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최선이 아니면 차선
송훈석 회장과 헤어진 정명훈 사장과 겨울, 그리고 장대산 부사장은 반드시 한 번은 만나 봐야 할 이진호 법인담당 사장을 찾아갔다.
정명훈 사장은 이진호 사장에게 겨울과 장대산 부사장을 소개시켜 주고, 본격적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사장님, 어디 다녀오셨습니까?”
이진호 사장은 오늘 오전에 정명훈 사장에게 전화를 받았다.
그는 송훈석 회장을 만나러 대한 그룹 본사에 들어올 예정이라고 하면서, 방문한 김에 사무실로 찾아가겠다는 내용을 전달했다.
하지만 그 시간에는 용인 연수원에서 최고 경영자 교육과정에 입소한 임원들을 대상으로 특강이 예정되어 있었다.
할 수 없이 오후로 약속을 잡았고, 특강이 끝나자 부랴부랴 사무실로 돌아온 것이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정명훈 사장의 질문에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연수원에 강의 다녀왔어요.”
“아, 그러셨군요.”
“정 사장은 유능한 인재들과 같이 사업을 시작해서 마음이 든든하겠네요?”
“하하, 그렇기는 합니다.”
“회장님은 만나 보셨나요?”
“오전부터 방금 전까지 같이 있었습니다.”
정명훈 사장이 송훈석 회장을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은 오전 11시.
지금이 오후 5시가 넘었으니까, 무려 여섯 시간 가까이 송훈석 회장과 같이 있었다는 얘기였다.
중간에 점심시간이 끼어 있다고는 해도 미팅 시간이 너무 길었다.
이 말은 즉, 송훈석 회장과 대화를 나눌 소재가 많았다는 뜻.
이진호 사장은 자신의 추측이 맞는지 주저하지 않고 물었다.
“대화 소재도 많았고, 파트너십 체결 때문에 오랫동안 같이 있었습니다.”
“우리 회사가 H&J 컨설팅의 전략적 파트너가 된 이상 최선을 다해서 돕도록 할게요.”
“감사합니다, 사장님.”
“정 사장, 회장님과 대화를 나눈 것 중에서 내가 알고 있어야 하는 게 있을까요?”
“회장님께서 아프리카 법인의 FTA 팀에 한국 직원을 최소 30명 이상 늘려 준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진호 사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난주 금요일에 정재엽 인사담당 사장과 나눈 대화의 내용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는 FTA 팀에 근무할 열다섯 명 중에 겨우 여섯 명밖에 선발하지 못했다고 푸념을 늘어놓았다.
그런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송훈석 회장은 FTA 팀에 근무할 직원을 추가로 선발해 주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지금도 FTA 팀에 근무할 직원들을 모집하는 데 차질을 빚고 있는데,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직원들을 추가할지 진심으로 궁금했다.
“정 사장, 회장님께서 묘안을 가지고 있었나요?”
“묘안은 저희가 알려 드렸습니다.”
“어떤 묘안입니까?”
“저희 회사는 성과급 제도를 운영할 예정인데…….”
정명훈 사장의 설명을 듣고 있던 이진호 사장은 그야말로 기막힌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현재 아프리카 법인에 근무하고 있는 직원들의 평균 연봉보다 서너 배 이상 성과급을 준다고 하는데, 가기 싫어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게다가 H&J 컨설팅이 수주 예정인 일감은 계속 늘어날 예정이니까, 성과급도 같이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흐뭇한 표정으로 그의 얘기를 듣고 있던 도중에 갑자기 우려되는 점이 생겨났다.
‘아프리카 법인에 근무하고 있는 다른 직원들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텐데, 이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지?’
해법을 찾기 위해서 이리저리 궁리하는 도중에 정명훈 사장의 설명이 끝이 났다.
“정 사장, 아이디어는 좋은데, 걱정거리가 하나 있어요.”
“말씀해 보십시오.”
“FTA 팀이 아닌 다른 부서에 근무하는 직원들이 불만을 제기하지 않을까요?”
사실 정명훈 사장도 그 점을 우려하고 있었다.
따라서 추성민 법인장과 의논한 끝에 완벽하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원만한 해결책을 수립해 놓은 상태였다.
“사장님, 그 문제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해법이 있다는 말이겠죠?”
“네, 그렇습니다. 먼저 지점에 근무하는 직원들은 저희 회사가 수주하는 일감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FTA 팀원들과 마찬가지로 성과급을 지급할 예정입니다.”
