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혹시 저를요?
“한 대리님, 출장 잘 다녀오셨어요?”
겨울이 FTA 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가쿠타 과장이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해 왔다.
“네, 덕분에요. 그동안 별 일 없었어요?”
“FTA 팀은 평상시랑 같고, 저는 바빠서 죽어나고 있습니다.”
가쿠타 과장의 말에는 그가 부투야 실장 등에게 발주 받은 정수기 5만 대와 관련한 업무를 수행하고 있음을 내포되어 있었다.
겨울도 그와 정수기 수출 건에 대한 대화를 나눠 보고 싶었지만, 지금 그럴 수는 없었다.
조금 있으면, FTA 팀원들이 출근하기 시작할 시간이니까.
“앞으로 더 바빠질 것 같으니까, 건강도 챙기면서 일하세요.”
“그야 물론입니다. 그나저나 퇴사 시점은 언제입니까?”
가쿠타 과장이 주위를 둘러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빠르면 2월 말이 될 거 같아요.”
“컨설팅 회사에 저도 데리고 가는 거죠?”
사실 겨울은 컨설팅 회사를 콩고민주공화국에 설립하면서 가쿠타 과장을 회사 창립 멤버로 참여시킬 예정이었다.
하지만 정명훈 법인장이 컨설팅 회사의 창립 멤버로 참여함으로 인해 콩고민주공화국이 아니라 한국에 설립하는 것으로 확정지어졌다.
그 과정에서 가쿠타 과장의 입지가 매우 애매해진 것은 사실이었다.
그의 능력을 생각하면 컨설팅 회사에 합류시키는 것이 맞지만, 과연 그가 한국에 따라가겠다고 나설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겨울이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까 고민하는 사이, FTA 팀원들이 속속 출근하기 시작했다.
“가쿠타 과장님, 그 얘기는 나중에 해요.”
“네, 알았어요.”
잠시 후, 고영규 팀장이 출근했다.
겨울은 재빨리 그의 자리로 다가가서 꾸벅 인사했다.
“팀장님, 출장 다녀왔습니다.”
“수고했어. 회의실에서 커피나 한잔할까?”
“네, 팀장님.”
회의실.
고영규 팀장은 종이컵에 담겨 있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한 대리, 미국 출장이 일주일 넘게 걸린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있어?”
겨울이 해리슨 상원의원의 초대를 받아서 미국을 향해 출발한 게 지난주 월요일이었다.
남아공에 도착한 시간은 어제 저녁 무렵이었으니, 미국 출장은 정확히 8일이 걸렸다.
미국에서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으나, 고영규 팀장에게 얘기해 줄 만한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VIP들이 비밀리에 미국을 방문한 것.
어떻게 보고할까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고, 겨울이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팀장님, 제가 미국에 출장 간 이유는…….”
윙윙―
그때, 고영규 팀장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그는 발신자를 확인하자마자 급하게 상대방과 통화를 시작했고, 몇 마디 주고받은 뒤 바로 종료했다.
“한 대리, 법인장님께서 오라고 하니까, 같이 가자고.”
* * *
정명훈 법인장이 남아 있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입을 열었다.
“한 대리, 미국 출장 기간 동안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세 사람한테 얘기해 주도록 해.”
“법인장님, 어디까지 말해야 하는지 알려 주십시오.”
“VIP들과 관련된 건만 설명해 주면 될 거야.”
“네, 알았습니다.”
짧게 대답한 겨울이 말을 이어 나갔다.
“제가 급하게 미국에 출장 간 이유는 토머스 해리슨 상원의원을 병문안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그게 정말이야?”
추성민 이사도 해리슨 상원의원을 알고 있다는 듯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네, 그렇습니다. 제 입사 동기인 장대산 씨의 양아버지가 해리슨 상원의원입니다.”
“알았어. 계속 얘기해 봐.”
“그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상세하게 꿰뚫고 있었습니다. 미국이 아프리카 대륙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계획을 수립하고 있던 중, 때마침 백도어 프로그램 설치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겨울은 부투야 실장 등이 비밀리에 미국을 방문해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중요한 내용만 설명해 주었다.
당연히 민감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철저하게 숨겼다.
“…해서 합의서를 작성하고 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나는 미국과의 협상에 옵저버 자격으로 참석해 달라는 부투야 실장의 부탁을 받고, 급하게 미국으로 출발한 거야.”
정명훈 법인장의 첨언을 끝으로 모든 설명이 끝이 났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이용수 마케팅 지원팀장이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법인장님, 송유관 건설 공사는 어떻게 될 거 같습니까?”
