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피는 속이지 못 한다
송훈석 회장에게 강한 질책을 받은 임용식 사장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만약에 그가 자신에게 협력 업체들의 관리부실에 대한 책임을 물어서 대한전자 사장직을 박탈한다고 해도, 아무런 할 말이 없었다.
자기는 대한 그룹의 오너 일가가 아닌 전문 경영인이었으니까.
그런 사실도 모르고 마치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것마냥 송훈석 회장의 지시를 뭉개려 했다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등줄기를 따라서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대한전자 사장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용서를 비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회장님, 정말 죄송합니다. 내일 중으로 CW 앵글의 이강진 사장님을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임 사장의 신상에도 유리할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임용식 사장한테 강력한 경고를 날린 송훈석 회장은 시선을 옮기며 원효석 실장에게 말을 건넸다.
“원 실장님, CW 앵글 측에 임 사장이 내일 찾아갈 거라고 전화해 주십시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때, 정상호 사장이 발언권을 요청하고 대화에 끼어들었다.
“송 회장님, 임용식 사장님이 CW 앵글에 방문하는 시간을 확정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유를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CW 앵글과 TV 진열대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을 때 대한전자 로고 삽입 건도 같이 의논 했으면 합니다.”
“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내일 오후 2시에 방문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이강진 사장님께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상호 사장과 대화를 마무리한 송훈석 회장은 정명훈 사장에게 말을 건넸다.
“정 사장, 30분 정도 휴식을 취한 후, 컴퓨터와 관련한 회의를 시작하는 게 어떨까요?”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경영진들과 임원들은 나를 따라오세요.”
송훈석 회장이 매몰차게 말하고 임원 회의실 밖으로 나가자, 눈치를 보고 있던 대한 그룹 직원들이 우르르 그 뒤를 따랐다.
그 결과, 공교롭게도 임원 회의실에는 겨울 일행만 남게 되었다.
겨울은 마침 잘됐다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
“정상호 사장님, 지금 컵라면과 즉석 밥에 대해서 논의를 하는 게 어떨까요?”
“그렇게 하자고.”
“정호영 씨한테 보고받으셨겠지만, 컵라면과 즉석 밥은 각각 300만 개입니다. 이 중에 100만 개는 나이지리아가 발주한 것이고, 알제리를 포함한 네 개 나라가 각각 50만 개씩입니다.”
“한 부사장, 다섯 나라가 컵라면과 즉석 밥을 발주한 이유를 알고 있나?”
“빈민을 구호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컵라면과 즉석 밥은 조금 비싼 편인데, 차라리 라면이나 쌀을 수출하는 게 어떨까?”
겨울도 그와 같은 생각이 들어서 오는 도중에 오코사 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의견을 피력했다.
그는 라면은 나중에 발주할 예정이라고 하면서, 쌀은 국민들이 밥 짓는 법을 몰라서 수입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겨울은 오코사 실장과 통화한 내용을 모두에게 설명해 주었다.
“충분히 일리 있는 얘기군.”
“라면과 즉석 밥의 납기는 계약 체결 후 6개월입니다.”
“납기는 여유가 있네.”
“이번에도 결제 조건은 선급금으로 지급해 드리겠습니다.”
“하하하, 매번 고마워.”
그때,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호영이 발언권을 요청했다.
“한 부사장님, 식품을 수출하기 위해서는 해당 국가의 수입 허가를 득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개인이 아닌 정부에서 수입하는 것이기 때문에 허가를 득할 필요는 없습니다.”
“컵라면과 즉석 밥의 종류가 셀 수 없이 많은데, 최종 바이어한테는 어느 제품을 제안해야 합니까?”
“최종 바이어들이 직접 선택할 수 있도록 할 예정입니다.”
“어떤 방법으로요?”
겨울은 이미 생각해 놓은 방법을 다시 한번 차분히 점검하고, 호영의 질문에 대답했다.
“은센기 사장님이 콩고민주공화국으로 돌아갈 때 컵라면과 즉석 밥을 종류별로 구입해서 보낼 생각입니다.”
“바이어 분들께 시식할 기회를 주겠다는 말씀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참고적으로 알제리는 이슬람 국가이기 때문에 라면 스프에 돼지고기 성분이 포함되어 있으면 안 됩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라면과 즉석 밥의 수출 계약은 저희와 체결하고, 운송 문제는 H&E 트레이딩과 상의하십시오.”
