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산 넘어 산
[다른 나라들의 동향이 심상치 않은 상태…….]
영어로 통역되어 있는 음성 파일을 끝까지 들은 겨울은 천유런 외교부장이 오코사 실장과의 협상 초기부터 강력한 카드를 꺼내들은 이유를 이제야 확실히 깨달았다.
중국은 일대일로 프로젝트에 참여한 나라들의 디폴트 선언을 걱정하고 있었다.
때문에 중국은 연합군들이 모든 부채를 탕감해 달라는 요구도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수용한 것이고.
겨울이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에도 음성 파일 재생은 계속 이어졌다.
[…반드시 비밀 유지 각서를 받아 놓아야 할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음성 파일 재생이 끝나자, 장대산 부사장이 녹음기의 작동을 정지시켰다.
그와 동시에 정명훈 사장이 입을 열었다.
“한 부사장, 음성 파일을 오코사 실장한테 어떤 방법으로 전해 줄 생각인가?”
“중국 정보기관의 해킹 가능성을 고려해서 하도진 이사에게 보내 주는 방법이 적당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는 게 낫겠군.”
겨울과 짧은 대화를 끝낸 정명훈 사장은 장대산 부사장에게 말을 건넸다.
“장 부사장, 미국 출장 건은 어떻게 됐나?”
정명훈 사장의 질문을 받은 장대산 부사장은 지난주의 일들을 기억에 떠올렸다.
그가 H&J 컨설팅과 H&J Investment의 법인 설립과 사무실 셋업을 위해서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던 도중에 정명훈 사장한테 이메일을 받았다.
첨부 파일을 열어서 확인하는 순간, 진심으로 깜짝 놀랐다.
첨부 파일 안에는 나이지리아를 포함한 연합군들이 일대일로 프로젝트와 관련해서 현재 진행하고 있거나, 진행할 예정인 프로젝트들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리스트를 꼼꼼히 점검하던 도중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다섯 개 나라의 프로젝트 금액이 H&J Investment가 미국 정부로부터 투자받기로 한 1,000억 달러를 훌쩍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투자 금액을 증액하지 않으면, 죽도 밥도 안 되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었다.
해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동호 실장에게 H&J 컨설팅과 H&J Investment의 셋업을 부탁하고, 급하게 미국으로 출장을 떠난 것이다.
서둘러 회상을 마무리한 장대산 부사장은 정명훈 법인장의 질문에 대답했다.
“1차로 투자받는 금액을 2,000억 달러로 증액하기로 했습니다.”
“투자 업무를 담당할 직원들이 200명으로 충분할까?”
“일단 200명으로 운영해 보고, 부족하다 싶으면 지원받기로 했습니다.”
“내가 판단하기로는 100% 부족하니까, 미리미리 대책을 세워 놓은 편이 좋을 것 같아.”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나저나 장 부사장을 별도로 보좌할 팀을 구성했나?”
“지금 구성하고 있는 중입니다.”
“팀장은 미국 사람을 임명할 생각인가?”
장대산 부사장은 정명훈 사장의 의도가 무엇인지 단숨에 알아챘다.
즉, 자기를 보좌할 팀장은 이미 생각해 놓은 사람이 있기 때문에 알아보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의 성격상 허접한 사람을 추천해 주지는 않을 것이다.
“아직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만, 추천해 주실 만한 사람이 있습니까?”
“대한 그룹에 근무하고 있는 내 후배가 있어. 장 부사장이 원한다면 미팅 자리를 주선해 줄 수도 있네.”
“가급적이면 빨리 만나 봤으면 좋겠습니다.”
“알았어. 오늘이나 내일 중으로 만날 수 있도록 해 줄게.”
“네, 알겠습니다.”
그때, 정명훈 사장의 눈에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겨울의 모습이 들어왔다.
“한 부사장, 무슨 생각하고 있나?”
“H&J Investment가 미국으로부터 투자받는 2,000억 달러가 부족할 수 있다는 생각을 잠깐 해 봤습니다.”
“2,000억 달러도 부족하다고?”
“저희가 연합군들로부터 건네받은 리스트들은 일대일로 프로젝트와 관련된 것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연합군들은 모든 부채를 탕감받을 예정입니다. 그렇게 되면, 현재 진행하고 있거나 진행 예정인 일반 프로젝트들도 우리들이 수주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아이고, 산 넘어 산이구먼.”
정명훈 사장이 기분 좋은 탄식을 내뱉었다.
