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흙수저 성공 신화-121화 (121/328)

[121화] 오는 정, 가는 정

송훈석 회장은 이제부터가 진짜라고 생각했다.

H&J Investment가 비록 1,000억 달러라는 엄청난 돈을 운용하는 슈퍼 투자회사라고 하지만, H&J 컨설팅의 계열사라는 구조적인 한계점을 가지고 있었다.

즉, 모기업인 H&J 컨설팅의 결정에 따라 투자를 집행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그가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정명훈 법인장의 얘기는 계속 이어졌다.

“H&J 컨설팅은 한겨울 대리가 책임질 예정이고, 직위는 부사장입니다. 직원들은 회사를 설립하면 그때 채용할 생각입니다.”

“그러지 말고, 우리 대한 그룹에서 인력을 파견해 주면 어떨까요?”

정명훈 법인장은 송훈석 회장의 말에 함정이 숨어 있음을 눈치챘다.

파견.

파견의 사전적 의미는 소속을 바꾸지 않고, 다른 조직에 근무하도록 하는 것을 말했다.

그의 말을 해석하자면, H&J 컨설팅을 동등한 비즈니스 파트너가 아닌, 계열사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만약에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대한 그룹과는 절대로 파트너십을 체결할 수 없었다.

그는 혹시나 싶어 살짝 건드려 보기로 마음먹었다.

“회장님, 파견의 뜻을 알고 싶습니다.”

송훈석 회장은 아차 했다.

무심코 내뱉은 말을 정명훈 법인장이 확대해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건이 더 확대돼서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기 전에 틀어막는 게 급선무였다.

“정 법인장, 나는 별 뜻 없이 파견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뿐입니다. 파견이 아니라 H&J 컨설팅으로 이직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 준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회장님의 제안에 동의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제부터는 저희가 대한 그룹과 파트너십을 체결한다 가정하고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얘기해 보세요.”

“대한 그룹 내부에 저희와 호흡을 맞춰서 업무를 추진할 조직을 신설해 주십시오.”

“아무래도 그래야겠죠.”

그때, 서동호 실장이 발언권을 요청하고 입을 열었다.

“회장님, H&J 컨설팅의 카운터 파트너로 전략기획실이 어떻겠습니까?”

송훈석 회장은 서동호 실장의 숨은 의도를 단숨에 알아챘다.

자신이 수립해 놓은 장기적인 계획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그 방법이 가장 빨랐기 때문에.

“조 실장, 가능하겠어요?”

“서 실장님이 얘기를 꺼내지 않았으면, 제가 먼저 제안할 생각이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즉시 조직을 구성하도록 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들의 대화에 겨울은 눈을 반짝였다.

겨울은 설 연휴 시작 전에 입사 동기인 이재성에게서 흥미로운 소식을 접했다.

신입 사원으로 재입사한 최준하가 연수를 마치고, 전략기획실에 배치됐다는 소식이었다.

작년 연수 당시에는 자신이 절대적인 약자의 신세였지만,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어 버렸다.

즉, 최준하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말이었다.

아니, 겨울은 오히려 당당하게 그와 마주하고 싶은 욕구가 샘솟았다.

“회장님, 최성진 부회장의 외아들인 최준하가 전략기획실에 근무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사실 여부를 확인해 주실 수 있습니까?”

송훈석 회장은 겨울의 의도를 단숨에 이해했다.

그동안 최성진 부회장 부자에게 당한 굴욕을 되갚아 주겠다는 의도이리라.

“최준하를 신설되는 조직에 배치시켜 달라는 뜻이겠죠?”

“제가 지고는 못사는 성격이라서 말입니다.”

“하하하! 한 대리가 원하는 대로 해 줄게요.”

“감사합니다.”

겨울이 뒤로 물러나자, 그 자리를 정명훈 법인장이 차고 들어왔다.

“회장님, 아프리카 법인이 운영하고 있는 FTA 팀을 저희 H&J 컨설팅에 붙여 주십시오.”

이게 웬 횡재라는 말인가.

송훈석 회장은 또다시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정명훈 법인장의 말을 곧이곧대로 해석하면, H&J 컨설팅이 아프리카 대륙에서 진행하고 있거나, 향후 추진할 프로젝트를 대한 그룹에 넘겨주겠다는 뜻이었다.

기쁜 마음에 크게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지금은 체통을 지켜야 할 때였다.

오는 정이 있으면, 가는 정도 있어야 하는 법.

