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모두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방안
부투야 실장과의 저녁 식사 시간까지 비어 있는 막간을 이용해서, 겨울과 가쿠타 과장은 은센기 사장을 만나러 H&E 트레이딩 사무실로 이동하고 있는 중이었다.
창밖을 내다보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가쿠타 과장이 시선을 차 안으로 옮기며, 겨울에게 물었다.
“한 대리님, 제가 H&J 컨설팅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합니까?”
겨울은 가쿠타 과장에게 자신의 비서실장 역할을 맡길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지난주에 정명훈 법인장에게 이 문제와 관련해서 대화를 나눠 봤다.
그는 가쿠타 과장이 자신의 비서실장 역할을 수행하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하다고 진단했다.
아프리카에서라면 그의 활약이 기대가 되겠지만, 근무지가 한국이라면 감점 요인이 너무 많다는 이유에서였다.
가쿠타 과장과 3년 넘게 근무한 그의 의견이기에 무시할 수는 없었다.
정명훈 법인장과 가쿠타 과장을 활용할 방법을 논의한 끝에 아프리카 대륙을 상대하는 무역팀을 신설하고, 팀장 자리를 맡기는 것으로 결론 내렸다.
“과장님은 신설되는 아프리카 무역팀의 팀장을 맡아야 합니다.”
겨울의 얘기를 들은 가쿠타 과장은 기쁜 생각보다 걱정이 먼저 앞섰다.
팀을 이끌어 가기 위해서는 능력도 중요하지만, 조직 장악 능력이 필수 요소였다.
과연 한국인 팀원들이 흑인이라는 인종을 문제 삼지 않고 팀장으로 인정할까 하는 점이 걱정이었다.
“한 대리님, 제가 팀장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까요?”
“우리나라에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과장님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면, 충분히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겁니다.”
“제가 팀을 제대로 이끌지 못하면 어떻게 하죠?”
겨울은 가쿠타 과장이 무엇 때문에 이런 말을 꺼냈는지 단숨에 눈치챘다.
좋은 방법이 없을까 궁리하다가 좋은 아이디어 하나를 떠올렸다.
“저는 아프리카 무역팀에 한국인만 배치할 생각이 없습니다.”
“혹시… 아프리카 대륙 출신 사람들을 추가로 채용한다는 말씀인가요?”
“아프리카 나라들을 상대로 비즈니스를 전개해야 하는데, 당연한 거 아닌가요? 과장님이 유능한 사람들을 추천해 주세요.”
“각 지점별로 한 명 정도면 될까요?”
가쿠타 과장의 목소리가 정상으로 돌아오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팀의 규모가 커지면 추가로 채용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셔야 할 겁니다.”
“그야 물론이죠.”
윙윙―
그때, 겨울의 손에 들려 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액정에 표시된 전화번호를 확인하니, 모르는 전화번호였다.
겨울은 전화를 받을까말까 고민하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한겨울입니다.”
[한겨울 대리님, 조연석 대사입니다.]
“안녕하십니까, 대사님.”
[한 대리님 덕분에 우리나라와 콩고민주공화국의 사이가 더욱 친밀해져서 기분이 너무 좋습니다.]
“아이고, 쑥스럽네요.”
[내가 전화한 이유는 부투야 실장님께 특별히 전화를 받아서입니다.]
“네, 말씀하십시오.”
[가엘 가쿠타 씨의 취업 비자와 비엠베 은센기 씨의 비즈니스 비자를 우리나라 대사관에 신청하라고 전해 주세요.]
겨울은 장대산이 가쿠타 과장의 취업 비자를 책임지고 발급해 준다고 했을 때, 미국을 통해서 대한민국 대사관에 모종의 조치를 취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기발하게도 부투야 실장에게 부탁을 한 모양이었다.
그런 묘안을 생각해 내지 못한 자신의 멍청함을 탓하며, 그는 조연석 대사와 통화를 이어 나갔다.
“대사님, 비자는 언제부터 신청하면 됩니까?”
[내일부터 아무 때고 신청하라고 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한 대리님, 우리나라와 콩고민주공화국의 관계 개선에 더욱더 힘써 주십시오.]
“물론입니다. 들어가십시오, 대사님.”
겨울이 전화를 끊자, 자기 얘기임을 귀신같이 알아챈 가쿠타 과장이 질문을 해 왔다.
“누구십니까?”
“한국 대사님과 통화했는데, 내일부터 아무 때고 대사관에 취업 비자를 신청하라고 하셨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은센기 사장은 비즈니스 비자를 왜 발급 받으려고 했을까요?”
“글쎄요.”