장대산 부사장은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를 머금고 입을 열었다.
“한 부사장님, 1차로 투자받는 금액은 얼마로 증액할까요?”
“연합군들이 보내올 리스트를 확인하고 결정하는 것으로 합시다.”
“알겠어요. 아버지께 말씀드려 놓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시고, 통역되어 있는 음성 파일 말고, 원본 파일을 가지고 있습니까?”
“당연히 가지고 있습니다만, 왜 그러시는데요?”
“통역되어 있는 음성 파일에는 통역자의 주관이 섞여 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짧게 대답한 장대산 부사장이 원본 음성 파일을 가지러 밖으로 나간 사이, 정명훈 법인장이 겨울에게 말을 건넸다.
“오늘 점심 무렵에 송훈석 회장님을 만나기로 했으니까, 참고하고 있으라고,”
“장 부사장도 같이 가는 겁니까?”
“아무래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
장대산 부사장에게 원본 음성 파일이 저장되어 있는 USB를 건네받은 겨울은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와 하도진 이사한테 이메일로 전송해 주었다.
이메일을 보냈다고 전화해 줄까 하다가, 나이지리아가 새벽 시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차차, 큰 실수를 할 뻔했네.”
드르륵―
겨울이 핸드폰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을 때, 핸드폰이 진동했다.
액정에 표시된 번호를 확인한 겨울은 즉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하 이사님.”
[부사장님, 방금 전에 저한테 보내 준 파일은 뭡니까?]
목소리가 쌩쌩한 것을 보니 아직도 잠자리에 들지 않은 듯싶었다.
“이사님, 아직까지 주무시지 않고, 뭐하고 계셨습니까?”
[오코사 실장님을 비롯해서 연합군들한테 건네받은 자료를 정리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어떤 자료인데요?”
[부사장님, 제가 드린 질문부터 답변해 주시는 것이 먼저인 듯싶습니다.]
“아차, 제가 깜빡했네요. 천유런 외교부장이 본국과 통화한 것을 미국 정보기관이 감청한 음성 파일입니다.”
[어떤 내용이 들어 있는지 제가 알 수 있습니까?]
“오코사 실장이 천 외교부장한테 제안한 내용을…….”
겨울은 음성 파일에 포함되어 있는 내용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결국 중국이 백기를 들었군요.]
“네, 그렇습니다. 이제 제가 드린 질문에 대답해 주실 차례입니다.”
[일대일로 프로젝트와 관련해서 연합군들이 중국으로부터 회수할 예정인 운영권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건수가 많습니까?”
[이미 완료된 프로젝트에 대한 운영권은 나라마다 두세 건 정도입니다만, 진행 중인 프로젝트에 대한 운영권은 상당히 많은 편입니다.]
중국 정부가 일대일로 프로젝트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이 불과 6년밖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완료된 프로젝트가 적은 것이리라.
“이사님, 협상이 시작되기 전에 오코사 실장님께 음성 파일을 건네주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연합군들이 중국의 투자를 받아서 진행하고 있거나, 진행 예정인 일반 프로젝트 리스트를 건네 달라고 요청하십시오.”
[부사장님, 일이 상당히 많아진다는 느낌이 드는 이유가 뭘까요?]
“사장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협상이 타결되는 모습을 지켜보고 귀국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 * *
다음 날, 아침.
대한 그룹 회장실에서는 송훈석 회장이 서동호 실장과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서 실장, 대한건설의 조직을 확대해야 하는 것 아니야?”
서동호 실장은 송훈석 회장의 의중이 무엇인지 단숨에 파악했다.
그의 말에는 H&J 컨설팅이 수주한 일감들을 모두 독차지하자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기는 송훈석 회장의 생각과 달랐다.
“회장님, H&J 컨설팅이 수주한 일감들을 저희가 모두 먹으면, 배 터져 죽을 수 있습니다.”
“서 실장은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는 하는 속담을 들어 보지 못했어?”
“쓰나미가 몰려오는데, 어떻게 노를 젓습니까? 재빨리 산으로 도망치는 게 상책입니다.”
“하여간… 서 실장은 통이 너무 작아서 탈이야.”
“하하하, 그게 제 매력 아니겠습니까?”
“에이, 말이나 못하면. 그나저나 H&J 컨설팅과 H&J Investment가 언제부터 본격적으로 가동될 것 같은가?”
“아무리 빨라도 이번 달은 넘어야 할 겁니다.”