“중국의 국영기업이 참여한 프로젝트는 모두 중단된다고 보면 될 거야.”
“입찰이 또 연기되는 겁니까?”
정명훈 법인장은 모든 정황을 알고 있었지만, 아직 계약서에 사인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함부로 언급할 수 없었다.
“나도 정확히 모르지만, 3월에 있을 입찰은 무조건 연기된다고 보는 게 맞겠지.”
“고 팀장과 한 대리가 많이 섭섭해 하겠네요.”
“어쩔 수 없지 뭐.”
그때, 고영규 팀장이 발언권을 요청하고 입을 열었다.
“법인장님, 다섯 개 나라에서 중국이 철수하면, 그 공백은 미국이 메우게 되는 겁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미국은 그 나라들과 그다지 친하지 않다고 하더라고.”
“그럼 그 나라들의 경제는 어떻게 됩니까? 엉망진창이 되지 않을까요?”
“내 얘기를 끝까지 들어 봐. 미국은 투자회사를 설립해서 다섯 나라의 경제를 뒷받침해 줄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했어.”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FTA 팀이 어떻게 노력하는가에 따라서 중단된 프로젝트를 우리가 가지고 올 수 있으니까, 열심히 해 보라고.”
“네, 알겠습니다.”
고영규 팀장과 대화를 끝낸 정명훈 법인장은 이용수 팀장에게 말을 건넸다.
“중국 국영기업들이 아프리카 대륙의 나라들과 공동으로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들이 있는지, 미리 파악해 놓고 있어야 할 거야.”
“5개국만 파악해 놓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이 팀장, 중국이 이 다섯 나라한테 뒤통수를 크게 맞으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 것 같은가?”
이용수 팀장은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예측해 보았다.
당연히 중국은 다섯 나라에 비밀유지 조건을 내세울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비밀이 어디 있겠는가.
결국 알음알음 소문이 퍼지는 것은 순식간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소문은 중국에 부채를 지고 있는 나라들에게 흘러들어, 불안정한 정국에 기름을 붓는 역할을 수행할 것이다.
당연히 미국을 포함한 서방국가들은 연합군에 강력한 힘을 실어 줄 거고.
힘에 밀린 중국은 울며 겨자 먹기로 아프리카 대륙에서 손 털고 철수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다.
정명훈 법인장은 이 과정에서 발생한 전리품을 챙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리라.
하지만 이용수 팀장은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미국을 포함한 서방국가들이 자신들에게 전리품을 나눠 줄까에 대한 의문이었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걱정 마. 해리슨 상원의원이 우리한테 전리품을 나눠 주기로 약속했으니까.”
“투자회사… 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소문나서 좋을 게 없으니까, 은밀하게 파악해 놓으라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추 이사만 남고 모두들 나가서 일 봐.”
“네, 법인장님.”
모두들 밖으로 나가자, 정명훈 법인장은 추성민 이사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추 이사, 이제부터 내가 하는 얘기는 하늘이 반쪽으로 갈라지는 한이 있더라도 비밀로 해야 할 거야.”
“네, 말씀하십시오.”
“내가 미국에 급하게 출장을 떠난 이유는 부투야 실장의 요청 때문이 아니라, 해리슨 상원의원의 초청 때문이었어.”
“왜요?”
“내가 아까 얘기했듯이 미국은 아프리카 대륙에 직접 개입할 생각이 없어.”
추성민 이사는 이제야 모든 의문이 풀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해리슨 상원의원은 겨울에게 생명을 구해 준 보답을 고민하다가 투자회사를 생각해 낸 것이리라.
겨울이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없기 때문에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고, 그 역할에 정명훈 법인장을 적임자로 낙점한 것이었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중국의 공백을 메워야 할 정도면, 투자회사의 규모 또한 엄청나게 클 것임은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좋아하는 선배의 일이 잘 풀리는 것을 기뻐하고 축하해 줘야 하는데, 왜 이렇게 배가 아픈지.
추성민 이사는 자신의 예상이 맞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추 이사의 예상은 절반만 맞았어.”
“제가 모르는 또 무언가가 있는 겁니까?”
“사실 나하고 한 대리는 창업을 준비하고 있었거든.”
추성민 이사는 겨울이 미국으로 출장가기 직전에 정명훈 법인장과 나눴던 대화가 문득 떠올랐다.
당시에 정명훈 법인장은 겨울의 미국 출장으로 인해서, 대한 그룹에 급격한 변화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고 언급했다.