* * *
겨울이 지난 1월에 H&E 트레이딩 사무실에 처음 발을 디뎠을 당시에는 황량함이라는 단어가 떠오를 정도로 휑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지금은 상전벽해라는 말이 떠오를 정도로 모든 점이 변해 있었다.
당시에는 은센기 사장을 포함해서 직원이 달랑 세 명이었지만, 지금은 눈에 보이는 직원들만 해도 열 명이 넘었다.
게다가 사무실 내부를 치장하고 있는 고급스러운 인테리어는 또 무엇이라는 말인가.
겨울이 놀라 사무실 내부를 여기저기 둘러보고 있는 사이, 루암바 과장이 빠르게 달려와서 인사했다.
“한겨울 부사장님, 어서 오십시오.”
“루암바 과장님, 오랜만입니다. 은센기 사장님은 어디 가셨습니까?”
“방금 전에 손님들이 오셔서 사장실에 계십니다.”
“아, 그렇군요. 저희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말리는 겨울을 뒤로하고, 루암바 과장은 기어이 사장실 문을 노크하고 겨울이 왔음을 알렸다.
잠시 후, 은센기 사장과 50대로 보이는 두 사람이 사장실 문을 열고 뛰어 나왔다.
“한 부사장님, 어서 오십시오.”
“은센기 사장님, 오랜만입니다.”
“이분들은 나이지리아에서 규모가 상당히 큰 NIGA라는 유통 회사를 경영하고 있는 아바 모우라 사장과 부카 티지아니 마케팅 부사장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대한 그룹 아프리카 법인에 소속되어 있는 한겨울 대리라고 합니다.”
“저 역시 반갑습니다. 저는 은센기 사장님께 소개받은…….”
두 사람과 인사를 끝낸 겨울은 우두커니 서 있는 가쿠타 과장을 소개시켜 주었다.
상견례 시간이 지나자, 은센기 사장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제 사무실로 들어가서 대화를 나누시는 게 어떨까요?”
“네. 좋습니다.”
겨울은 비어 있는 자리에 앉으려 했으나, 은센기 사장의 강권으로 인해서 원치 않게 상석에 앉았다.
잠시 후, 직원이 서빙한 차를 한 모금 마신 겨울이 입을 열었다.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모우라 사장님께서는 저를 알고 계셨습니까?”
“제 와이프의 오빠가 케이브 오코사 비서실장님이십니다.”
즉, 오코사 비서실장과 처남매부 사이라는 얘기였다.
“아, 그러시군요. 오코사 실장님은 잘 지내고 계십니까?”
“지난주부터 엄청나게 바쁘신 것 같았습니다.”
오코사 실장은 지난주 목요일에 연합군을 대표해서 나이지리아 중국 대사를 불러들여 선전포고를 날렸다.
따라서 지금쯤 그는 중국과 협상 전략을 수립하느라 매우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터였다.
지금 모우라 사장은 그 점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리라.
“아무리 바빠도 건강은 챙겨 가며 일하셔야 할 텐데요.”
“그러게 말입니다.”
겨울은 본격적인 대화를 나누기 위한 예열은 이쯤이면 됐다고 생각하고, 화제 전환을 시도했다.
“모우라 사장님께서는 H&E 트레이딩에 무슨 일 때문에 찾아오셨습니까?”
모우라 사장은 열흘 전의 일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회사에 출근해서 업무를 보고 있는데, 오코사 실장이 전화를 걸어 왔다.
그는 한국의 SH무역이라는 회사에서 보내온 정수기 제안서를 메일로 발송할 테니까, 가격이 적당한지 확인해 보고 피드백 달라고 요청했다.
메일을 다운받아서 제안서를 검토하다가 열 받아서 뚜껑이 열리는 줄 알았다.
자신들이 중국에서 수입했던 정수기보다 성능이 훨씬 뛰어난 것에 비해서 가격이 상당히 저렴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중국의 정수기 회사에게 바가지를 쓰고 있었는데, 기분이 좋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가까스로 화를 다스리고 오코사 실장이 보내준 제안서를 근거로 가격 조사를 실시했다.
그래서 얻은 결론은 성능에 비해 가격이 적당한 것이 아니라, 많이 저렴하다는 것이었다.
이를 오코사 실장에게 즉시 보고했고, 현재 특별 지시를 하달받은 상태였다.
그는 다시 한번 지시 받은 내용을 머릿속에 떠올린 후, 겨울의 질문에 대답했다.
“저희는 중국에서 매년 20만 대 정도의 정수기를 수입해서 80%는 정부 기관에 납품하고, 20%는 자체적으로 판매하고 있습니다. 열흘 전에 한국의 SH무역에서 보내온 제안서를 보고…….”
