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신선한 경험
대한 그룹의 현지 직원으로 입사한 이후, 제법 많은 나라들을 출장 다녀 본 가쿠타 부장이었지만, 아프리카 대륙을 벗어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두렵기도 하고, 반면에 살짝 기대감도 들었다.
비행기 시동이 꺼지자, 오랜 비행에 지친 승객들이 통로를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자기도 빨리 한국 땅을 밟아 보고 싶은 마음에 비좁은 통로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
드디어 출입문이 열리고, 다른 승객들의 뒤를 쫓아서 브리지(연결 통로)에 첫발을 디뎠다.
브리지 천장에 설치되어 있는 냉난방 에어컨이 뜨거운 바람을 쉼 없이 쏟아 내고 있었지만, 춥다는 느낌이 들었다.
뒤따라 비행기에서 내린 은센기 사장이 말을 건네 왔다.
“가쿠타 부장님, 대한민국 땅에 첫발을 디딘 소감이 어때요?”
“춥네요.”
“하하, 춥다고요?”
입국 심사대 앞에 줄은 선 가쿠타 부장은 떨리는 마음으로 여권과 한국 출입국 신고서를 제출했다.
심사관은 여권을 가지고 이런저런 절차를 수행한 후, 되돌려 주며 친절한 목소리로 말을 붙여 왔다.
“가엘 가쿠타 씨, 대한민국에 입국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감사합니다.”
심사관은 엉거주춤 서 있는 가쿠타 부장을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뭐 하세요?”
“네? 뭐 하다니요?”
“입국 심사 끝났습니다.”
“네?! 벌써요?”
가쿠타 부장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뒤에 다른 사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재빨리 여권을 챙긴 가쿠타 부장은 입국 심사를 끝내고 기다리고 있는 은센기 사장에게 다가갔다.
“은센기 사장님, 신기하지 않아요?”
“뭐가요?”
“입국 심사를 받는 데 1분도 걸리지 않았잖아요.”
“부장님, 한국이 IT 강국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계셨어요?”
“아, 맞아. 제가 깜빡했네요.”
“이제 수하물을 찾으러 가 볼까요?”
가쿠타 부장은 또다시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이 비행기에서 내려서 수화물을 찾는 곳까지 이동하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20분 정도.
그런데 컨베이어 벨트는 쉼 없이 승객들이 맡긴 수화물을 토해 내고 있었다.
잘못 찾아왔나 싶어서 벽에 부착되어 있는 전광판을 확인해 봤지만, 제대로 찾아온 것이 맞았다.
그의 얼떨떨한 표정을 본 은센기 사장이 씨익 웃으며 말을 붙여 왔다.
“가쿠타 부장님, 한국에서 생활하다 보면 놀랄 일이 많을 텐데, 그때마다 입을 쩍 벌리고 있을 겁니까?”
“에이, 입은 벌리지 않았어요.”
“사진을 찍어 놨어야 하는데, 아쉽네요.”
“저기 우리 짐이 나오고 있네요.”
코너에 몰린 가쿠타 부장이 얼른 컨베이어 벨트로 다가갔다.
* * *
입국장 주변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면서 호영이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겨울에게 말을 건넸다.
“아프리카 나라들의 공항에도 이렇게 사람들이 많니?”
“인구가 많은 나라들은 이곳보다 서너 배 정도는 많다고 보면 돼.”
“그 정도라고?”
“어. 그래서 그런지 공항에 소매치기들도 엄청나게 많은 편이야.”
“공항 경찰들은 뭐 하는데?”
“소매치기들과 커넥션이 형성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야.”
“그런 척박한 환경에서 1년 가까이 버틴 네가 진심으로 존경스럽다.”
“아프리카 대륙에 우리나라 기업들이 많이 진출해 있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 그런 소리하지 못할 거다.”
“하긴…….”
잠시 대화가 중단된 틈을 타 정상호 사장이 겨울에게 말을 걸었다.
“한 부사장, 은센기 사장이 무엇인가 발주 받아 오는 것 같은데, 혹시 알고 있는 게 있어?”
“네?”
“모르고 있었구나?”
“어떻게 된 영문인지 말씀해 주세요.”
“호영이가 그러더라. 은센기 사장과 우리나라로 출발하기 직전에 통화했는데, 주머니에 무언가 꼬불쳐 놓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고.”
“음… 그렇단 말이죠.”
그때, 입국장 문이 열리면서 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잠시 후, 인파 속에서 커다란 캐리어가 올려져 있는 카트를 밀고 오는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겨울은 두 사람이 자기를 알아볼 수 있도록 크게 손을 흔들면서 그들에게 다가갔다.
