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그 남자의 과거사
겨울은 가쿠타 과장과 H&J 컨설팅과 관련한 대화를 마무리 짓고, 정수기 수출 건에 대해서 물었다.
“가쿠타 과장님, 정수기 수출 건과 관련한 업무는 어디까지 진행됐나요?”
“어제 저녁때 네 개 나라와 거래 조건에 대해서 합의를 완료했고, 이제 계약서만 작성하면 됩니다.”
겨울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했다.
자기가 부투야 실장 등으로부터 정수기와 관련한 얘기를 들은 게 지난주 금요일 오전.
불과 4일 만에 모든 절차를 마무리했다는 말은 해가 서쪽에서 떴다는 말과 같은 의미였다.
왜냐하면 이곳은 업무 처리 속도가 엄청나게 느리기로 소문난 아프리카였으니까.
“에이, 거짓말하지 마세요.”
“제가 한 대리님한테 거짓말을 할 이유가 뭐가 있는데요?”
“그럼 제가 뭐 좀 물어봐도 되나요?”
“얼마든지요.”
“SH무역에서 제안서를 언제 보내왔습니까?”
“금요일 밤에 왔습니다.”
“그 이후의 진행 과정을 얘기해 보세요.”
“제가 H&E 트레이딩에 합류해서 일요일 오전에까지 관세를 포함한 최종 견적을 산출했고, 오후에 부투야 실장님께 전송해 줬습니다. 그리고 어제 저녁때 네 나라로부터 최종 컨펌 받았습니다.”
“H&E 트레이딩에서 산출한 가격과 관련해서, 네 나라에서 아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까?”
사실 가쿠타 과장도 그 점이 의아스럽기는 했다.
아무리 네 나라의 VIP들이 겨울에게 큰 도움을 받았다고 하지만, 대충대충 넘어가려는 면이 없지 않아 있었으니까.
하지만 VIP들이 겨울과 미국에서 이미 합의했다는 얘기를 듣고 더 이상 의문을 품지 않았다.
“네. 최대한 빨리 계약하러 오라는 말밖에 들은 게 없습니다.”
겨울은 네 나라가 계약을 서두르는 이유를 어느 정도 감 잡았다.
H&J 컨설팅과 H&J Investment의 초기 운영 자금을 만들어 주기 위함이리라.
그들에게 고맙다고 감사 인사를 전하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하고,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제일 먼저 인연을 맺은 부투야 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 후, 탄자니아의 문두라 부통령, 우간다의 마사카 부통령과 통화한 후, 마지막으로 나이지리아의 오코사 실장과도 통화를 했다.
“실장님, 정말 고맙습니다.”
[한 대리님이 우리에게 도움을 준 게 얼마인데요. 별것 아니니까,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중국과는 언제쯤 전쟁을 시작할 예정입니까?”
[내일이나 모레쯤에 선전포고를 날릴 예정입니다.]
“앞으로 시간이 바쁘게 흘러가겠네요?”
[아마도 그렇겠지요.]
“이번 기회에 원하는 것을 반드시 쟁취하시기 바랍니다.”
[하하, 그래야지요. 그런데 바하리 대통령님께서 정 법인장님과 한 대리님을 최대한 빨리 만나 보고자 하시는데, 어떻게 할까요?]
겨울은 2월 말에 대한 그룹을 퇴사하고, 3월 초에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스케줄을 잡아 놓은 상태였다.
따라서 바하리 대통령을 만나볼 수 있는 시간은 이번 주와 다음 주밖에 없었다.
더구나 그에 대한 결정권은 자기가 아닌 정명훈 법인장한테 있었다.
“법인장님과 상의한 후에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통화를 끝낸 겨울은 곧바로 정명훈 법인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바하리 대통령에게 초청받은 사실을 보고했다.
“뭐라고 답변할까요?”
[다음 주 월요일에 콩고 지점에 출장 갔다가, 나이지리아로 넘어가는 것으로 하자고.]
정명훈 법인장이 콩고 지점을 방문하는 이유는 보나마나 빤했다.
지금까지 진행된 업무를 점검하는 것도 있지만, 하도진 부지점장을 스카우트하기 위함이리라.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대산 씨와 통화해서 법인 설립 문제는 마무리 지었습니다.”
[알았어.]
겨울은 즉시 오코사 실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정명훈 법인장의 의견을 전달했다.
그렇게 그가 모든 일을 끝내고 핸드폰을 내려놓는 순간,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가쿠타 과장이 말을 건네 왔다.
“다음 주에 출장 가십니까?”
“네. 콩고민주공화국과 나이지리아에 출장 계획이 있습니다.”
“탄자니아와 우간다에 수출하는 정수기 계약 건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두 나라도 가 보기는 해야 하는데, 스케줄상 어려울 거 같네요.”
“두 나라는 은센기 사장보고 계약을 체결하라고 하겠습니다.”
“은센기 사장이 계약을 체결할 수 있을까요?”
