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좋은 게 좋은 것
겨울은 곤란한 상황은 둘 중에 하나라고 생각했다.
지원자가 아예 없어나, 반대로 너무 많거나.
현재 H&J 컨설팅의 스카우트 조건이 워낙 좋다고 알려졌기 때문에 결코 전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겨울이 짧은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에도 두 사람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곤란한 상황이 나쁜 쪽은 아니겠지?”
“물론입니다.”
“어떤 상황인지는 장 부사장이 오면 들어 보자고.”
“네, 사장님.”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장대산 부사장이 노크와 함께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승훈 팀장은 갈증이 나는지, 비서가 내온 음료수를 단숨에 마시고 입을 열었다.
“사장님, H&J Investment로 이직하고 싶어 하는 파트장 후보자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몇 명이나 되는데?”
“여덟 명입니다.”
“그들의 능력은 어때?”
“모두 출중한 수준입니다.”
이승훈 팀장과 짧은 대화를 끝낸 정명훈 사장은 장대산 부사장의 의중을 먼저 물었다.
“장 부사장은 어떻게 생각해?”
“저도 그분들을 모두 채용했으면 좋겠지만, 지금은 여력이 부족한 상태입니다.”
“그럼 면접을 봐서 세 명을 채용하는 방법밖에 없겠네?”
“그 방법이 최선일 것 같습니다.”
그때, 겨울이 발언권을 요청하고 입을 열었다.
“장 부사장님, 이참에 투자분석 검증팀을 확대하는 건 어떻습니까?”
장대산 부사장은 확신에 찬 겨울의 표정을 보는 순간, 무언가 있다고 판단 내렸다.
그것이 무엇인지 파악해 보기 위해서 살짝 운을 뗐다.
“일감이 많아지면 당연히 확대할 예정입니다만, 추가로 일감을 수주 받았습니까?”
“조만간에 새로운 일감이 생길 것 같습니다.”
“어떤 일감인지 구체적으로 말씀해실 수 있나요?”
“연합군과 중국이 협상 타결이 거의 끝난 상황이었는데, 막판에 돌발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겨울은 방금 전까지 발생한 일들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고, 말을 이어 갔다.
“…저희는 연합군들이 수출하는 자원들을 다른 나라에 연결시켜주는 역할도 수행해야 합니다.”
겨울의 얘기를 끝까지 들은 장대산 부사장은 생각에 잠겼다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결국 H&J 컨설팅과 H&J Investment의 직원들을 늘려야 한다는 말이네요?”
“그래야 할 겁니다.”
“만약에 저희 투자분석 검증팀에 파트를 하나 더 늘린다고 가정할 경우에 나머지 네 명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투자분석 검증팀이 확대될 경우를 대비해서 임시로 부파트장 자리를 신설하는 게 어떨까요?”
“조직이 확대되면, 그분들을 파트장에 임명하라는 말이죠?”
“네, 그렇습니다.”
장대산 부사장은 겨울의 아이디어가 마음에 들었다.
지금 당장 수용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면 월권으로 비춰지기 때문에 말을 아꼈다.
대신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정명훈 사장에게 의견을 먼저 물었다.
“장 부사장, 굳이 파트를 여덟 개까지 늘릴 필요가 있을까?”
“저희가 아시아, 남아메리카 대륙의 나라들과 본격적으로 비즈니스를 시작하면, 더 많은 인원과 조직이 필요할 겁니다.”
“알았어. 한 부사장의 아이디어대로 추진하자고.”
“네, 사장님.”
그 문제가 일단락되자, 이승훈 팀장이 발언권을 요청했다.
“사장님, 지원자들의 면접은 언제 볼까요?”
“이력서와 자기 소개서부터 제출하는 게 먼저 아닐까?”
“아차, 제가 그 생각을 깜빡했네요.”
“이 팀장은 다음 주부터 투자분석 검증팀에 근무하는 것으로 알고 있어.”
“네, 알겠습니다.”
“투자분석 검증팀에 소속되어 있는 직원들은 능력도 뛰어날 뿐만 아니라 개성도 상당히 강한 편이야. 그들 사이에 불협화음이 생기지 않도록 특별히 신경 써야 할 거야.”
“그렇게 하겠습니다.”
순간, 겨울의 머릿속에 어제 오전에 면접을 본 이수진이 스쳐 지나갔다.
“사장님, 이수진 씨는 어떻게 하기로 했나요?”
“오늘부터 출근한다고 연락받았어.”
“네? 전 직장에서 이수진 씨의 사표를 금방 받아 줬답니까?”
“나도 그게 궁금해서 이유를 물어봤는데, 적성에 맞지 않는다면서 이미 휴직계를 제출한 상태라고 하더라고.”
“어제 이수진 씨는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았잖아요.”
“우리 회사에 취업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는데, 굳이 언급할 필요가 있을까?”
“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정명훈 사장 등과 대화를 일단락 짓고 사무실로 복귀한 겨울이 책상에 앉으려는 찰나.
윙윙―
책상 위에 올려놓았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다름 아닌 호영이였다.
“왜?”