“은센기 사장님, 가쿠타 부장님, 우리나라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한 부사장님, 저희를 반겨 주셔서 고마워요.”
“이분은 SH무역의 정상호 사장님…….”
겨울의 소개로 상견례를 끝내고, 다섯 사람은 바로 공항을 빠져나와 SH무역에서 마련한 승합차에 탑승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조수석에 앉은 호영이 일정을 알려 주었다.
“오늘은 호텔에 짐을 풀고, 저희 회사 사장님과 저녁 식사 하는 것으로 일정을 마무리 짓도록 하겠습니다. 내일 오전에는 SH무역에서 정수기 수출 건에 대한 정식 계약을 체결하고…….”
호영의 말이 끝나자마자, 겨울이 입을 열었다.
“은센기 사장님, 오늘 저녁에 먹고 싶은 게 있습니까?”
“삼겹살에 소주요.”
곧바로 대답이 나왔다.
“삼겹살에 소주는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여러 번 먹어 봤잖아요.”
“우리나라에서 먹는 삼겹살보다 한국에서 먹는 삼겹살이 훨씬 맛있을 것 같은데요?”
“알았어요. 오늘 배 터지게 삼겹살을 먹어 봅시다.”
“야식으로 치킨에 맥주도 먹어야 하니까, 1차는 가볍게 먹자고요.”
“하하하, 원하는 대로 해 드릴게요.”
* * *
삼겹살 집.
치이이익.
불판에 올려놓은 삼겹살이 먹음직스럽게 익어 갈 무렵, 호영이 소주잔을 들고 입을 열었다.
“우리가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건배 한 번 하실까요?”
“네, 좋습니다.”
“건배!”
“건배!”
호영이 소주잔을 위로 들어 올리자, 모두 힘찬 목소리로 건배를 외쳤다.
잘 구워진 고기 한 점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호영이 물었다.
“두 분은 삼겹살을 맛있게 먹는 법을 알고 있습니까?”
은센기 사장은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호영을 위해서 모른 척했다.
“모릅니다. 호영 씨가 알려 주세요.”
“먼저 상추, 또는 깻잎에 노릇노릇하게 익은 삼겹살을 올려놓습니다. 그리고 얇게 썰린 마늘과 부추를 올려놓고, 약간의 쌈장을 곁들여서 한입에 먹으면 됩니다.”
은센기 사장과 가쿠타 부장은 호영이 알려 준 대로 상추쌈을 싸서 한 입에 넣었다.
마늘의 알싸한 맛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콩고민주공화국에서 먹은 삼겹살과는 차원이 다른 맛이 났다.
상추쌈을 단숨에 씹어 삼킨 은센기 사장은 들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호영 씨, 정말 맛있는데요?”
“그렇죠?”
“삼겹살을 맛있게 먹는 또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은센기 사장님은 매운맛을 좋아하십니까?”
“네. 좋아하는 편입니다.”
“이번에는 상추쌈에 여기 보이는 고추를 곁들여 먹어 보십시오. 그럼 또 다른 맛을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호영의 말대로 삼겹살과 고추의 매운 맛은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었다.
“우리나라로 돌아갈 때까지 매일 삼겹살만 먹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네요.”
“맛있는 다른 음식도 많이 있으니까 기대해도 좋습니다.”
“하하하, 그런가요?”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 저녁 식사가 끝나자, 정상호 사장은 눈치껏 자리를 비켜 주었다.
겨울을 포함한 네 사람은 삼겹살 집 근처에 있는 생맥주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음식을 주제로 얘기를 이어 가다 보니 어느새 네 사람 사이는 한결 편안해져 있었다.
지금까지 조용히 앉아 있던 가쿠타 부장이 겨울에게 말을 걸었다.
“부사장님, 저는 언제부터 회사에 출근해야 합니까?”
정명훈 사장은 가쿠타 부장이 한국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면서, 다음 주부터 정식 출근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려 주었다.
겨울은 그의 지시 내용을 가감 없이 전달했다.
“이번 주는 은센기 사장님을 도와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업무와 관련한 얘기를 마저 하는 게 어떨까요?”
“네, 말씀하십시오.”
“아프리카 대륙 출신 사람들을 추가로 채용하는 일은 3월까지 마무리 지어야 합니다.”
가쿠타 부장은 겨울이 그런 말을 꺼낼 것으로 예상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이미 수립해 놓은 상태였다.
“현재 채용하고자 하는 인원의 두 배 정도의 인원들을 추려 놓은 상태입니다. 부사장님께서 낙점해 주시면, 그들을 채용하겠습니다.”
“저한테 이력서와 자기 소개서를 보내 주시면, 사장님과 상의해서 결론을 내릴게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잠시 대화가 중단된 틈을 타서 호영이 입을 열었다.