“H&E 트레이딩의 루암바 과장이 알아서 할 겁니다. 역량이 뛰어난 친구입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피곤하실 텐데, 이제 숙소로 돌아가서 쉬십시오.”
“갈 때 가더라도 점심은 먹고 갑시다.”
“하하, 그럴까요?”
점심 식사를 하고 호텔로 돌아온 겨울은 피곤한 몸을 침대에 뉘였지만, 이상하게 머리만 복잡할 뿐, 잠이 오지 않았다.
그럴 때는 역시 절친과의 통화가 제격이었다.
[왜?]
“뭐하냐?”
[방금 퇴근했어.]
“생각보다 퇴근이 늦네?”
[어떤 개떡 같은 인간이 나를 못 살게 굴어 대는 통에 돌아 버리기 일보직전이다.]
“으음, 설마 그 사람이 나는 아니겠지?”
[오호라, 찔리는 게 있나 보네?]
“아니, 없어. 은센기 사장이 아직도 못살게 굴고 있는 중이냐?”
[어휴, 말도 마라. 난 아프리카 사람이 성격이 느긋한 줄 알았는데…….]
호영의 얘기를 듣고 있던 겨울은 궁금함이 치솟았다.
“제안서를 보내 준 것으로 SH무역의 임무는 끝이 아니었냐?”
[선급금을 곧 보내 줄 테니까, 정수기를 3월에 선적할 수 있도록 해 달란다. 은센기 사장은 정수기 5만 대를 붕어빵 찍어 내는 것보다 쉽다고 생각하나 봐.]
“그나저나 3월에 선적은 가능하냐?”
[빅 바이어님이 요구하는데, 어떻게 해서든지 납기를 맞춰 봐야지.]
“콩고민주공화국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머지 세 나라는 정수기를 누구한테 운송할 생각이냐?”
[H&E 트레이딩에서 해당 나라에 소재하고 있는 무역 회사와 컨소시엄을 구성했다고 하더라.]
은센기 사장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고, 아마 루암바 과장이 추진했을 것이다.
능력이 뛰어난 루암바 과장이 은센기 사장의 곁에 있다고 생각하니, 든든한 마음이 드는 겨울이었다.
“알았다. 3월에 한국에서 보자.”
[그래라.]
* * *
며칠 뒤.
콩고민주공화국 은질리 국제공항의 입국장에서는 김종학 지점장과 하도진 부지점장이 정명훈 법인장 등을 기다리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지점장님, 법인장님과 추 이사님이 동시에 우리 지점을 방문하는 이유가 뭘까요?”
“우리 지점의 업무를 점검하기 위해서 오신다는 얘기를 듣지 못했어?”
“아직 일사분기도 지나지 않았잖아요.”
“그만큼 콩고 지점이 중요하다는 얘기잖아.”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겠죠?”
“다른 이유라니?”
“우리 콩고 지점을 감사하러 올 수도 있잖아요.”
“우리 지점이 감사당할 이유가 뭐가 있는데?”
“법인 카드 사용액이 다른 지점에 비해서 월등하게 많잖아요.”
그럴 리는 없겠지만, 법인 카드 때문에 감사를 당한다면, 김종학 지점장은 항변할 거리가 차고 넘쳤다.
각 나라의 VIP들과 비즈니스를 진행하는데, 허름한 곳에서 미팅하거나 식사할 수 없는 노릇 아닌가.
그리고 법인 카드 한도가 초과될 때마다 품의해서 결재를 득해 놨기 때문에 거리낄 것이 없었다.
“부지점장, 법인장님은 그렇게 쫀쫀한 분이 아니야.”
“하긴… 지점장님 말씀이 맞는 것 같네요.”
“저기 나오신다.”
두 사람은 정명훈 법인장에게 다가가서 목례하고 반갑게 인사말을 건넸다.
“법인장님, 콩고 지점에 방문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김 지점장, 반겨 줘서 고마워.”
“김 지점장의 눈에 나는 보이지 않나 보네?”
“아이고, 지금 인사하려고 했습니다.”
김종학 지점장이 추성민 이사의 농담을 농담으로 받았다.
“여기는 늘 복잡하구먼. 얼른 콩고 지점으로 가자고.”
“네, 이사님.”
사람들이 많아서 두 대의 승용차로 이동했다.
겨울은 하도진 부지점장, 가쿠타 과장과 함께 같은 차로 이동했다.
“한 대리, 법인장님과 관리팀장님이 우리 지점을 갑자기 방문한 이유가 뭐야?”
겨울은 이유를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모른 척을 할 때였다.
“저 같은 말단 직원이 알 리가 있겠습니까?”
“그럼 한 대리하고 가쿠타 과장은 우리 지점에 왜 왔는데?”
“시집간 딸이 친정에 오는 게 무슨 문제가 되나요?”
“맞아. 한 대리한테는 우리 콩고 지점이 친정이었지?”