“유통 경로가 기존보다 늘어났네요?”
“모두의 이익을 위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라면, 컵라면, 즉석 밥은 정기적으로 발주한다고 했으니까, 금액이 적더라도 이해 주십시오.”
“한 부사장, 900만 달러가 적다고?”
정상호 사장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겨울은 라면과 즉석 밥에 대한 얘기가 얼추 끝났기 때문에 분위기 이완을 위해서 장난을 살짝 쳤다.
“누구는 금액이 적다고 투덜대던데요?”
“누가? 호영이가?”
“한 부사장, 없는 얘기 지어내지 마세요.”
보다 못한 호영이 뚱한 표정으로 한마디 내뱉었다.
“그럼 은센기 사장이 나한테 얘기한 건 뭔가요?”
호영은 H&J 컨설팅에서 출발하기 직전에 은센기 사장에게 컵라면과 즉석 밥 말고 한국에서 수입할 다른 품목이 없냐며 농담 삼아 물은 적이 있었다.
은센기 사장은 자신의 의도를 오해하고, 겨울에게 그 얘기를 전한 모양이지만.
오해가 쌓이기 전에 해소시켜 주는 것이 맞았다.
“제가 은센기 사장한테 농담한 겁니다.”
“저도 호영 씨한테 농담한 겁니다.”
“에이, 괜히 긴장했네요.”
호영이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겨울은 그런 호영을 보면서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보여 주고 말을 이어 나갔다.
“H&E 트레이딩이 우리나라에서 물품을 수입해서 유통하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H&E 트레이딩이 충분한 능력을 갖출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셔야 할 겁니다.”
“그래야지, 별수 있습니까?”
“그건 그렇고, SH무역은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수입할 만한 것이 없습니까?”
“아차, 제가 깜빡했네요.”
겨울과 대화를 중단한 호영은 이곳으로 오는 도중에 은센기 사장과 나눈 대화 내용을 정상호 사장한테 자세하게 보고했다.
“…커피가 제일 적당하지만, 우리나라에 워낙 많은 브랜드가 난립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호영의 얘기를 끝까지 들은 정상호 사장은 은센기 사장을 돌아보며 물었다.
“은센기 사장님, 콩고민주공화국의 다이아몬드 생산량은 어떻습니까?”
“지난해 기준으로 우리나라는 세계 4위의 생산량을 기록했습니다만, 매장량은 세계 2위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 다이아몬드를 수입 가공해서 판매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을 연결시켜 주면, 다이아몬드를 수출할 수 있습니까?”
“그 문제에 대해서는 제가 콩고민주공화국으로 돌아가서 이것저것 자세히 알아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 *
같은 시각.
집무실에서는 송훈석 회장이 임용식 사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다행히도 그의 목소리는 조금 전과 다르게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임 사장, 사실 CW 앵글에 구매 담당 임원과 최 이사만 가도 충분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 사장을 보내려고 한 이유는 H&J 컨설팅을 의식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무슨 말씀인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H&J 컨설팅이 아프리카 대륙의 나라들로부터 수주 예정인 프로젝트가 최소 몇 백억 달러입니다. 그 프로젝트들을 우리가 가지고 오기 위해서는 H&J 컨설팅에 잘 보일 필요가 있습니다.”
임용식 사장은 송훈석 회장의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한 그룹은 연간 매출액이 3,500억 달러가 넘어갈 정도로 세계 초일류 기업 집단이다.
그런데 송훈석 회장은 몇 백억 달러밖에 안 되는 프로젝트를 수주하기 위해서 신생 회사인 H&J 컨설팅에 간과 쓸개까지 빼 주며 잘 보이려 애쓰는 중이었다.
그깟 몇 백억 달러짜리 프로젝트를 수주하지 않아도 대한 그룹이 재계 1위를 고수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는데도 말이다.
그는 호기심을 가지고 조심스럽게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물론 임 사장의 얘기도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H&J 컨설팅에 공을 들이고 있는 이유는 최대 주주인 한겨울 부사장과 2대 주주인 장대산 부사장 때문입니다.”