“FTA 팀이 정 법인장의 지휘를 받도록 만들어 주면 될까요?”

“그래 주시면 더욱 감사하겠습니다.”

“알았어요. 그렇게 조치를 취해 줄게요.”

“감사합니다, 회장님.”

“또 원하는 게 있으면 얘기해 보세요.”

“저희 H&J 컨설팅이 아프리카에서 원활한 비즈니스를 전개하기 위해서는 FTA 팀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법인과도 긴밀한 협업 체계 구축이 필수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신임 법인장은 저희와 손발이 잘 맞는 사람을 임명해 주십시오.”

“후임자로 생각해 놓은 사람이 있나요?”

당연히 있었다.

하지만 자칫하면 월권으로 비춰질 수 있기 때문에 발언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정명훈 법인장은 다시 한번 자신의 구상을 떠올려 보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특별히 생각해 놓은 사람은 없지만, 아프리카 대륙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정 법인장이 적임자를 추천해 주면, 그 사람을 신임 법인장으로 임명하도록 할게요.”

“알겠습니다. 이진호 사장님에게 말해 놓겠습니다.”

“그렇게 하시고, 또 원하는 게 있나요?”

“한 대리가 아프리카 대륙에서 벌여 놓은 일들은 FTA 팀에서 모두 커버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때를 대비해서라도 FTA 팀에 충분한 인원을 충원시켜 주십시오.”

“그 점에 대해서는 내가 책임지도록 할게요.”

“저희가 원하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정명훈 법인장이 말을 마치자, 송훈석 회장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파트너십 체결은 언제 하는 게 좋을까요?”

“저희가 두 회사 설립을 완료하고 나면, 체결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럼 그렇게 합시다.”

잠시 대화가 끊어진 틈을 타서 서동호 실장이 발언권을 요청했다.

“정 법인장, 우리 간단하게 합의서를 작성해 놓는 게 어떨까요?”

“어떤 합의서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H&J 컨설팅과 대한 그룹이 파트너십 체결에 합의했다는 내용이 들어간 합의서를 말하는 겁니다.”

“원하신다면 그렇게 해 드리겠습니다.”

“하하, 고마워요.”

그렇게 송훈석 회장을 포함한 여섯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합의서에 들어갈 내용에 대해서 토론했다.

이미 굵직굵직한 사항들은 의논이 된 상태였기 때문에 채 30분이 지나지 않아서 결론을 도출해 냈다.

합의서를 작성하고, 출력 후 사인하는 최종 단계에 이르는 데까지 불과 30분이 걸리지 않았다.

“오늘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거하게 한잔하십시다.”

“회장님, 해리슨 상원의원님께 두 회사가 파트너십을 체결하는 데 합의했다고 연락해 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아차, 깜빡했네요.”

서동호 회장의 조언을 받은 송훈석 회장은 곧바로 해리슨 상원의원에게 전화를 걸어서 합의한 내용을 알려 주었다.

[송 회장님, H&J 컨설팅과 H&J Investment가 세계적인 회사로 우뚝 설 수 있도록 잘 보살펴 주세요.]

“그 점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마십시오.”

[손님이 오셔서 길게 통화하지 못하는 점 양해해 바랍니다.]

“알았습니다. 그럼 내일 오전에 들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딸깍.

전화를 끊은 송훈석 회장은 모두에게 한마디 했다.

“자, 이제 머리를 식히러 갑시다.”

* * *

다음 날, 아침.

아프리카로 돌아가기 위해서 짐정리를 하고 있는 겨울에게 장대산이 불쑥 봉투를 내밀었다.

“대산 씨, 이게 뭔가요?”

“일등석 티켓입니다.”

겨울은 해리슨 상원의원이 이런 호의를 베풀 것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와의 첫 만남 당시에 무거운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가볍게 농담을 던졌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잊지 않고 비행기 티켓을 일등석으로 업그레이드해 줬다.

고마움과 미안함이 교차하는 마음으로 그는 일등석 티켓을 받아 휴대용 가방에 집어넣었다.

“해리슨 상원의원님께 고맙다고 말씀 좀 전해 주세요.”

“그렇게 할게요. 아, 그리고 법인장님의 티켓도 같이 처리하셨어요. 법인장님께 말씀을 안 드린 채로요.”

“법인장님이 깜짝 놀라겠는데요?”

“그냥 주면 재미없다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어요.”

“하하, 무슨 말인지 알았어요.”

