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하얀 뭉게구름의 의미
대한전자에서 컴퓨터 마케팅을 담당하고 있는 유석균 이사는 두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최악의 상황이 닥쳤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물론, 중국 공장에서 생산하는 컴퓨터를 수출하지 못하는 것 때문이 아니었다.
그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기에 플랜 B를 이미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납기가 3개월밖에 주어지지 않은 것은 정말 심각한 문제였다.
국내 공장을 풀가동하면 매월 10만 대 생산은 가능하겠지만, 나머지 30만 대는 하늘이 두 쪽 나도 생산할 수 없다.
그렇다고 H&J 컨설팅이 어떤 회사라는 사실을 빤히 알고 있는데, 배 째라고 드러누울 수도 없는 상황.
오도 가도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처량할 따름이었다.
“하아…….”
“유 이사님,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유석균 이사가 한숨을 내쉬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겨울이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 봐도 저희가 공급할 수 있는 컴퓨터는 30만 대가 최대입니다.”
“화물기로 운송했을 때의 경우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최홍주 이사님, 모니터는 어떻습니까?”
겨울의 질문을 받은 최홍주 이사는 더욱더 난감한 상황에 빠졌다.
H&J 컨설팅에서 요구한 27인치 모니터는 전량 중국 공장에서 생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27인치 모니터를 국내 공장에서 생산하기 위해서는 준비하는 데에만 서너 달은 족히 걸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납기를 절대로 맞출 수 없다.
아무리 두뇌를 혹사시켜도 해결책은 하나밖에 없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27인치 모니터는 공급할 수 없습니다.”
“대책이 전혀 없다는 말씀입니까?”
“있기는 하지만, 바이어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 상황입니다.”
“어떤 방법인지 말씀해 보세요.”
“32인치 모니터를 공급하면 됩니다만, 이 조차도 30만 대가 최대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최홍주 이사와 대화를 마무리한 겨울은 시선을 송훈석 회장에게 옮기며 말을 이어 나갔다.
“회장님, 이제부터 제가 드리는 말씀을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절대로 오해하지 않을 테니까, 얼른 얘기해 보세요.”
“저희 회사가 비록 대한 그룹과 전략적인 파트너십 계약을 체결했다고 해서 모든 비즈니스를 대한 그룹과 진행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도 그 점에 대해서는 동의합니다.”
“저희는 바이어들이 발주한 컴퓨터를 대한전자에서 구입하고 싶지만, 아시다시피 불가능한 상황이기 때문에 부득불 30만 대는 SH무역을 통해서 구입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송훈석 회장은 SH무역의 정상호 사장이 이 자리에 참석한 이유를 이제야 확실하게 깨달았다.
겨울은 이런 상황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하고 플랜 B를 수립해 놓고 있던 것이리라.
컴퓨터 30만 대를 SH무역에 넘겨주는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원인이 자기들한테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네요.”
“저희 회사의 고충을 이해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송훈석 회장의 동의를 얻어 낸 겨울은 정상호 사장에게 시선을 옮기며 물었다.
“정 사장님, 저희가 제시한 조건대로 컴퓨터 30만 대를 공급해 주실 수 있습니까?”
“얼마든지 가능합니다만, 먼저 결정을 해 주셔야 할 게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말씀해 보십시오.”
“모니터의 크기를 결정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겨울은 정상호 사장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였다.
바이어에게 대한전자는 32인치 모니터를, SH무역은 27인치 모니터를 공급하면 형평성에 어긋난다.
더구나 모니터의 크기를 자기가 결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코사 실장에게 물어보고 대답해 줄 수밖에 없는 상황.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겨울이 핸드폰을 들고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송훈석 회장이 말을 걸어 왔다.
“한 부사장, 우리가 이곳에 없다고 생각하고, 오코사 실장과 통화하세요.”
오코사 실장과 통화하다가 돌발적인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그의 선심이 내키지 않은 겨울이었다.
그러나 분위기상 송훈석 회장의 부탁을 거절할 수도 없었다.
“네, 알겠습니다.”
짧게 대답한 겨울은 즉시 오코사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천만다행으로 전원이 꺼져 있다는 기계음이 들려왔다.
느낌상 천유런 외교부장과 협상 테이블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회장님, 지금 회의 중인 것 같습니다.”