[우리 회사에 점심 먹으러 와 줘.]
평소와 다르게 말하는 목소리가 상당히 공손했다.
즉, 자기에게 무언가 원하는 것이 있다는 뜻.
그가 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겨울은 진즉에 파악하고 있었다.
“은센기 사장이 꼬불쳐 놓은 것을 아직도 얘기해 주지 않니?”
[어. 입에 본드를 붙여 놨는지 입도 벙긋 안 하고 있는 중이야.]
겨울도 어젯밤에 은센기 사장한테 VIP들로부터 발주 받은 내역을 알려 달라고 물었으나, 그는 발주 받은 것이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면서 언급하기 꺼렸다.
그런 이유로 겨울 역시 여전히 모르고 있는 상태였다.
“나도 너와 마찬가지로 아무 얘기 듣지 못했어.”
[왜?]
“발주가 최종적으로 확정되지 않았다고 하더라.”
[그렇구나.]
“그나저나 계약식은 무사히 끝났니?”
[어. 이제 정수기 50만 대 수출 건에 대한 선수금만 받으면 돼.]
“은센기 사장하고 가쿠타 부장한테 맛있는 점심 사 주고, 우리 회사로 보내라.”
[두 사람을 내가 데리고 가면 되지?]
“인간아, 속 보인다.”
[5억 달러 수출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어.]
“으휴, 얼굴 두꺼운 놈.”
[내 얼굴 두꺼운 걸 이제 알았냐?]
뚝.
겨울에게 한소리 들을 것을 예상했는지, 호영이 전화를 먼저 끊었다.
“어라? 이놈 보게!”
윙―
그때, 카톡이 하나 수신되었다.
― 가을 : 오빠, 점심 사 줘.
― 겨울 : 너희 팀원들이랑 먹어.
― 가을 : 여자 소개시켜 줄게.
― 겨울 : 뭐가 먹고 싶은데?
― 가을 : ㅋㅋㅋ진작 그럴 것이지.
― 겨울 : 장 부사장도 같이 데리고 가도 되지?
― 가을 : ㅇㅇ
― 겨울 : ㅇㅋ. 그럼 12시, 로비에서 만나자.
가을에게 답장을 보낸 겨울은 곧바로 장대산 부사장의 사무실에 들러서 점심을 같이 먹자고 제안했다.
과중한 업무에 지쳐 있던 탓인지 퀭한 얼굴의 장대산 부사장은 겨울의 제안에 금방 혈색을 되찾았다.
역시 여자가 좋은가 보다.
그들이 로비로 내려가니, 예상과는 다르게 가을 주위로 한 무리의 아가씨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그들을 먼저 발견한 장대산 부사장은 겨울에게 당황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한가을 씨를 포함해서 네 명이 같이 점심 먹는 거 아니었어요?”
겨울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
가을은 자기에게 여자를 소개시켜 준다고 했지, 여자들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가을을 포함한 여섯 명의 아가씨가 자신들을 기다리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저도 뭐가 뭔지 모르겠네요… 일단 부딪혀 봅시다.”
그 사이, 가을이 둘을 발견하고 멋쩍게 웃으며 다가왔다.
“장 부사장님, 안녕하세요.”
“한가을 씨, 어떻게 된 상황인가요?”
가을은 난처한 얼굴로 조금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엘리베이터에서 오빠와 함께 이수진을 처음 만난 날, 두 사람이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서 정식으로 소개시켜 줄 생각으로 가볍게 점심 식사를 추진했다.
그런데 장대산 부사장도 합석한다고 했다.
인원을 맞추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대학 선배인 조지현을 급하게 섭외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같은 파트에 근무하는 직원들이 점심을 같이 먹자며 다가왔다.
선약이 있다고 얘기하려는 순간에 또 다른 직원이 물었고…….
그런 이유로 어쩌다 보니 여섯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점심 식사 장소에서 자세하게 말씀드릴게요.”
“알았어요. 점심으로 뭘 먹을지 결정했어요?”
“우리 회사 근처에 스파게티 전문점이 있어요.”
“거기로 갑시다.”
스파게티 전문점.
널찍한 테이블을 차지한 일행들은 각자 먹고 싶은 음식들을 주문했다.
부산스러운 분위기를 뚫고 겨울이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여러분은 제가 누구인지 알고 계십니까?”
“장 부사장님의 비서실장 아닌가요?”
“아닌 것 같아요. 비서실장님 치고는 나이가 너무 젊잖아요.”
“그럼… 수행비서?”
저마다 추측하느라 바빴지만, 가을은 은근히 기분이 상했다.
두 회사의 최대 주주인 오빠를 한낱 수행비서로 여기고 있다니.
가을이 바로 잡기 위해 한마디 하려는 순간, 이수진의 입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제가 여러분께 힌트를 드릴 테니까 맞혀 보세요.”
“네∼”
그녀들은 이 과정 자체가 즐거운지 얼굴에 함박미소를 머금은 채 대답했다.
하지만 이수진은 무표정 그대로 말했다.
“이분의 존함은 한겨울 씨입니다.”
