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쪽팔림은 한순간
어느 회사든지 돈을 취급하는 부서는 요직 중에 요직으로 취급한다.
때문에 재무나 회계 부서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그에 걸맞은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하고, 결정적으로 입도 무거워야 한다.
그들은 요직에서 근무하고 있다는 프리미엄 때문에 특별한 결함이 없는 한 정해진 시기에 승진할 가능성이 높다.
대한 그룹 재무 담당의 기업회계 3팀장을 맡고 있는 이승훈 부장은 올해가 임원 승진 대상자였고, 당연히 승진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단, 대학 선배이자 입사 1년 선배인 추성민 법인장에게 이상한 전화를 받기 전까지는.
“선배님께서 어쩐 일이십니까?”
[이 팀장은 내가 3월 1일자로 아프리카 법인장으로 임명받은 사실은 알고 있었나?]
“에이, 농담하지 마세요.”
[진짜라니까.]
추성민 이사의 진지한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이승훈 팀장은 설마 하는 생각으로 사내 전산망에 접속해서 사실 여부를 확인했다.
아프리카 법인장은 정명훈 상무가 아닌, 추성민 이사로 되어 있었다.
갑자기 정명훈 선배의 근황이 궁금했지만, 분위기상 지금 물어볼 수는 없었다.
여유가 되면 물어보기로 하고, 추성민 법인장과 통화를 이어 나갔다.
“선배님, 늦었지만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옆구리 찔러서 절 받는 것 같아서 그다지 기분은 별로지만, 고마워.]
“에이, 그런 일로 삐치고 그러십니까?”
[이 팀장, 농담인거 알고 있지?]
“그나저나, 정명훈 선배는 어떻게 되셨습니까?”
[사업하신다면서 퇴직하셨어.]
“어떤 사업이요?”
[지난 2월 말에 컨설팅 회사를 창업하셨어.]
컨설팅 회사라니.
이승훈 팀장은 도저히 믿기 어려웠다.
정명훈 선배는 대한 그룹에 입사해서 퇴직할 때까지 마케팅 부서에 몸을 담고 있던 순수 비즈니스맨이었다.
그런 그가 컨설팅 회사를 창업했다고 하는데, 쉽게 믿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선배님, 농담하시는 거 아니죠?”
[이번에는 진담이야.]
“설마… 제가 알고 있는 그 컨설팅 회사가 맞습니까?”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그렇다고 봐야겠지.]
“선배님이 퇴직하지 못하게 말렸어야죠!”
[정 선배가 어디 내 말을 들을 사람인가?]
“그래도 말렸어야죠!”
[아, 됐고. 지난주에 한국으로 귀국하셨으니까, 시간 나면 통화나 한 번 해 봐.]
“알겠어요.”
추성민 법인장과 통화를 끝낸 이승훈 팀장은 곧바로 정명훈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승훈 팀장이 웬일이야?]
“선배님, 퇴직하셨다면서요?”
[누구한테 들었어?]
“방금 전에 추성민 선배하고 통화했어요.”
[그렇지 않아도 이 팀장을 만나 볼 생각이었는데, 시간 좀 내줄 수 있어?]
“언제든지요.”
[내일 오전에 강남역 1번 출구 근처에 있는 DH 빌딩 35층으로 와.]
“선배님, 내일은 평일입니다.”
이승훈 팀장이 곤란하다는 뜻을 완곡히 표현했다.
[내가 오늘 회장님을 만나서 말씀드려 놨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우리 회사로 와.]
이승훈 팀장은 정명훈 사장이 썰렁한 농담은 가끔 하는 편이지만, 거짓말 하는 것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런 그가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늘어놓고 있으니, 몹시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막말로 얘기해서 송훈석 회장이 뭐가 아쉬워서 정명훈 사장을 만나 주겠는가.
더구나 대한 그룹에서 퇴직한 사람을.
“에이, 선배님. 거짓말하지 마세요.”
[내가 지금까지 이 팀장한테 거짓말한 적이 있었어?]
“그것은 아니지만…….”
[이 팀장, 이진호 사장님은 알고 있나?]
“3년 전까지 저희 재무담당에서 부사장으로 재직하셨습니다.”
[이 사장님께서 지금 이 팀장과 통화하고 싶다고 하시니까, 잠깐만 기다려 봐.]
잠시 후, 귀에 익은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서 들려왔다.
[이 팀장, 오랜만이야.]
“사장님, 안녕하십니까?”
[이 팀장, 퇴근할 시간 됐지?]
“네, 그렇습니다.”