결론적으로 얘기해서 H&E 트레이딩으로부터 정수기 20만 대를 공급받고 싶다는 얘기였다.
모우라 사장의 얘기를 끝까지 들은 겨울은 딜레마에 빠져들었다.
가격은 유통 단계를 거칠 때마다 필연적으로 상승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H&J 컨설팅이 정수기 제조업체와 계약한 후, NIGA에 직접 공급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제일 저렴한 방법이었다.
문제는 모우라 사장이 자신들이 아닌, H&E 트레이딩으로부터 정수기를 공급받기를 원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유통단계를 추가해서 자신들이 H&E 트레이딩에 정수기를 공급하면 되지만, 제안서를 작성한 호영이에게 원망을 들을 가능성이 있었다.
‘세상에 쉬운 일이 하나도 없구나.’
이런저런 고민 끝에 겨울은 모두에게 혜택이 돌아갈 수 있는 방안을 도출해 내고, 모우라 사장과 대화를 시작했다.
“사장님께서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지 말씀해 보십시오.”
“SH무역이 정수기 가격을 저렴하게 제안한 이유는 정수기 제조업체에 선급금 지급과 대량 구매라는 점을 강조해서 가격 할인을 많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저희도 같은 조건으로 수입하면 되잖습니까?”
“네?! 저희를 어떻게 믿고요?”
겨울이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
“오코사 실장님이 한 부사장님을 철석같이 믿고 있는데, 저희가 믿지 못하면 누가 믿겠습니까?”
“모우라 사장님, 또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말씀해 보십시오.”
“SH무역이 제안한 가격에는 H&E 트레이딩의 이익과 부대비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익률 25%를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동일하게 적용해 드리겠습니다.”
“네? 그렇게 하면 이익이 남습니까?”
사실 모우라 사장도 오코사 실장에게 이익이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는 우려를 표명했다.
그랬더니 그는 자신에게 반대급부로 특급 정보 하나를 건네주었다.
그의 얘기를 듣는 순간 놀라서 까무러치는 줄 알았다.
투자한 자금에 여섯 배가 넘는 이익을 남겨 줄 거라고 하는데, 놀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거짓말이라고 치부할 수도 없는 것이, 나이지리아 이인자인 오코사 실장의 입에서 나온 얘기였다.
그와 통화를 끝낸 후, 보유하고 있던 자금을 탈탈 털어서 테슬라 주식을 급히 매입했다.
오코사 실장이 언급한 대로 주식은 졸금졸금 오르기 시작하더니, 벌써 10% 가까이 수익률을 올리고 있는 중이었다.
속으로 흐뭇한 생각을 하면서 겨울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한 부사장님, 제가 손해 보면서 정수기를 수입해서 판매하겠습니까?”
이익이 남는다고 하는데, 꼬치꼬치 캐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겨울은 마지막으로 한 가지 문제점을 더 점검했다.
“모우라 사장님, SH무역의 정수기 수출 담당자와 통화를 잠깐 했으면 합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모우라 사장의 양해를 받은 겨울은 호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늦은 시간에 웬일이냐?]
“지난번에 너희 회사가 VIP들에게 제안한 정수기 있잖아.”
[그게 뭐?]
“내가 지금 그 정수기를 수입하기 희망하는 바이어와 상담하고 있어.”
[수량하고 조건이 어떤데?]
시큰둥하던 호영의 목소리가 먹이를 노리고 있는 하이에나처럼 날카롭게 돌변했다.
“수량은 20만 대이고, 선급금 지급 조건이야.”
[뭐야! 그게 정말이야?]
예상한 대로 호영이는 깜짝 놀라는 반응을 나타냈다.
“바이어가 인구가 2억 명이 넘는 나이지리아 사람이야.”
[그렇다면 충분히 가능하겠군. 4월 말부터 매월 4만 대씩 선적 가능하다고 얘기해 주고, 가격은 지난번과 동일한 조건이야.]
“20만 대를 수입하는데, 가격이 너무 빡빡한 거 아니야?”
[정수기 제조회사가 매월 생산할 수 있는 한계가 5만 대야. 이제 감이 잡혀?]
호영은 정수기 4만 대를 발주할 때마다 선급금을 지급할 생각인 것이다.
“알았어. 나중에 통화하자.”
“그래.”
딸깍.
전화를 끊은 겨울은 호영과의 통화 내용을 설명해 주면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20만 대를 한꺼번에 계약 체결하되, 발주할 때마다 선급금을 지급받았으면 합니다.”
“그 방법이 제일 합리적인 것 같네요.”
“계약은 당장 급한 게 아니니까, 3월 중에 체결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