겨울과 장대산이 서로를 마주 보며 악동 같은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제가 오전에 긴급회의가 있어서 배웅해 드리지 못할 거 같아요.”

“어떤 회의인지 물어보면 실례가 될까요?”

“정 법인장님과 한 대리님을 경호하기 위한 대책 마련 회의입니다.”

“저희 둘을 위해서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요?”

“아프리카 대륙이 얼마나 위험한지 몰라서 하는 소리예요?”

겨울은 장대산의 말에 일정 부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아프리카 대륙의 나라들치고 치안이 안정된 나라는 별로 없었으니까.

“알겠어요. 그렇게 하세요.”

* * *

“송 회장님은 언제 한국으로 귀국하실 예정입니까?”

“이왕 미국에 온 김에 법인과 사업장을 둘러보고, 다음 주에 돌아갈 예정입니다.”

“안녕히 돌아가시고, 다음에는 병원이 아닌 곳에서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죠. 몸조리 잘하시고, 다음에 뵙겠습니다.”

송훈석 회장과 짧은 인사를 마친 해리슨 상원의원은 정명훈 법인장과 겨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정 법인장님, 한 대리님, 우리 미국은 두 분만 믿고 있겠습니다.”

“하하, 너무 부담 주시는 거 아닙니까?”

정명훈 법인장이 겸연쩍다는 듯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저는 두 분의 능력이 어떤지 잘 알고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H&J 컨설팅과 H&J Investment를 성장시켜 보도록 하겠습니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비즈니스를 전개할 때 어려움이 따르거나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 주십시오. 만약에 저하고 통화가 안 되면, 루퍼트 국무부 장관이나 해인스 상무부 장관에게 연락하십시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정명훈 법인장과 작별인사를 끝낸 해리슨 상원의원은 겨울에게 따뜻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한 대리님, 제 생명을 살려 준 은혜는 영원히 잊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지난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브라이언 박사님께 전화한 것 말고는 한 일이 없습니다.”

“그때 제가 한 대리님께 뭐라고 대답했는지 또 얘기해 드려야 하나요?”

“아이고야.”

겨울이 경직된 분위기를 해소해 보고자, 일부러 익살스런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하하.”

해리슨 상원의원과 웃으며 헤어진 그들은 병원 로비로 내려와서 그들만의 작별 인사를 나눴다.

송훈석 회장은 세 사람에게 일일이 악수를 건네고 푸근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정 법인장, 한 대리, 대한 그룹을 퇴사하는 날까지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도록 신경 써 주세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진호 사장께는 내가 별도로 얘기해 놓도록 할게요.”

“그래 주시면 더욱 감사하겠습니다.”

“대산 씨, H&J 컨설팅과 H&J Investment를 설립할 때 우리 회사 고문 변호사를 붙여 주도록 할게요.”

“네, 고맙습니다.”

“자, 3월에 서울에서 만납시다.”

* * *

워싱턴 덜레스 국제공항.

정명훈 법인장은 진심으로 당황스러웠다.

수하물을 부치고 비행기 탑승권을 발급받으려고 항공사 창구로 다가가 직원에게 여권과 e티켓을 건네주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직원은 예약이 취소됐다고 알려 왔다.

취소는커녕 예약하고 건드린 적조차 없는데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미안하지만, 예약 번호를 다시 한번 입력해 볼 수 있습니까?”

“손님, 벌써 두 번이나 입력해 본 상태입니다. 남아공으로 가시려면, 비행기 티켓을 별도로 구매하시기 바랍니다.”

“후우, 할 수 없지요.”

정명훈 법인장은 낙담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겨울은 서프라이즈는 이쯤이면 됐다고 생각하고, 가지고 있던 e티켓을 항공사 직원에게 건넸다.

“제가 드린 e티켓으로 탑승권을 발급해 주세요.”

“뭐, 뭐야?”

그러자 정명훈 법인장이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해리슨 상원의원께서 법인장님께 드리는 일등석 티켓입니다.”

“그 얘기를 지금 해 주면 어떻게 해?”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서려 있었다.

“법인장님, 저한테 그러지 마시고, 해리슨 상원의원께 말씀하세요.”

“…한 대리, 고마워.”

정명훈 법인장의 목소리에 진심이 담겨 있었다.

“법인장님, 뒤에 손님들이 많습니다. 빨리 탑승권을 발급받으세요.”

파란만장했던 미국 출장을 끝내고, 아프리카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은 두 사람의 마음은 출장 올 때와는 달리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흙수저 성공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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