“하하, 맞습니다.”
“미국 출장은 잘 다녀왔고?”
“부지점장님이 염려해 주신 덕분에 잘 다녀왔습니다.”
“하긴, 내가 한 대리 걱정을 많이 하기는 했지.”
겨울이 하도진 부지점장과 처음으로 인사를 나눈 것은 작년 8월.
본격적으로 친해진 것은 지난 1월 중순경이었다.
시간상으로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겨울은 하도진 부지점장이 특히 더 마음에 들었다.
밝고 쾌활한 그의 성격 탓도 있지만, 친동생을 대하듯 항상 편안하게 대해 준 점이 크게 작용했다.
그는 친화력뿐만 아니라 출중한 능력을 겸비하고 있었다.
자기에게 항상 호의적인 감정을 보여 주고 있는 그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짝 힌트를 주기로 마음먹었다.
“부지점장님, 궁금한 게 있는데, 여쭤도 될까요?”
“얼마든지 물어봐.”
“부지점장님과 같이 근무하던 후배가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직장 상사로 모셔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요?”
“한 대리는 직장 생활 경험이 부족해서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입사 후배를 직장 상사로 모시는 일은 아주 흔하게 발생하는 일이야. 그런데 갑자기 왜 묻는데?”
“그냥 여쭤봤어요.”
하도진 부지점장이 짧은 기간 동안 겨울을 접해 보고 느낀 점은 보기보다 입이 무겁고, 실없는 소리를 잘 내뱉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로 미루어 봐서 겨울은 지금 자기에게 무언가 힌트를 주고 있는 것이리라.
힌트가 무엇일까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설마… 한 대리가? 아니지. 한 대리가 법인장님하고 관리팀장님과 우리 지점을 같이 왔다는 의미는… 아이고, 도저히 궁금해서 안 되겠다.’
결심을 굳힌 하도진 부지점장은 조심스런 목소리로 겨울에게 물었다.
“설마… 콩고 지점의 지점장으로 한 대리가 오는 건 아니겠지?”
“에이, 김 지점장님이 철벽같이 지키고 있는데, 제가 어떻게 지점장으로 오겠어요.”
“그것도 아니면 도대체 뭐야?”
“후후, 30분 정도 후에 알 수 있을 겁니다.”
“한 대리, 그러지 말고, 나한테만 살짝 얘기해 주면 안 돼?”
겨울은 궁금증에 목말라 있는 하도진 부지점장에게 한 가지 힌트를 더 주기로 결정했다.
“자세한 것은 말씀드릴 수 없지만, 부지점장님의 결정 여부에 모든 것이 달려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만 말해 줘. 나한테 좋은 일이야?”
“당연히 좋은 일입니다.”
“알았어. 더 이상 묻지 않을게.”
겨울은 묘하게 변한 차 안의 분위기를 전환시킬 목적으로 엉뚱한 얘기를 꺼내 들었다.
“부지점장님은 어떻게 아프리카 법인으로 오셨어요?”
하도진 부지점장은 4년 전까지만 해도 대한 그룹의 최고 핵심 부서인 전략기획실 기획 1팀에서 차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런데 5년 전, 12월에 있던 인사이동이 문제였다.
팀장으로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인 설영석 부장이 부임해 오면서 그때부터 패가 꼬이기 시작했다.
설영석 팀장은 부임하자마자 이사로 승진해야겠다는 욕심으로 틈만 나면 팀원들을 닦달하기 시작했다.
평일에 철야까지 야근하는 것은 필수였고, 주말에는 일거리를 싸 들고 퇴근할 정도로 달달 볶였다.
이러다가는 과로사할 수 있다는 생각에 팀원들 대표로 설영석 팀장에게 한마디 했더니만, 능력은 쥐뿔도 없는 부하 직원이 하극상을 저질렀다고 동네방네 소문을 퍼뜨렸다.
졸지에 무능력자에, 하극상까지 저지른 안하무인으로 찍혀 버리는 신세로 전락했다.
퇴사를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던 중에 아프리카 법인에 근무할 직원들을 모집한다는 사내 공모를 보게 되었다.
퇴사할 바에는 아프리카 법인에서 근무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고, 4년 전 여름에 이곳 아프리카에 오게 되었다.
제법 긴 생각을 끝낸 하도진 부지점장은 덤덤한 목소리로 과거사를 털어놓았다.
“…이렇게 해서 아프리카 법인에 오게 된 거야.”
“부지점장님, 설영석 팀장이라는 분은 임원으로 승진했나요?”
“2년 전에 이사로 승진했다고 들었어.”
“설 이사님은 어디에 근무하시는데요?”
“퇴사하지 않았으면… 대한 그룹 어딘가에 근무하고 있겠지 뭐. 그런데 그 인간에 대해서 왜 물어보는데?”
“그냥 궁금해서요.”
“한 대리, 원래부터 싱거웠나?”
“하하, 제가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