“관리팀과 마케팅 지원팀에 근무하는 직원들은 어떻게 처우할 예정인가요?”
“단기적으로는 FTA 팀과 태스크 포스를 구성해서 성과급을 지급할 예정이고, 중장기적으로는 FTA 팀원들과 업무 로테이션을 시켜줄 예정입니다.”
“그 방법이 최선인 것 같네요.”
“회장님께서는 다른 법인에도 최대한 빨리 태스크 포스를 운영할 생각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의 말에 이진호 사장은 연초에 송훈석 회장에게 지시받은 내용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 아프리카 법인이 운영하고 있는 FTA 팀의 성과를 확인한 후, 다른 법인에도 확대 적용여부를 검토해라.
이진호 사장은 FTA 팀이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적어도 6개월 이상은 걸린다고 판단했다.
해서 다른 법인은 6개월 정도 준비 과정을 거친 뒤 내년에 본격적으로 실행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런데 송훈석 회장은 최대한이라는 단서를 달아서 태스크 포스를 운영할 계획을 서두르고 있단다.
이는 무언가 노림수가 있다는 뜻.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 봐도, 송훈석 회장의 생각을 읽을 수 없었다.
이럴 때는 말을 꺼낸 사람한테 물어보는 게 최고였다.
“정 사장, 회장님께서 서두르고 있는 이유를 알고 있나요?”
“중국 정부가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는 일대일로 프로젝트가 급격히 붕괴될 조짐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일대일로에 참여한 나라들은 급격하게 혼란에 빠져들 가능성이 상당히 높습니다.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중국 정부의 역할을 대신해야 하는데, 저희 H&J 컨설팅과 H&J Investment가 이 역할을 대신해야 합니다.”
“미국 정부의 역할을 두 회사가 한다는 말이지요?”
“네, 그렇습니다. 회장님께서는 모든 법인에 태스크 포스를 운영하는 것은 당장 무리라고 하시면서, 일대일로 프로젝트에 참여한 나라들이 많은 법인들부터 태스크 포스를 운영할 생각이셨습니다.”
이진호 사장은 묘하게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H&J 컨설팅이 수주할 일감이 많아지면, 해외 법인들을 관리하고 있는 자신의 실적은 자연스럽게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오너가 아닌 직장인이 최고 높게 승진할 수 있는 부회장의 자리가 가시권 안에 들어오게 된다.
이를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H&J 컨설팅이 일감을 수월하게 수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급선무였다.
짧게 생각을 끝낸 그는 정명훈 사장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무슨 말인지 알았어요. 최대한 빨리 태스크 포스를 운영할 수 있도록 준비를 갖춰 놓도록 할게요.”
“고맙습니다, 사장님.”
지이잉―
그때, 소탁 위에 올려놓은 겨울의 핸드폰이 부르르 진동했다.
핸드폰을 들어 발신자를 확인하니, 오코사 실장이었다.
천유런 외교부장과 협상을 벌일 시간에 전화를 걸어왔다는 의미는 무언가 돌발 상황이 발생했다는 뜻이다.
재빨리 이진호 사장한테 양해를 구하고 그와 통화를 시작했다.
“네, 오코사 실장님.”
[한 부사장님, 지금 천 외교부장과 협상을 진행하고 있는데, 난감한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내용과는 달리,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어둡지 않았다.
즉, 난감하기는 하지만 그다지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잔뜩 긴장하고 있던 겨울은 마음의 여유를 되찾고, 오코사 실장과 통화를 이어 나갔다.
“실장님, 어떤 상황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중국이 우리의 요구를 조건 없이 수용할 테니까, 합의서를 당장 작성하자고 합니다.]
겨울은 오코사 실장이 처해 있는 상황을 충분히 이해했다.
미국 정부는 중국에 2차로 전쟁을 선포할 나라들이 준비가 덜 되어 있다는 이유로 3월 15일 이후에 협상이 타결되기를 원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날까지는 무려 5일이나 남아 있다는 점이었다.
남아 있는 쟁점은 없는 상태인데, 오뉴월 햇살에 엿가락 늘리듯 협상 기간을 늘리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오코사 실장은 협상 타결 시점을 늦출 방법을 찾지 못해서 전화한 것이고.
겨울은 해법을 찾기 위해서 두뇌를 혹사시켜 봤지만,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최선이 아닌 차선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실장님, 연합군 수장들을 불러야 하다면서 이삼 일 정도 시간을 끌 수는 있을까요?”