[우리는 지금 회사 근처 위치한 명품 한우 갈비집에 있으니까, 그곳으로 빨리 와.]
“네, 사장님.”
* * *
“정 사장, 이 팀장은 왜 만나 보려고 하는 건가요?”
이진호 사장이 육즙이 배어 나오는 소고기 한 점을 젓가락으로 집어 입에 넣으며 물었다.
“지금 H&J Investment 내부에 장 부사장을 보좌할 팀을 구성하고 있는데, 팀장 자리를 맡겨 볼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장님께서는 제 생각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가 이 팀장과 10년 가까이 근무해 봤는데, 그가 가지고 있는 능력이라면 충분하고도 남을 겁니다. 그런데, 과연 이 팀장이 H&J Investment으로 이직하려고 할까요?”
“저는 100% 확률로 이 팀장이 저희 회사로 이직할 거라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장담하는 이유가 있겠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만, 한 가지 이유만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희 회사 직원들한테는 성과급을 0.005%가 아니라 0.1%를 지급할 생각입니다.”
이진호 사장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의 말대로라면, H&J 컨설팅이 수주할 예정인 프로젝트 금액이 1,000억 달러라고 가정할 경우, 이승훈 팀장이 받아가는 성과급은 최소 30만 달러가 훌쩍 넘어간다.
대한 그룹에서 받은 연봉보다 최소 세 배가 넘는 성과급을 준다고 하는데,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정명훈 사장이 장담했던 대로 이승훈 팀장은 H&J Investment으로 이직할 것이 확실했다.
그러다가 살짝 욕심이 하나 생겼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말이나 꺼내 보기로 마음먹었다.
“정 사장, 장 부사장을 보좌할 팀의 구성원은 모두 선발했나요?”
“장 부사장한테 직접 물어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정명훈 사장은 장대산 부사장에게 기회를 넘겨주고, 뒤로 물러났다.
“사장님, 추천해 주실 만한 인재가 있습니까?”
“사실은 내 딸이 어떨까 생각하고 있었어요.”
“따님이 가지고 있는 스펙을 제가 알 수 있을까요?”
“내 딸은 미국의 스탠포드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고, 지금은 국책 연구기관에 근무하고 있는 중입니다.”
스탠포드 대학의 명성을 잘 알고 있는 장대산 부사장은 그녀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언제 시간이 되면, 이력서와 자기 소개서를 가지고 저희 회사에 찾아오라고 하십시오.”
“준비되는 대로 찾아가라고 할게요.”
“네, 알겠습니다.”
잠시 후, 노크 소리와 함께 이승훈 팀장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먼저 상석에 앉아 있는 이진호 사장에게 정중하게 인사하고, 정명훈 사장과 친근하게 인사를 나눴다.
“선배님, 정말 오랜만에 뵙는 것 같습니다.”
“그러게 말이야. 이 친구들은 나하고 같이 사업할 한겨울 부사장과 장대산 부사장이야.”
“반갑습니다. 정명훈 사장님께 소개받은 한겨울…….”
간단하게 상견례를 끝내자, 이진호 사장이 중요한 말을 꺼냈다.
“정 사장님이 회장님께 이 팀장에 대한 얘기를 꺼낸 것은 사실입니다.”
“사장님, 회장님이 정 사장님을 만난 게 사실입니까?”
“정 사장님이 H&J 컨설팅이라는 회사를 창업한 사실은 알고 있나요?”
“네. 아프리카 법인장인 추성민 이사와 조금 전에 통화했습니다.”
“H&J 컨설팅이 우리 대한 그룹의 전략적 파트너입니다.”
“사장님, 저는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한 부사장님이 H&J 컨설팅이 어떤 회사인지 간단하게 설명해 줄 겁니다.”
“흠흠.”
겨울은 가볍게 목을 푼 뒤,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 팀장님과 저희가 인연이 닿지 않더라도 반드시 지켜 주셔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지 얘기해 보세요.”
“이곳에서 저희와 나눈 대화는 외부로 유출해서는 안 됩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마십시오.”
“좋습니다. 팀장님을 믿고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중국은 지난 2013년부터 저개발 국가의 경제개발을 돕는다는 목적으로 일대일로 프로젝트를 전면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습니다.”
겨울은 일대일로 프로젝트에 숨겨진 목적, 그리고 H&J 컨설팅과 H&J Investment 설립 배경과 어떤 비즈니스를 전개할 예정인지 설명해 나갔다.
당연히 아주 민감한 내용은 철저하게 숨겼다.