“H&J 컨설팅으로 보낼 직원들은 모두 선발했나?”
서동호 실장은 지난주 금요일에 정재엽 인사담당 사장의 방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는 작정하고 왔다는 듯 자기에게 엄청나게 많은 푸념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그 문제는 자기가 해결해 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기회가 되면 송훈석 회장에게 이 문제를 언급해 보겠다며 그를 다독이고 되돌려 보냈다.
그 말을 언제 꺼낼까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불감청고소원으로 송훈석 회장이 먼저 언급해 왔다.
마침 잘됐다고 생각하고, 그 말을 꺼냈다.
“회장님, 정 사장을 직접 불러서 들어 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왜?”
“인원 선발에 적잖은 애로 사항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알았어. 빨리 불러 봐.”
한달음에 달려온 정재엽 사장은 비어 있는 소파에 앉자마자, 작정한 듯 푸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회장님, 정명훈 사장을 만나면, H&J 컨설팅의 성과급 제도를 대폭 축소해 달라고 하십시오.”
“도대체 성과급 제도가 어떻길래 그러십니까?”
“H&J 컨설팅이 수주하는 프로젝트마다 팀별로 커미션을 0.1%씩 지급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국책 프로젝트의 경우에는 10억 달러가 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에 총 금액의 0.1%에 해당하는 100만 달러 이상의 커미션은 어렵지 않게 받을 수 있다.
프로젝트마다 20명 정도가 참여한다고 가정하면 일인당 5만 달러 이상의 커미션이 책정된다는 뜻.
게다가 건마다 지급한다고 했으니까 일인당 연간 1∼20만 달러가 돌아가는 일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더구나 프로젝트는 겨울이 이미 수주해 놓은 것과 다름없기 때문에 직원들은 뒷수습만 깔끔하게 해 주면 된다.
이런 이유로 송훈석 회장도 커미션이 과하다고 생각했지만, 자기가 H&J 컨설팅의 성과급 제도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자격은 없었다.
“조금 있다가 정명훈 사장이 우리 회사에 오기로 했으니까, 정 사장님이 직접 클레임을 제기하도록 하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나저나 인원 선발은 모두 끝났습니까?”
“신청자가 너무 많이 몰렸기 때문에 일주일 정도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알았어요. 최대한 우수한 인재를 선발해서 보내도록 하세요.”
“네, 회장님.”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비서가 문을 열고 들어와서, 정명훈 사장 일행이 도착했음을 보고했다.
“얼른 안으로 모시고, 정재엽 사장 것까지 커피를 넉 잔 내오세요.”
“알겠습니다, 회장님.”
정명훈 사장 일행은 송훈석 회장에게 가볍게 목례하고, 비어 있는 자리에 앉았다.
“정 사장, 한 부사장, 장 부사장, 정말 오랜만입니다.”
“저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부터 정식으로 H&J 컨설팅에 출근하신 겁니까?”
“네, 그렇습니다. 저희 회사를 위해서 많은 도움을 주셨다는 얘기를 장 부사장한테 들었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하하,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그때, 비서가 커피를 내왔다.
송훈석 회장은 남아 있는 커피를 모두 마시고, 대화를 이어 나갔다.
“정 사장님, 정재엽 사장님을 알고 계십니까?”
“제가 신입 사원 시절에 모시던 직장 상사였습니다.”
“그럼 잘됐네요. 정 사장님이 H&J 컨설팅이 운영할 성과급 제도에 대해서 불만이 상당히 많다고 합니다. 두 분이 진솔하게 대화를 나눠 보세요.”
송훈석 회장이 대화의 장을 마련해 주고, 뒤로 물러났다.
“정명훈 사장님, 먼저 H&J 컨설팅과 H&J Investment를 이끌어 가는 수장으로 취임한 것에 대해서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고맙습니다, 정 사장님.”
“지금 H&J 컨설팅으로 보낼 인재들을 선발하고 있는 도중인데, 지원자들이 너무 많이 몰리는 바람에 대략 난감한 상태입니다.”
“저희 회사에서 운영할 성과급 제도 때문에 지원자들이 폭증했다는 말씀입니까?”
“물론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그 이유가 가장 큽니다.”
“사장님, 그들 모두 저희 회사가 채용하면 문제가 쉽게 풀리지 않을까요?”
“네?!”
예상치 못한 정명훈 사장의 발언에 정재엽 사장이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