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그가 열 받은 이유
나이지리아의 수도인 아부자(Abuja) 국제공항에 무사히 도착한 겨울은 신기한 경험을 했다.
아프리카 국가들을 입국할 때 쉽게 입국 심사를 받는 노하우는 여권 사이에 5달러나 10달러를 끼워 넣는 것이다.
그러면 입국 심사관은 귀찮게 이것저것 물어보지 않고, 신속하게 여권에 스탬프를 찍어 줬다.
오늘도 늘 그랬던 것처럼 여권 사이에 10달러를 끼워서 입국 심사관에게 건네줬더니만, 웬일인지 돈을 되돌려 주었다.
그러면서 환한 미소를 지으며 겨울에게 말을 건네 왔다.
“한겨울 씨, 나이지리아에 입국하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아, 네…….”
“제 이름은 비올라 오바다입니다.”
‘이름을 왜 알려 주는 거지?’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뒤에 입국 심사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유를 물어볼 시간이 없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오바다 씨.”
“즐거운 여행되시고, 제 이름을 꼭 기억해 주세요.”
“아, 알겠습니다.”
여권을 되돌려 받은 겨울은 수하물을 찾는 곳으로 이동해서 하도진 부지점장에게 이 얘기를 꺼냈다.
“부지점장님, 오코사 실장님이 뒤에서 손을 써 주신 거겠죠?”
“당연한 것을 왜 묻는데? 그렇지 않았으면 아직도 입국심사를 받고 있을 거다.”
“입국 심사관이 저한테 본인의 이름을 얘기해 주면서, 이름을 기억해 달라는 이유가 뭘까요?”
“여자야?”
“네.”
“한 대리가 마음에 들었나 보지.”
“나이가 40은 넘어 보이는 아줌마던데요?”
“아줌마는 여자 아닌가?”
“에휴, 제가 말을 말아야죠.”
겨울은 하도진 부지점장의 농담에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한 대리와 반말로 대화를 나누는 건 오늘과 내일이 마지막이겠지?”
“사석에서는 얼마든지 반말을 사용하셔도 됩니다.”
“그렇게 하면 의외의 순간에 반말이 튀어나올 수가 있으니까, 계속 존댓말을 사용하는 게 맞아.”
“그런가요… 그나저나 공항 청사가 상당히 깨끗한 거 같네요.”
뻘쭘해진 겨울이 재빨리 화제 전환을 시도했다.
“작년 10월에 오픈했으니까 그렇겠지. 이 공항 청사도 일대일로의 산물이야.”
“네? 진짜요?”
“공사비 6억 달러 중에서 5억 달러를 중국에서 부담했다고 하더라고.”
“나이지리아 정부가 중국에 반대급부로 무엇을 제공했을까요?”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공항 운영권을 넘겨주지 않았나 싶어.”
겨울은 머릿속에 갑자기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오코사 실장과 상의해 보기로 결정하고, 하도진 부지점장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입국장에 문준석 지점장님이 마중 나와 계실까요?”
하도진 부지점장은 겨울의 질문 의도를 잘 알고 있었다.
나이지리아의 정치 행정 중심 도시는 아부자이지만, 경제 중심 도시는 인구 2,000만 명을 보유하고 있는 라고스(Lagos)였다.
때문에 대부분의 회사들은 법인 또는 지점을 아부자가 아닌 라고스에 상주시키고 있고, 대한 그룹 또한 라고스에 지점을 두고 있다.
따라서 문준석 지점장이 자신들을 마중 나오기 위해서는 이곳까지 비행기를 타고 와야 한다는 뜻인데, 비행시간이 한 시간 20분 정도 걸릴 정도로 거리가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었다.
“글쎄다. 법인장님이 오셨는데, 마중 나와 계시지 않을까?”
그때, 저 멀리서 양복을 입은 동양인들이 겨울이 서 있는 방향으로 다가왔다.
한낮 기온이 30도가 훌쩍 넘어가는 아프리카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이질적인 장면이었다.
그래서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데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이 자신들 옆에 섰다.
그제야 그들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중국인.
그런데 이상했다.
나이가 제일 많아 보이는 듯한 사람은 화가 잔뜩 났는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조아리며 말없이 바닥을 응시하고 있었다.
잠시 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사람이 일행들에게 중국어를 사용해서 화를 쏟아 내기 시작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에게 쏠렸음은 물론이었다.
그들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겨울은 목에 핏대를 세워 가며 화풀이하고 있는 사람을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디서 봤을까 기억을 더듬는 사이, 하도진 부지점장이 말을 걸어 왔다.