정명훈 사장과 장대산 부사장은 겨울의 설명이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이승훈 팀장은 꼼꼼한 성격을 보유하고 있는 탓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추가 설명을 요구했다.
그 바람에 겨울의 설명도 제법 많은 시간을 잡아먹었다.
“…오늘 오후에 저희 회사와 대한 그룹 사이에 전략적 파트너십 계약을 체결한 상태입니다.”
겨울의 얘기를 끝까지 들은 이승훈 팀장은 근본적인 궁금증을 꺼내 들었다.
“한 부사장님, 이렇게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얘기를 저한테 해 준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이 팀장님,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은 장 부사장이 해 줄 겁니다.”
겨울이 한발 뒤로 물러나자, 그 자리를 장대산 부사장이 치고 들어왔다.
“H&J 컨설팅의 계열사인 H&J Investment는 미국 정부로부터 투자를 받아서 운영할 예정입니다.”
“투자 받는 금액이 얼마인지 알려 주실 수 있습니까?”
“현재까지 컨펌 받은 금액은 2,000억 달러입니다만, 추가로 투자가 이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네?! 2,000억 달러라고요!”
예상한 대로 이승훈 팀장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중국이 지난 6년 동안 일대일로 프로젝트에 쏟아 부은 돈이 2조 달러에 조금 모자랍니다. 그 정도면 대충 감이 잡히지 않습니까?”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이승훈 팀장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장대산 부사장은 계속해서 믿기 어려운 말을 이어갔다.
“2,000억 달러가 넘는 자산을 운용하기 위해서 미국 정부로부터 최소 200명 이상의 전문가들을 지원받기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실무자들일 뿐이지, 투자를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투자는 사장님과 한 부사장님, 그리고 제가 결정할 예정입니다. 저희가 올바른 투자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실무자들이 보고한 투자 분석을 다시 한번 정밀 검증할 부서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현재 팀을 구성하고 있는 중이고, 사장님께서 이 팀장님을 팀장으로 추천한 상태입니다.”
“그럼, 지금 면접을 보고 있는 중이라는 겁니까?”
“원래는 내일 오전에 정식으로 면접 볼 예정이었습니다.”
“정 사장님께서 제 능력을 높게 사 주신 것은 정말 고마운데, 저는 그렇게 많은 돈을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정명훈 사장은 이승훈 팀장의 결심을 재촉하기 위해서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 팀장을 스카우트 하는 조건을 얘기해 줄 테니까, 참고하라고.”
“네, 말씀해 보십시오.”
“투자 분석 검증팀의 팀장의 연봉은 대한 그룹과 동일하거나 많아. 그리고 성과급 제도를 운영할 예정인데…….”
정명훈 사장의 얘기를 듣고 있던 이승훈 팀장은 인생에서 찾아오는 세 번의 기회 중에 한 번이 바로 지금이라고 판단 내렸다.
무조건 H&J Investment로 이직하는 것이 옳았지만, 방금 전에 내뱉은 말이 마음에 걸렸다.
‘에라, 쪽팔림은 한순간이라고 했으니까…….’
이승훈 팀장이 마음의 결심을 굳히는 순간, 정명훈 사장의 설명도 끝이 났다.
“…이래도 우리 회사에 올 생각이 없어?”
“사장님, 한 번 정도 사양하는 것은 예의라고 알고 있습니다.”
“우리 회사로 이직할 생각이라는 거지?”
“네, 물론입니다.”
“이번 주 안으로 이력서와 자기 소개서를 작성해서 나한테 제출해.”
“네? H&J Investment에 채용이 확정된 것이 아니었습니까?”
“내가 아무리 이 팀장하고 친하다고 하더라도 정해진 정식 절차는 밟아야지.”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면접에서 탈락할 가능성이 있으니까, 그때까지 입 꾹 다물고 있어.”
“그렇게 하겠습니다.”
잠시 대화가 중단된 틈을 타서 장대산 부사장이 발언권을 요청하고 입을 열었다.
“이 팀장님, 투자 분석 검증팀에 중간 관리자들이 세 명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이 팀장님께서 추천해 주실 수 있습니까?”
“있기는 합니다만, 직급은 어떻게 됩니까?”
“팀장님을 보좌해야 하니까, 파트장이 적당할 것 같습니다.”
“그들도 이력서와 자기 소개서를 H&J Investment에 제출하면 됩니까?”
“그렇습니다.”
“그나저나 지원서를 누구한테 제출해야 합니까?”
그제야 H&J 컨설팅에 인사를 담당할 부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겨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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