨울은 또다시 곤란한 상황에 빠져들었다.
은센기 사장과 관련된 비즈니스를 일일이 열거하면 많은 시간을 잡아먹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아프리카 나라들은 식수 사정이 상당히 열악한 편입니다. 그런 이유로 우리나라에서 정수기를 수입해서 바이어한테 공급할 예정입니다.”
이재성 대리는 겨울이 난처한 상황에 빠져 있음을 본능적으로 눈치채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화제 전환을 시도했다.
“아, 아프리카 하니까 생각나네요. 작년 신입사원 연수 당시에 한 부사장님을 아프리카 법인으로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계십니까?”
“재성 씨네 팀장이었던 홍성훈 부장이었잖아요.”
“흐흐, 그 사람 권고사직 징계를 받았는데, 계속 버티다가 결국 퇴사했습니다. 그가 어떻게 퇴사했는지 알려 줄까요?”
“알려 주세요.”
“그렇게 아는 척 뻗대더니 지난 1월에 아프리카 법인에서 콜레라에 걸려서 퇴사했답니다. 으하하하!”
그들이 지난 일을 가지고 대화 분위기를 띄울 무렵, 식당 문이 열리고 송훈석 회장이 일행들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그를 알아본 손님들로 인해서 순간적으로 식당 내부가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송훈석 회장은 손님들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걸음을 멈추고 제법 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크흠, 저희로 인해서 식사하는 데 불편을 끼쳐서 정말 미안합니다. 그러는 의미에서 제가 여러분의 식사비를 모두 부담하겠습니다.”
“와아아!”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손님들이 커다란 함성을 질렀다.
분위기가 되살아난 것을 확인한 송훈석 회장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말을 이어 나갔다.
“저희는 조용히 앉아서 삼겹살에 소주 한 잔만 하고 갈 테니까, 없는 사람 취급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하하! 알겠습니다!”
시끌벅적한 소음 속에서 송지유는 조금 전에 서동호 실장과 통화한 내용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서동호 실장은 뜬금없이 조강희가 동기 모임에 참석했는지부터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조강희의 대한전자 퇴사 사건이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 중이라고 하면서 더 이상 상처를 입지 않도록 위로해 주라고 신신당부해 왔다.
알았다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으려고 하는데, 모임 장소가 어디인지 넌지시 물어 오는 게 아닌가.
이유를 물어보니 식당에 음식 값을 대신 결제해 주기 위함이란다.
아무 의심 없이 식당 이름을 알려 줬더니만, 송훈석 회장이 일행들과 함께 이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송훈석 회장이 이곳을 찾아온 이유는 보나마나 빤했다.
조강희의 퇴사 사건이 더 이상 확대되기 전에 조기 종결시키기 위함이리라.
마음의 상처는 방치하면 할수록 회복이 힘든 법을 알고 있기에 그녀는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송지유가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송훈석 회장 일행은 옆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았다.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장대산 부사장이 겨울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한 부사장님, 어떻게 할까요?”
“오늘 저희는 동기 모임에 참석하러 온 겁니다. 저분들을 신경 쓸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겨울 오빠, 마음이 불편해서 그러니까, 그냥 일어나면 안 될까?”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조강희의 요구에도 겨울은 꿈적도 하지 않았다.
“강희야, 네가 저분들한테 잘못한 것이 있니?”
“그건 아닌데… 아까 오빠가 서동호 실장님과 통화한 것이 마음에 걸려서 그래.”
“내가 없는 얘기를 한 것도 아니잖아.”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송지유는 서동호 실장이 모임 장소가 어디인지 물은 이유를 확실하게 깨달았다.
서동호 실장이 겨울과 통화하면서 무언가 실수를 저지른 것이리라.
겨울에게 사과하기 위해서 송훈석 회장 등이 이곳을 황급히 찾아온 것이고.
송지유가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에도 두 사람의 대화는 계속됐다.
“겨울 오빠, 우리 회사가 대한 그룹에 밉보여서 좋을 게 하나도 없잖아.”
“대한 그룹이 이 일로 우리 회사에 압력이라도 행사할 것 같아서 그러니?”
“그건…….”
“내가 장담하는데, 적어도 대한민국에서 우리 회사에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들은 없어.”
“만약에 그런 상황이 발생하면 작은 고추가 맵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보여 줄 수도 있고.”
겨울 뿐만 아니라 장대산 부사장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알겠어.”
모임에서조차 안절부절못하는 조강희를 지켜보고 있자니, 장근호는 그녀가 너무 안쓰러웠다.
신입사원 연수 당시의 그녀는 부릉부릉 팀의 비타민 같은 존재였다.
밝고 명랑하던 그녀가 불과 1년도 지나지 않아서 이렇게 소극적인 성격으로 변해 버리다니.
그녀를 이렇게 만들어 버린 인간들에게 복수하고 싶었지만, 자기는 고작 입사 2년차였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한겨울이라면… 조강희의 울분을 해소해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들었다.
“한 부사장님, 송훈석 회장님과 친하십니까?”
“친하다는 표현보다 비즈니스 파트너라는 표현이 맞을 겁니다.”
“한 부사장이 부탁하면 회장님께서 들어줄 가능성이 있을까요?”
“아주 어렵지 않은 부탁이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만… 저한테 부탁할 게 있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강희를 괴롭히던 인간들한테 그에 합당하는 처벌을 내려 달라고 부탁하고 싶습니다.”
겨울이 대답하기 전에 조강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근호 오빠, 하지 마. 이미 끝난 일이야.”
“너는 네가 무능력자로 몰린 게 억울하지도 않냐?”
“내가 능력이 부족한 건 사실인데 뭐…….”
“이 멍청아, 네가 그 인간들한테 괴롭힘을 당한 이유는 따로 있잖아.”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