“좀 더 상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먼저 한 부사장은 아프리카 대륙의 여러 나라 대통령들과 인맥을 형성하고 있고, 차기 미국 대통령이 유력한 해리슨 상원의원과도 친분이 깊습니다. 그리고 장대산 부사장은 해리슨 상원의원의 양아들이고요. 결정적으로 두 사람의 나이는 이제 서른도 되지 않았습니다. 만약에 두 사람이 이대로 10년 정도만 성장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두 사람이 한국, 아니, 세계 경제의 한 축을 담당할 것 같지 않습니까?”
몸은 현재에 머물러 있지만, 머리는 미래를 바라보고 있는 최고 경영자만이 회사를 끊임없이 성장시키는 법이다.
임용식 사장은 나름대로 뛰어난 경영인이라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송훈석 회장에 비하면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장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임 사장도 두 사람을 대할 때, 그들이 마냥 어린 친구들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할 겁니다.”
“회장님의 말씀을 명심하겠습니다.”
두 사람의 얘기를 듣고 있던 이진호 사장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회장님, 제 딸이 H&J Investment에 취업했는데, 한 부사장과 장 부사장과 관련해서 놀라운 사실을 하나 알아냈다고 합니다.”
“그게 무엇인지 빨리 얘기해 보세요.”
“두 사람이 아직 솔로랍니다.”
“오오, 그렇다는 말이지요?”
‘어라? 회장님이 왜 좋아하지? 설마… 에이, 아니겠지.’
자문자답으로 생각을 마친 이진호 사장은 송훈석 회장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리고 한 부사장의 여동생이 H&J Investment에 근무하고 있답니다.”
H&J Investment에 근무하는 사람들의 스펙이 뛰어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송훈석 회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가 H&J Investment에 근무할 수 있는 조건은 두 가지 중에 하나였다.
겨울이 그녀를 회사에 꽂아 줬거나, 본인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 출중하거나.
겨울의 스펙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전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다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쪽 같은 성격을 보유하고 있는 장대산 부사장이 과연 겨울의 청탁을 받아들였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회장님께서 잘못 알고 계십니다.”
“그럼 한 부사장의 여동생이 실력이 출중하다는 뜻인가요?”
“네. 한 부사장의 여동생은 S대를 졸업한 수재입니다. 그리고…….”
송훈석 회장은 평소에 순간순간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생각해 내는 겨울의 머릿속이 궁금했다.
그래서 IQ 테스트를 권하고 싶은 엉뚱한 욕구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피는 속이지 못한다는 말이 있듯이 겨울도 천재적인 머리의 소유자인 게 분명했다.
축구에 집중하느라 공부를 등한시했기 때문에 이제야 그의 진면목이 드러나고 있는 것일 뿐.
불과 1년이 지나지 않아서 2개 국어 언어를 완벽하게 마스터한 것만 봐도 그가 천재라는 사실은 증명되고도 남았다.
송훈석 회장이 짧은 상념에 빠져 있는 사이에도 이진호 사장의 얘기는 계속됐다.
“…그리고 사담이지만, 미스코리아 뺨칠 정도로 미인이랍니다.”
“한 부사장도 그만큼 준수하게 생겼잖아요.”
“하긴… 그 피가 어디 가겠습니까.”
“이제 임원 회의실로 가볼까요?”
“네, 회장님.”
* * *
임원 회의실.
상석에 앉은 송훈석 회장은 주위를 둘러보고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정명훈 사장, 이제 데스크톱 컴퓨터에 대한 대화를 나눴으면 합니다.”
“한 부사장이 말씀드릴 겁니다.”
호명을 받은 겨울은 목을 가다듬고, 침착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최종 바이어가 발주한 최신 사양의 데스크톱 컴퓨터의 숫자는 모두 60만 대입니다. 그리고 모니터는 27인치입니다.”
“와우!”
임원 회의실에 참석한 사람들이 감탄의 소리를 내질렀다.
겨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음을 짓고,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이제부터는 편의상 컴퓨터라고 지칭하겠습니다. 최종 바이어가 저희 H&J 컨설팅에 컴퓨터를 발주하면서 전제 조건 두 개를 걸었습니다. 이 조건들이 충족되지 않으면, 저희는 절대로 대한전자에서 컴퓨터를 구매할 수 없습니다.”
“어떤 조건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Made in China는 안 됩니다. 그리고 납기는 계약 후, 3개월 안에 목적지까지 도착시켜 줘야 합니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