[그 정도는 충분할 겁니다.]
“나머지 2일은 미국 정부가 책임지라고 요구해 보겠습니다.”
[미국 정부와 합의되면 연락 주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딸깍.
전화를 끊은 겨울은 통화 내용을 장대산 부사장한테 설명해 주었다.
“…오코사 실장님이 제 전화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겨울의 부탁을 들은 장대산 부사장은 핸드폰을 들어서 미국 시간을 확인해 보았다.
새벽 3시 55분.
전화 걸기에 정말 애매한 시간이었지만, 촌음을 다투는 순간이기에 어쩔 수 없었다.
주저했던 마음을 빠르게 거둬들이고 해리슨 상원의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산이냐?]
잔뜩 잠에 취한 목소리.
“아버지, 주무시는 중에 깨워서 죄송합니다.”
[급한 일이라도 생겼니?]
“사실은 방금 전에 한겨울 부사장이 나이지리아의 오코사 실장에게 전화를…….”
장대산 부사장은 겨울에게 들은 얘기를 가감 없이 전달했다.
[한 부사장한테 나머지 이틀은 우리가 책임지겠다고 얘기해 줘.]
해리슨 상원의원의 컨펌을 받은 장대산 부사장은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아서 겨울에게 신호를 보냈다.
겨울은 만족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아래위로 끄덕였다.
장대산 부사장은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으며, 해리슨 상원의원과 통화를 이어 나갔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그리고 1차로 투자받는 금액이 늘어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뭐야? 2,000억 달러가 부족하다고?]
예상대로 해리슨 상원의원이 의문을 품었다.
“연합군들이 일대일로 프로젝트가 아닌 중국의 투자를 받아서 진행하고 있거나, 진행 예정인 일반 프로젝트들도 저희가 수주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금액이 얼마 정도 될 것 같니?]
“아직 정확하게 모릅니다만, 적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의 통화를 듣고 있던 이진호 사장은 기쁨과 걱정이 교차했다.
일감이 많아지면, 부회장으로 승진하는 데 플러스 요소가 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반대로 업무를 수행할 직원들도 많이 필요하다는 뜻도 된다.
문제는 아프리카 법인에 근무할 직원들을 선발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에 있었다.
그가 좋은 방법을 찾기 위해 고심하고 있는 사이에도 두 사람의 통화는 계속됐다.
[…너를 보좌할 팀은 구성 다 했고?]
“지금 구성하고 있습니다.”
[내가 팀장을 보내 줄까?]
“사장님께서 적당한 인재를 추천해 준다고 하셨습니다. 일단 그분을 만나 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해.]
장대산 부사장은 해리슨 상원의원과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은 후, 통화를 종료했다.
겨울은 즉시 오코사 실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결정된 사실을 알려 주었다.
[한 부사장님, 지금은 미국이 새벽 시간 아닙니까?]
“장 부사장님이 주무시는 해리슨 상원님을 강제로 깨웠습니다.”
[아, 그렇군요.]
“장 부사장님이 해리슨 상원의원님께 H&J Investment의 투자 금액을 증액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하하하, 무슨 말인지 알았어요.]
“실장님, 협상을 잘 마무리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할게요.]
겨울이 통화를 끝내자, 이진호 사장이 정명훈 사장에게 질문을 던졌다.
“정 사장, H&J 컨설팅이 일반 프로젝트도 수주할 수 있겠죠?”
“돌발 변수만 없다면, 수주할 수 있을 겁니다.”
“미안한 얘기지만, 프로젝트 수주 시기를 조절할 수 있을까요?”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아프리카 법인에 근무할 직원들이 많이 필요할 것 같은데, 선발 시간이 너무 부족해서 그럽니다.”
“정재엽 사장님께 인원을 추가로 선발해 달라고 요청하면 될 것 같습니다.”
“하하하, 그 방법이 있는지 몰랐네요.”
이진호 사장이 만족한다는 듯 선홍색 잇몸을 보이며 환하게 웃었다.
“사장님, 지난 2월에 저한테 해 주신 약속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내가 맛있는 밥 한 끼 사 준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오늘 저녁 시간 이후의 일정을 비워 놓았습니다.”
“알았어요. 내가 오늘 거하게 한턱낼게요.”
“참고적으로 한 부사장은 소고기를 좋아한답니다.”
“정 사장이 먹고 싶은 건 아니고요?”
“그런 점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하하하!”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