‘존함(尊銜)’이라는 말이 나오자, 그녀들은 자신이 큰 실수를 저질렀음을 깨달았다.
만약에 겨울이 장대산 부사장의 부하 직원이었다면, ‘존함’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겨울이라는 인물은 최소한 장대산 부사장과 같은 직위이거나, 그 이상일 가능성이 높았다.
성은지는 조심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H&J 컨설팅의 부사장님이신가요?”
“네. 정확하게 맞혔어요.”
“네?!”
다른 네 직원이 화들짝 놀라 입을 쩍 벌렸다.
어차피 뒷수습은 겨울의 몫이었다.
“이수진 씨의 말대로 저는 H&J 컨설팅의 부사장이 맞습니다.”
“아앗… 부사장님… 무례를 저질러서 죄송…합니다…….”
행여 겨울에게 찍혔을까 봐 바들바들 떨며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안쓰러운 겨울이었다.
그가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만류했다.
“자자, 고개를 드세요. 잘 몰랐으니까 그랬을 거라 생각해요. 저도 같은 입장이었다면 그랬을 거 같고요. 그러니까 너무 마음에 두지 마세요.”
“네… 부사장님…….”
애써 분위기를 풀려고 노력했으나, 쉽지 않았다.
그때,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최주원이라는 이름의 직원이 질문을 던졌다.
“한 부사장님은 한가을 씨하고 어떤 관계세요?”
“하나밖에 없는 제 여동생입니다.”
“아, 어쩐지…….”
실망감이 어린 표정으로 최주원이 끝말을 흐렸다.
겨울은 그녀가 어떤 이유로 끝말을 흐렸는지 대충 눈치챘다.
낙하산.
가을의 회사 생활을 위해서라도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다.
“으음, 뭔가 오해가 생길 거 같아서 말씀드리자면, 결코 제가 어떤 압력을 가해서 가을 씨가 여기에 입사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닙니다. 우선 가을 씨는 수능 만점자에 S대 경영학과를 수석으로 입학한 수재입니다. 여타 자격증도 다수 보유하고 있죠. 자랑스러운 여동생인 건 맞지만, 객관적으로도 투자분석 검증팀에 꼭 필요한 인재라 고용했습니다. 결코 사적인 입김이 들어가지 않았음을 장담할 수 있습니다.”
“아…….”
그제야 다른 이들이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또다시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겨울은 농담조로 말했다.
“뭐, 정으로 고용할 만큼 친하지도 않고요.”
“부사장님도 차암.”
이에 가을이 겨울의 팔뚝을 꼬집자, 그가 장난스럽게 받아 주었다.
그래도 기분이 좋은지 가을의 입가에 미소가 걸려 있었다.
뻘쭘한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서 성은지가 대화에 급히 끼어들었다.
“부사장님, 오늘 저희와 점심 식사를 같이 먹는 이유를 알려 주실 수 있나요?”
“음, 별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가을 씨가 사람을 소개시켜 준다고 했거든요.”
“저도 그렇게 알고 나왔고요.”
정상으로 돌아온 분위기에 편승해서 장대산이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앗, 설마… 두 분은 여친이 없으세요?”
“크흠…….”
“음… 네, 뭐… 일에 치여 바쁘게 살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각각 장대산과 겨울의 대답이었다.
설마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여자 친구가 없냐고 물어볼 줄은 몰랐다.
반면, 이수진은 두 사람의 대답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겨울은 잘생기고 서글서글한 인상, 전형적인 호남형의 얼굴과 멋진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지나가다 슬쩍 쳐다보게 되는 외모였다.
그리고 장대산 부사장도 살집이 있는 것을 제외하면 딱히 빠지는 데가 없었다.
게다가 겨울은 회사의 최대 주주였고, 장대산 부사장 또한 자산 2,000억 달러인 H&J Investment를 실질적으로 이끌어 가고 있는 수장이었다.
아쉬울 게 없는 두 사람이 여자 친구가 없다니.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하게 여기던 차, 마침 겨울이 변명하듯 입을 열었다.
“이달 초까지 아프리카에서 근무하고 있어서 연애를 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아, 그렇군요. 장 부사장님은요?”
“저는 전 직장에 근무할 당시에 업무가 너무 많아서… 일과 연애했죠. 하하…….”
두 사람의 답변을 들은 성은지는 시선을 옮겨서 가을에게 질문을 던졌다.
“한가을 씨, 두 분께 누구를 소개시켜 주려고 했어요?”
가을은 차마 이수진과 조지현이라고 얘기할 수 없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그녀들을 위해서 숨기기로 했다.
“크흠, 글쎄요? 누구라고 정한 건 없었어요. 오늘 하시는 거 보고 따로 자리를 마련하려고 했죠.”
“어머, 그랬구나. 오늘 하루 가을 씨에게 잘 보여야겠네. 물론 ‘우리’ 한겨울 부사장님에게도.”
“에이, 언니. 우리 부사장님이라니요. 너무 앞서 나가신다. 호호.”
여기저기서 가을에게 호감을 사기 위해서 친근한 목소리로 말을 건네왔다.
당연히 그중에는 이수진도 포함되어 있었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