“한 부사장, 원래 오늘 오전에 사인하기로 한 게 아니었나요?”
송훈석 회장은 듣고 있는 귀가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듯 중요한 내용은 숨기고 물었다.
겨울도 그의 의도를 읽고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저희도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의견 조율이 덜 끝난 게 있어서 시간을 조금 연장했다고 합니다.”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나중에 얘기해 줄 수 있겠죠?”
“네, 물론입니다.”
“알았어요. 정 사장님과 마저 대화를 나누세요.”
자신의 역할을 충분하게 수행한 송훈석 회장이 물러났다.
“정 사장님, 모니터 크기는 나중에 결정해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합시다.”
“컴퓨터 30만 대는 어느 제조 회사에서 공급받기로 했습니까?”
“현재 얘기가 된 곳은 BK전자 10만 대, 서울컴퓨터 10만 대, 미래컴퓨터에서 10만 대를 공급받기로 했습니다.”
“정 사장님, 잠깐만요.”
겨울보다 송훈석 회장의 입이 먼저 열렸다.
“네, 말씀하십시오.”
“다른 컴퓨터 제조 업체의 공급 능력을 파악해 보셨습니까?”
“2만에서 3만 대 수준이었습니다. 그나저나 왜 그러시는 겁니까?”
“저희 회사와 BK 그룹이 사이가 좋지 않아서 그럽니다.”
정상호 사장도 대한 그룹과 재계 2위인 BK 그룹이 견원지간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사이가 별로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사업의 전 분야에서 사사건건 대립하고 있는데, 사이가 좋을 리 있겠는가.
하지만 BK 전자에서 컴퓨터를 공급받지 못하면, H&J 컨설팅에 30만 대 공급은 불가능했다.
그는 이 점을 언급하며 그에게 양해를 구했다.
“10만 대라…….”
끝말을 흐린 송훈석 회장은 눈을 지그시 감고 장고에 들어갔다.
사람들 모두 그의 생각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숨죽여 기다렸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 이윽고 결심이 섰는지 송훈석 회장이 눈을 뜨며 입을 열었다.
“정 사장님, 저희가 컴퓨터 수출 욕심이 있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는 점을 이해해 주십시오.”
“알고 있으니까, 말씀해 보십시오.”
“SH무역이 BK전자에서 공급받기로 한 컴퓨터 10만 대는 저희 대한전자가 책임지겠습니다.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SH무역이 H&J 컨설팅에 공급하는 컴퓨터 20만 대를 아프리카까지 무상으로 운송해 드리겠습니다.”
화물기 전세를 통해 아프리카까지 운행할 경우에 평균적으로 40만 달러가 소요된다.
화물기 한 대에 약 1만 대의 컴퓨터가 실린다고 가정하면, 20만 대를 운송하는 데 약 800만 달러의 비용이 발생한다.
정상호 사장은 송훈석 회장의 제안을 사양하지 않고 수용하기로 결정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컴퓨터 10만 대를 BK전자에서 매입할 경우에도 최소 1,000만 달러 이상의 이익은 창출할 수 있었기 때문에.
“좋습니다. 회장님의 제안을 수용하겠습니다.”
“통 크게 양보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이제 한 부사장과 대화를 나누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송훈석 회장과 대화를 마무리한 정상호 사장이 겨울에게 말을 걸었다.
“한 부사장, 송 회장님 말씀 들었죠?”
“네, 들었습니다. 이제부터 제가 드리는 말씀은 대한전자와 SH무역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내용입니다. 제안서와 견적서는 이번 주 안으로 저희의 아프리카 무역팀장인 가쿠타 부장님께 제출해 주시고, 견적은 CIF 기준으로 산출해 주십시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SH무역은 컴퓨터 20만 대에 대한 항공 운송비는 대한전자 측과 사후 정산하십시오.”
“그럴 수밖에 없겠네요.”
“TV 5만 대와 컴퓨터 40만 대는 대한 그룹 아프리카 법인과 계약을 체결했으면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겨울의 말에 이진호 사장은 이게 웬 떡인가 싶었다.