“한 대리, 저 성질내는 사람이 중국의 천유런 외교부장인 거 같아.”
외교관들은 일반인들과 달리 별도의 공간에서 출입국 심사를 받고, 별도의 통로를 이용해서 공항을 출입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관례에 비춰 보면 천유런 외교부장이 수하물을 찾기 위해서 이곳에 모습을 드러낼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겨울은 이 점을 열거하며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하지만 하도진 부지점장의 생각은 달랐다.
“한 대리, 천 외교부장이 비밀리에 나이지리아를 방문했다면, 얘기가 되지 않을까?”
“아무리 비밀리에 방문했다고 하더라도, 오코사 실장이 의전 서비스를 제공해 주지 않았을까요?”
“오코사 실장이 협상에서 우위를 점할 목적을 가지고, 일부러 의전 서비스를 제공해 주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잖아.”
그때, 언제 두 사람 곁으로 다가왔는지, 추성민 이사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한 대리, 오코사 실장님께 전화해서 물어보면 되잖아.”
“아, 그러면 되겠네요.”
겨울은 한적한 공간으로 이동해 오코사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고는 방금 전에 목격한 것을 언급했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 확인해 보려고 연락드렸습니다.”
[천 외교부장이 우리나라에 의전 서비스를 요청하지 않는데, 우리가 먼저 제의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겨울은 천유런 외교부장이 열 받은 이유가 무엇인지 대충 감이 잡혔다.
그는 자기가 어떻게 행동하든 당연히 나이지리아 정부에서 의전 서비스를 제공할 것으로 예상했을 것이다.
그런데 예상외로 공항에 아무도 마중 나와 있지 않았고, 오코사 실장이 외교관 전용 통로도 사용하지 못하게 막아 버린 것이다.
그래서 애꿎은 수행원들에게 화풀이하고 있는 중이고.
자신의 추측이 맞는지 오코사 실장에게 물었다.
[물론 그 이유도 있지만, 다른 이유도 있을 겁니다.]
“다른 이유라니요?”
[저도 아직 공항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보고받지 못해서 얘기해 줄 수 없습니다.]
얘기해 주기 싫어하는데, 꼬치꼬치 묻는 것은 실례였다.
“네, 알겠습니다.”
[바라히 대통령님께서 빨리 뵙고 싶어 하십니다. 시간이 괜찮으면, 오늘 저녁에 식사를 같이 하는 건 어떨까요?]
“저희보다 천 외교부장을 먼저 만나야 하는 거 아닙니까?”
[우리가 먼저 만나자고 할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하하, 알겠습니다.”
[저녁 6시까지 대통령 관저로 오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오코사 실장과 통화를 끝낸 겨울이 일행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오자, 추성민 이사가 재빨리 질문을 던졌다.
“오코사 실장님이 뭐라고 하셨어?”
“하도진 부지점장의 말이 맞다고 합니다.”
겨울은 오코사 실장과 통화한 내용을 간단하게 옮겼다.
“…해서 6시에 바하리 대통령님과 저녁 식사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초대를 받았으면, 당연히 가 봐야지.”
“그나저나 아직도 우리 수하물을 찾지 못했습니까?”
“한 대리는 이 나라를 우리나라로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니야?”
즉, 아직 멀었다는 얘기였다.
“아차, 제가 깜빡했습니다. 그건 그렇고, 하 부지점장은 어디 갔습니까?”
“화장실에 다녀온다고 하더라고.”
“천 외교부장은 수하물을 찾아서 입국장으로 나갔습니까?”
“아니. 사람들이 쳐다보는 게 창피한 모양인지, 수행원들과 어디로 가더라.”
잠시 후, 멈춰 있던 컨베이어 벨트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비행기 승객들이 맡겨 놓은 수하물들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컨베이어 벨트에 우르르 몰려들었다.
소매치기 당하기 쉬운 때가 바로 이 순간이라고 알고 있는 겨울 일행은 인파에서 벗어나서 멀찍이 뒤로 물러났다.
약 10여 분이 지나자, 컨베이어 벨트 주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수하물을 찾아서 하나둘씩 떠나갔다.
겨울 일행은 그제야 컨베이어 벨트로 다가가서 수하물을 찾아 들었다.
화장실에 다녀온다던 하도진 부지점장도 어느새 일행들과 합류해 있었다.
마지막 관문인 세관 검사까지 모두 마치고, 입국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문준석 지점장과 무사히 합류했다.
입국장이 워낙 복잡했기 때문에 그들은 곧바로 공항을 빠져나갔다.
문준석 지점장이 준비한 승합차에 오르자마자, 정명훈 법인장이 입을 열었다.