아마도 그 당시에 이미 퇴직을 결심한 상태였으리라.
자기도 좋은 기회를 잡으면 얼마든지 퇴직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그의 결정이 놀랍지는 않았다.
다만, 송훈석 회장의 총애를 받고 있는 지금, 그가 퇴직을 결심한 것이 의아스럽게 여겨졌다.
“너무 빨리 퇴직하는 거 아닙니까?”
“막말로 얘기해서 나하고 추 이사가 앞으로 대한 그룹에 몇 년이나 더 다니겠나?”
“길어야 오륙 년 아닐까요?”
“제2의 인생을 조금 더 빨리 시작해 보려고, 그동안 한 대리와 창업을 구상하고 있었어.”
“도대체 어떤 회사를 창업할 생각입니까?”
“컨설팅 회사.”
추성민 이사는 배운 것이 도둑질이라고, 정명훈 법인장이 무역 회사를 창업할 거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컨설팅 회사라니.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와 대화를 이어 나갔다.
“설마 저희가 알고 있는 컨설팅 회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런 점이 없지 않아 있지만, 하는 일이 달라. 우리는 한 대리가 가깝게 지내는 VIP들로부터 수주한 일감을 대한 그룹을 비롯한 여러 회사에 분배해 주고, 커미션을 받는 구조로 계획하고 있었어. 그런데 미국 출장에서 변수가 생겼어.”
“미국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데요?”
“미국은 한 대리가 컨설팅 회사를 설립할 예정이라는 얘기를 듣고, 투자회사를 컨설팅 회사의 계열사로 편입시키는 게 어떠냐고 제안을 해 왔어.”
정명훈 법인장은 그 이후에 일어난 일들을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추성민 이사는 투자회사의 운용 자금이 1,000억 달러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놀라서 입을 쩍 벌렸다.
다행히 정명훈 법인장의 설명을 듣고 나서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지만.
“…그렇게 장대산 씨까지 참여하는 거로 결정을 내렸어.”
“법인장님, 그 사실을 회장님께 보고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나하고 한 대리가 미국에서 누구를 만났는지 얘기해 줄까?”
“설마… 회장님을 만났다는 말씀은 아니겠지요?”
“맞아. 회장님을 만났어.”
“네?! 정말입니까?”
예상한 대로 추성민 이사가 깜짝 놀랐다.
“추 이사는 도대체 오늘 몇 번을 놀래야 성에 차겠어?”
“법인장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서 어디 평범한 게 하나라도 있습니까?”
“하긴… 아무튼 계속 얘기해 줄게. 회장님하고 해리슨 상원의원은 예전부터 친하게 지내던 사이라고 하더라고.”
“아, 무슨 말씀인지 이해했습니다.”
“해리슨 상원의원은 회장님께 컨설팅 회사와 투자회사의 설립 목적을 간단하게 설명해 주고, 두 회사가 조기에 정착할 수 있도록 적극 도와 달라고 하셨어.”
“회장님께서는 뭐라고 하셨습니까?”
“생각해 볼 시간을 달라고 하셨어.”
“에이, 설마요.”
추성민 이사가 회의적인 반응을 나타냈다.
정명훈 법인장은 그가 이런 반응을 보일 거라 예상하고,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만약에 추 이사가 그런 상황에 놓인다면, 해리슨 상원의원의 제안을 덥석 물었을까?”
“그야 당연히…….”
추성민 이사가 무언가 생각난 게 있는지 말문을 닫았다.
“회장님도 추 이사와 똑같은 생각이었을 거야.”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회장님께 호출을 받아서 호텔로 달려갔지.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눈 후에 파트너십을 체결하기로 합의했어.”
“서로 윈윈이라고 보면 되겠네요?”
“아무래도 그렇겠지. 이제부터가 진짜니까, 귀담아들어야 할 거야.”
“네, 말씀하십시오.”
짧게 대답하는 추성민 이사의 목소리에 긴장감이 묻어 있었다.
“회장님께서는 신임 법인장을 낙점할 권리를 나한테 주셨어.”
“제발 부탁인데, 까탈스럽지 않은 법인장을 낙점해 주십시오.”
“추 이사의 의견이 우리 아프리카 법인에 소속되어 있는 직원들의 희망 사항이라고 생각하면 될까?”
“그야 당연한 거 아닙니까?”
“직원들이 추 이사를 까탈스럽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겠지?”
“혹, 혹시… 저를요?”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