자기는 지금까지 H&J 컨설팅이 대한전자와 계약을 체결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럴 경우, 최고급 TV 5만 대와 컴퓨터 40만 대의 수출 금액인 7억 달러는 법인이 아닌 대한전자의 실적으로 잡힌다.
그런데 시집간 딸이 친정을 생각해 주려는 듯 겨울은 자신들에게 실적을 넘겨줄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재빨리 손을 들고 발언권을 요청했다.
“저는 한 부사장님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한편, 대한전자의 임용식 사장은 수출 금액 7억 달러를 아프리카 법인에 빼앗기는 것이 아까워서 미칠 지경이었으나, 저지른 잘못이 있기에 겨울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한 부사장님 마음대로 하십시오.”
두 사람과는 달리 송훈석 회장은 겨울의 마음 씀씀이를 높게 평가했다.
아프리카 법인과 업무를 수행하면 시차에 따른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에 자신들뿐만 아니라 H&J 컨설팅도 불편함이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울은 자신의 친정인 아프리카 법인에 실적을 몰아주고 있었다.
마음속으로 흐뭇한 생각을 하면서, 결정권을 행사하기 위해서 대화에 끼어들었다.
“한 부사장, 그렇게 하세요.”
“회장님, 감사합니다.”
“어차피 법인도 내 실적이기 때문에 나한테 감사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하하, 그렇게 되는 건가요?”
겨울이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한 부사장, 결제 조건은 어떻게 됩니까?”
“바이어들은 금액이 크기 때문에 선급금 지급은 불가능하다고 하면서, 계약과 동시에 양도 가능한 SBLC(Transferable Stand―By LC, 일반 신용장보다 훨씬 안전성이 뛰어남)을 발행해 주기로 했습니다. 저희가 수취하는 즉시 해당되는 금액만큼 양도해 드리겠습니다.”
“제품이 공급되는 시점에 양도받아도 되니까, 서두르지 마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때, 오래도록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던 정명훈 사장이 발언권을 요청하고 입을 열었다.
“회장님, 모니터와 컴퓨터의 마케팅을 담당하는 두 분의 이사들은 3개월 동안 생산 가능한 양이 30만 대라고 했는데, 회장님께서는 저희에게 40만 대를 공급해 준다고 하셨습니다. 그에 대한 묘안을 가지고 있습니까?”
당연히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해 놓은 묘안을 설명하려면, 시간이 제법 많이 소요될 것이다.
불안감을 해소시키기 위해서 강력한 수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정 사장, 내 이름을 걸고 컴퓨터 40만 대를 납기 내에 공급하도록 하겠습니다.”
대한 그룹 총수가 철석같이 약속해 줬는데, 계속해서 의문을 품는 것은 실례였다.
“알겠습니다. 더 여쭙지 않겠습니다.”
드르륵―
그때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겨울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핸드폰을 들어 발신자를 확인하니 오코사 실장이었다.
아마도 매너콜을 보고 전화를 걸어 온 듯했다.
“회장님, 오코사 실장님입니다. 밖에 나가서 전화를 받고 오겠습니다.”
“우리는 입 다물고 있을 테니까, 이곳에서 받으세요.”
“그러겠습니다.”
겨울은 짧게 대답한 후, 재빨리 통화 버튼을 눌렀다.
“오코사 실장님, 주위에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통화할 때 조심하라는 뜻이겠죠?]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오코사 실장이었다.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아까 왜 전화했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발주해 주신 컴퓨터의 모니터가 공급하기 어려운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24인치, 또는 32인치 모니터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기분도 좋은데, 32인치로 갑시다.]
“기분 좋은 일이 무엇인지 짧게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천유런 외교부장이 백기를 들었습니다.]
“아, 그렇군요.”
[지금은 그렇고, 내용은 나중에 알려 줄게요.]
“네, 알겠습니다.”
딸깍.
겨울이 전화를 끊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송훈석 회장이 질문을 던져 왔다.
“한 부사장, 어떻게 됐습니까?”
“32인치 모니터로 결정됐습니다.”
“잘됐네요. 그나저나 오코사 실장은 어떤 일 때문에 기분이 좋답니까?”
“회의하던 도중에 하늘을 쳐다봤는데, 하얀 뭉게구름이 떠 있었답니다.”
“으하하하.”
겨울의 말뜻을 이해했다는 듯 송훈석 회장이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