“가쿠타 부장님, 사택에 입주한다고 들었는데, 언제쯤으로 생각하시고 있습니까?”
“오늘은 너무 늦어서 힘들고, 내일 입주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시면 불편한 점이 있으니까, 은센기 사장님이 콩고민주공화국으로 귀국하실 때까지 저희가 예약해 놓은 호텔에 머무르시는 게 어떨까요?”
“그래도 되겠습니까?”
“네, 물론입니다.”
“그럼 염치불구하고 잠시 호텔에 신세를 지도록 하겠습니다.”
대화가 일단락 지어질 무렵, 주문한 치킨과 생맥주가 나왔다.
어느 정도 술자리가 무르익어 가자, 겨울이 은센기 사장한테 은근슬쩍 물었다.
“VIP분들이 발주한 품목들은 언제 저한테 알려 주실 겁니까?”
“엥? 알고 계셨습니까?”
“하하, 사실은 찍었어요.”
“에이, 제가 당했네요.”
“그러니까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씀해 보세요.”
“여기서는 말씀드리기가 조금 그렇고, 나중에 별도로 말씀드릴게요.”
호영은 은센기 사장이 말하기 주저하는 이유가 자기 때문이라고 판단 내렸다.
“은센기 사장님, 제가 밖에 나갔다 올까요?”
“호영 씨 때문이 아니라, 저희끼리 의논해서 결론 내릴 게 있어서 그럽니다.”
겨울은 은센기 사장이 언급한 내용을 단숨에 알아챘다.
이익 분배 문제.
하지만 그 문제는 자기가 아프리카를 떠나올 당시에 깔끔하게 결론짓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센기 사장이 그 얘기를 또다시 언급했다는 얘기는 무언가 피치 못할 사정이 발생했다는 뜻이었다.
겨울이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에도 두 사람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은센기 사장님, 저희 SH무역에 주실 일감이 있겠지요?”
“부사장님의 결정 여부에 달려 있기는 합니다만… 있기는 있습니다.”
“그 일감을 저희에게 믿고 맡겨 주시면, 최선을 다해서 공급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 치킨에 생맥주 파티를 끝내고, 호영이 먼저 집으로 돌아갔다.
겨울은 두 사람과 함께 은센기 사장의 숙소로 이동했다.
숙소에 들어간 세 사람은 짐도 풀지 않고 소파에 앉아서 생맥주집에서 못 다한 대화를 이어 갔다.
“은센기 사장님, 우리가 무엇을 의논해서 결론 내려야 합니까?”
겨울의 질문을 받은 은센기 사장은 지난주에 VIP들과의 면담 자리에서 나눈 대화 내용을 떠올렸다.
그 당시, VIP들은 정수기 수입 건에 따른 이익을 어떻게 배분하느냐고 물어왔고, 자기는 사실 그대로 대답했다.
앞으로는 H&J 컨설팅을 통해서 물품들을 수입해야 하기 때문에 겨울을 포함한 세 사람의 이익 배분은 정수기 수입 건이 마지막이라는 말과 함께.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그 말을 들은 VIP들이 자기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해 버린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겨울을 만나서 의견을 들어 보고 답변해 주겠다는 절충안을 제시해 놓고, 그 문제를 지금까지 미뤄 놓은 상태였다.
은센기 사장은 당시의 일을 사실대로 설명해 주고, 겨울의 선택을 기다렸다.
“…부사장님께서 명쾌하게 결론을 내려 주셔야 합니다.”
겨울도 사람이기 때문에 당연히 돈 욕심이 있었다.
하지만 기존대로 이익을 계속 배분하게 되면 개인적인 이익은 올릴 수 있겠으나, H&J 컨설팅의 위치가 모호해져 버린다.
아무리 돈이 좋다고는 하지만, 회사에 대한 신의를 저버릴 수는 없었다.
좋은 방법이 뭐가 있을까 고민해 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묘안이 없었다.
겨울은 아프리카 대륙의 나라들과 무역을 담당할 가쿠타 부장에게 신박한 묘안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저는 유통 경로가 조금 복잡하고, 이익률이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무역의 중심에는 H&J 컨설팅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서 설명해 줄 수 있습니까?”
“바이어로부터 저희가 발주를 받으면…….”
그가 말하는 방법은 겨울이 한 번에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유통 경로였지만, 하나는 확실하게 깨달았다.
그 방법이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는 점이었다.
어차피 결정은 자기의 몫이었다.
“가쿠타 부장님, 그 방법을 적용해 보고, 문제가 발생하면 수정 보완하는 것으로 합시다.”
“네, 한 부사장님.”
마음을 졸이고 있던 은센기 사장이 가쿠타 부장보다 먼저 대답했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