“문 지점장은 언제 도착했나?”
“법인장님이 도착하시기 한 시간 전에 도착했습니다.”
“우리가 이곳에 온 이유를 알고 있나?”
“아니요. 모릅니다.”
“우리는 지금 바하리 대통령님의 초대를 받아서 이곳에 왔어.”
“네?!”
예상한 대로 문준석 지점장이 깜짝 놀라는 듯한 반응을 보여 주었다.
“믿기지 않겠지만, 사실이야.”
“저는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자세한 얘기는 호텔에 도착해서 얘기해 줄게.”
“네, 알겠습니다.”
힐튼 아부자 호텔 스위트룸.
정명훈 법인장은 겨울이 냉장고에서 꺼내온 시원한 음료수를 한 모금 마시고,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문 지점장, 이제부터 내가하는 얘기 잘 들어.”
“네, 말씀하십시오.”
윙윙―
말을 꺼내려는 아주 공교로운 순간, 겨울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모르는 번호였지만, 누가 전화를 걸어왔는지 알고 있었기에 재빨리 별도 공간으로 이동해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한겨울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나이지리아 대사관의 존슨 제프리 사무관입니다. 지금 1층에 있는 커피숍에 와 있는데, 잠깐 만났으면 합니다.]
즉, 도감청이 불가능한 핸드폰을 가지고 왔다는 의미였다.
“알겠습니다. 지금 내려가도록 하겠습니다.”
딸깍.
통화를 끝낸 겨울은 정명훈 법인장에게 다가가서 잠깐 외출했다가 돌아오겠다고 보고했다.
“알았어. 다녀와.”
“한 대리, 나도 같이 가면 안 될까?”
입사 선배들과 같이 있는 자리가 불편했는지, 하도진 부지점장이 주섬주섬 일어서며 따라나섰다.
“그렇게 해.”
겨울보다 정명훈 법인장의 입이 먼저 열렸다.
* * *
커피숍.
겨울과 하도진 부지점장은 존슨 제프리 사무관과 정식으로 인사를 나눴다.
“제프리 사무관님, 도감청이 불가능한 핸드폰은 가지고 오셨습니까?”
“네. 여기 있습니다.”
제프리 사무관은 가지고 온 종이 가방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겨울은 종이 가방에서 자신의 전화번호가 적혀 있는 핸드폰 케이스를 꺼낸 후, 케이스를 개봉해서 핸드폰을 꺼냈다.
겨울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제프리 사무관이 입을 열었다.
“한 부사장님, 아직 개통하지 않은 핸드폰입니다.”
“아, 그렇습니까?”
“적당한 시기에 개통하시면 될 겁니다.”
“아, 네.”
겨울은 얼른 핸드폰을 케이스에 다시 집어넣고, 종이 가방에 넣었다.
“만약에 핸드폰을 분실하거나 파손돼서 사용이 불가능하면, 각국에 주재하고 있는 우리나라 대사관에 요청하십시오. 그러면, 최신 핸드폰으로 교체해 드릴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잠시 대화가 중단된 틈을 타서 하도진 부지점장이 입을 열었다.
“오늘 공항에서 중국의 천유런 외교부장과 수행원들을 봤습니다. 미국 쪽에서 파악하고 있습니까?”
제프리 사무관은 하도진 부지점장이 잘못 봤을 거라고 판단했다.
천유런 외교부장은 일반인들이 사용하는 통로가 아닌 VIP 전용 통로를 이용했을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그 문제를 꼬집어서, 하도진 부지점장의 신경을 거슬리게 할 생각은 없었다.
“정말입니까?”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짧게 대답한 하도진 부지점장은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핸드폰을 작동시켜서 동영상을 재생시켰다.
동영상을 본 제프리 사무관은 하도진 부지점장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목에 핏대를 세워 가며 버럭버럭 소리를 내지르고 있는 사람은 천유런 외교부장이 틀림없었으니까.
이와 동시에 천유런 외교부장이 어떤 내용으로 수행원들한테 화를 내고 있는 지 몹시 궁금했다.
“하 부지점장님, 동영상 파일을 저한테 전송해 주실 수 있습니까?”
“번호를 알려 주시면, 바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하도진 부지점장에게 동영상 파일을 전송받은 제프리 사무관은 즉시 누군가에게 파일을 전송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그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상대방과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 5분 정도 통화한 제프리 사무관은 기분 좋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 부지점장님, 천유런 외교부장이 열 받은 이유를 알려 드릴까요?”
“왜 그랬답니까?”
“그가 열 받은 이유는…….”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